이도에게는 세 분의 할머니와 세 분의 할아버지가 계신다. 서울에 계시는 친할머니와 친할아버지. Berlin 베를린에 사시는 외할아버지와 외할아버지의 여자 친구인 할머니. 그리고 마지막으로 Bad Saarow 받자아로우에 사시는 외할머니와 외할머니의 새 남편인 할아버지.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이도처럼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세 분씩 계시는 경우는 이 곳에서 그리 특별한 경우도 아니고 특별히 불편하거나 어색할 일도 없다. 심지어 네 분씩 계신 경우도 있다. 나와 마리의 결혼식을 제외하고 이들 모두가 모인 적은 한 번도 없었고 있을 일도 없기 때문이다. 다만 부활절이나 크리스마스 같은 커다란 명절을 두 번씩 반복해야 한다는 게 내게는 고충일 뿐.
2015년 독일 통계청에 따르면 독일의 이혼율은 약 47%로 어마어마한 수치를 자랑한다. 개방적이고 자유로운 성향의 사람들이 다른 도시에 비해 상대적으로 많이 살고 있는 베를린은 독일 평균을 훌쩍 넘는 수치다. 두 쌍이 결혼하면 한 쌍이 이혼한다는 소리다. 이혼한 커플 중에는 이도의 외할머니처럼 재혼을 하는 경우도 있고 외할아버지처럼 혼인은 하지 않은 채 새로운 파트너와 함께 살아가는 경우도 아주 흔하다. 장인어른 같은 경우 역시 이혼 경험이 있는 여자 친구와 15년째 관계를 이어오고 있으며 각자의 집을 따로 가지고 있다. 둘이 함께 지내고 싶을 때에는 같이 지내다 서로의 시간이 필요할 때는 각자의 집에서 지내는 것이다. 멋지다고 해야 하나? 어느 날 장인어른은 자신이 오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여자 친구와 왜 재혼을 하지 않는가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다.
“우리 둘 다 한 번씩 해보았기 때문에 그것이 우리에게는 꼭 필요한 게 아니란 걸 알아. 지금 이대로도 우리 둘은 충분히 좋거든.”
그러한 이유에서 일까? 베를린의 아이들 중 결혼하지 않은 부모에게서 태어난 비율이 50%가 넘는다. 젊은 세대들이 결혼이라는 제도에 대해 얼마나 회의적인지를 보여주는 단면이기도 하다. 물론 배우자의 로맨틱한 청혼과 결혼식 그리고 파티로 이어지는 일생일대의 이벤트를 싫어하는 사람은 드물겠지만 그것들을 즐기기 위해 소요되는 비용과 노력, 그 비용을 마련하기 위한 경제활동 시간과 그에 따르는 스트레스까지 생각한다면 결혼식이 그다지 매력적이지만은 않다. 사랑하는 사람끼리 눈이 맞아 같이 살다가 아이가 생기면 낳아 (그러다 싫어지면 헤어지고... 는 아니었으면.) 기르는 것이 보다 현실적으로 그리고 합리적으로 다가올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단지 신문의 해외토픽란에 실린 현실감 없는 남의 나라 이야기가 아니라 내가 살고 있는 이 곳 베를린에서 너무 쉽게 접할 수 있는 현실이다. 실제로 마리의 부모님을 비롯해서 내가 알고 지내는 독일 친구들 또는 베를린에 거주하는 외국인 친구들 대부분이 이혼한 부모를 두고 있거나 자기 자신들의 이혼 경험이 있거나 혹은 사실혼 관계가 아닌 상태에서 아이를 낳아 키운다. 그들에 대한 차별이나 부정적인 시선은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들다. 누가 색안경을 끼고 그들을 볼 수 있단 말인가? 오히려 혼인관계를 유지하는 사람이 더 적은데... 게다가 베를리너들은 남의 가정사에, 특히 한국에서 흠이라고 여기는 부분에 대해선 그다지 관심도 없다. 다만 이러한 현상에 대해 개인적으로 우려하는 부분은 (내게 이러한 일이 일어난다면) 부모들의 행동으로 인하여 아이들이 다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아이가 아주 어리거나 성인이 되어 부모가 이혼, 재혼 또는 다른 파트너와 관계를 가졌을 경우와 사춘기처럼 감수성이 예민한 시기에 부모의 결별과 새로운 결합을 겪는 경우는 큰 차이가 있을 것이다. 후자의 경우 아이에게 상처를 줄 수도 있고 결혼에 대한 부정적이고 올바르지 않은 인식을 심어줄 수도 있다. 아, 결혼과 이혼이란 이렇게 쉽게 아무렇지도 않게 할 수 있는 것이구나! 라던가. 물론 그들의 사생활이고 다들 알아서 잘하겠지만 말이다.
여하튼 결혼과 재혼, 이혼에 대한 이들의 생각은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의 일반적인 사고와는 결을 달리한다. 물론 이러한 시각이나 사회현상이 바람직하다는 것은 아니며 미화시키려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개인적으로 이혼이나 결혼을 하지 않고 애를 나아 키우는 것에 대해 거부감이 있는 입장이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잘못된 것도 아니기에 그저 나와 다르다고 여긴다. 틀린 게 아니라 다른 것이다. 한국에서는 많은 이들이 다른 것을 틀리다고 말한다. 물론 단순히 단어를 오용하는 것일 수도 있으나 뿌리 깊숙이 박힌 흑백논리가 자연스럽게 표출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조심스럽게 해 본다. 정답은 하나고 그 외의 것은 모두 틀리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세상의 모든 것이 수학 문제의 정답처럼 단 하나만 존재할까? 다른 그림 찾기가 아닌 틀린 그림 찾기에 익숙해져 있는 우리가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다.
다름에 대해 조금 더 이야기하자면 베를린은 성소수자들의 천국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우리가 흔히 레즈비언, 게이, 양성애자, 성전환자 등으로 알고 있는 이들이 이성애자들과 차별 없이 그들만의 생활을 누리고 있다. 매년 베를린에서 성대하게 열리는 성소수자 축제는 그들이 사회적으로 어떤 위치에 있는지를 보여주며 (특별하거나 우월하다는 뜻이 아니라 단지 평등한) 전 세계로부터 많은 관광객을 불러 모으기도 한다. 한 통계에 따르면 베를린에 거주하는 동성애자들은 공식적으로 약 30만 명에 이른다고 하니 8%가 넘는 수치이고 실제로는 더 높을 가능성이 크다. 성적인 취향은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고 보장받을 권리가 있다는 사회적인 통념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한 분위기를 바탕으로 독일에서는 2017년부터 동성 간의 혼인이 법적으로 허용되고 있는데 입양은 물론 재산상속도 가능하여 이성 간의 혼인과 동등한 법적 효력을 지닌다.
이토록 수많은 다름 혹은 다양성이 함께 존재하고 어우러지는 사회는 서로에 대한 이해와 존중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내 권리만큼 타인의 권리도 중요하다는 의식을 바탕으로 모두가 동등한 권리를 누리는 사회, 편견이 없는 사회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질 수는 없겠지만 언젠가는 이러한 사회가 세상 어디에서나 너무나 당연하게 여겨지는 그 날이 오기를 꿈꿔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