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day to Sunday in Berlin
많은 숍들을 뒤로하고 우린 한걸음에 게슈탈텐 파빌리온 스토어 앤 카페 Gestalten Pavilion Store & Cafe에 다다랐다. 멋진 디자인 서적을 들춰보기도 하고 다양한 디자인 소품을 구경하다가 야외 카페테라스로 향한다. 눈부시게 빛나는 햇살 아래 시원한 음료나 간단한 음식을 즐기고 있는 사람들로 가득했고 우린 난간에 기대어 원숭이를 구경하고 있는 무리에 섞였다. 오후의 봄 햇살이 조금은 강했는지 원숭이들은 움직이기보다는 나무 그늘 아래 휴식을 취하고 있었고 그들을 구경하는 많은 사람들은 지루해하면서도 눈을 떼지 않았다.
“우와, 사람 많네.”
“응. 날씨가 좋으니까.”
“근데 원숭이들이 게으르네. 움직이려 하지도 않잖아.”
“그러게. 밥 먹고 쉬나 보다. 좀 덥기도 하고.”
“크게 기대를 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이건 너무 한데. 그냥 사진 보는 거 같잖아.”
“지난번 왔을 때는 잘 놀더니만... 다음에 다시 오자. 어차피 야외 테이블 자리도 없고 차 마시러 리테라투어하우스 Literaturhaus Berlin 가기로 했으니 그리로 움직이는 게 어때?”
“그러자. 지금쯤 정원에 햇살이 한가득이겠네.”
도보로 10분 정도 거리에 있는 리테라투어하우스 Literaturhaus Berlin까지 걸어가며 잠시 동안 베를린이 아닌 다른 도시를 거니는 느낌이 들었다. 지역마다 분위기가 많이 달라서 다른 도시를 여행하는 기분이랄까? 하여간 좋다. 다양한 얼굴을 지니고 있는 도시는 적어도 지루하지는 않으니까.
그리 높지 않은 담장을 따라 한가롭게 늘어서 있는 자전거와 듬성듬성 붙어 있는 공연 포스터가 우리를 반겼고 우린 담장 안으로 들어섰다. 언제나 기분 좋은 곳이다. 그리 크진 않지만 잘 가꾸어진 정원에서 조용하게 대화를 나누며 커피나 차를 즐기는 사람들만 보아도 느긋해진다. 물론 이 곳 역시 다른 사람들은 안중에도 없는 무례한 관광객으로부터 자유롭지는 않지만 너그러운 마음으로 그들을 무시하거나 ‘아쉽지만 다음에 오면 그만이지, 뭐.’라는 생각을 하면 신기하게도 그들은 곧 자리를 뜬다. 애초에 이 곳에서 한가롭게 차를 즐길 사람들이 아니니까. 역사가 살아 숨 쉬는 돌길 위를 걷는 즐거움이나 낭만 대신 유치한 할리우드 SF 영화나 영웅물에 등장할 만한 두 바퀴 달린 전동물체(주로 몸이 불편하고 늙은 박사들이 타고 등장)를 타고 돌아다니며 시청각 공해를 일으키는 사람들이니까. 나이가 아주 많거나 다리가 불편해 걷기 힘든 사람이라면 이해하지만. 가끔 인도를 질주하는 그 전동물체들을 볼 때면 넘어뜨리고 싶은 마음이... 그만하자. 짜증 나려 하니까.
“마리, 뭐 마실래?”
“글쎄. 녹차를 마시고 싶은데 전에 마셨던 녹차는 별로여서 홍차를 마실까 하는데.”
“집에서 좋은 잎녹차만 마시다가 정체모를 싸구려 녹차를 마시니 당연히 성에 안차지.”
“물론 그런 이유도 있지만 전에 주문한 녹차는 좀 이상했어. 녹차라기 보단 녹차에 곡물이 섞인 맛이랄까? 겐마이차 玄米茶 (볶은 현미를 섞은 일본산 녹차)처럼.”
“잘못 서빙되었을 수도 있겠네. 베를린 사람들이 워낙 녹차에 대해 무지하잖아. 차 메뉴만 봐도 홍차는 산지별로 여러 종류가 나와 있지만 녹차는 그냥 녹차 아니면 쟈스민티 정도?”
“맞아, 특히 녹차를 홍차처럼 펄펄 끓은 물에 우려내서 내오는 건 마시지 말라는 소리잖아.”
“그렇지. 써서 어떻게 마셔 그걸? 베를린에선 대부분의 사람들이 녹차를 우리는 방법을 모르니까 녹차는 쓰고 떫고 맛없는 차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
“응. 한 번은 웨이트리스가 잘 못 우려낸 녹차를 내와서 내가 너무 써서 못 마시겠다고 했더니 설탕을 타 먹으라고 하더라고.”
“이런... 녹차 전문가네! 물론 동남아 지역에 가면 설탕이 함유된 녹차 음료가 대량으로 유통되지만 그건 차갑게 마시는 소프트드링크에 가깝게 변종된 거고.”
“제대로 된 녹차를 즐길 수 있는 카페가 생기면 좋을 텐데...”
“베를린에는 아직 녹차를 즐기는 사람이 많지 않아서 당분간은 힘들 거 같아.”
“내가 바라는 건 수십, 수백 가지 녹차를 구비하고 티소믈리에가 있는 거창한 녹차 전문점이 아니라 질 좋은 녹차 몇 가지를 제대로 우려내서 내오는 작은 공간 정도? 아니 그냥 물 온도만 제대로 맞춰주는 곳이라도 있으면 좋겠어. 어렵지 않잖아, 이 정도는!”
“나도 사실 그건 좀 이해가 안가. 아무리 관심이 없거나 녹차에 대해 무지해도 메뉴에 녹차가 있으면 적어도 제대로 우려내는 방법은 알고 있어야 하는 거 아냐? 그게 대단한 전문적인 지식이 필요한 것도 아니잖아. 물 온도랑 시간 조절만 하면 되는데.”
“온도 조절되는 전기주전자 하나 있으면 되는 걸.”
“거기에 하나 더. 어느 정도 두께가 있는 하얀 도자기 찻잔.”
“그것도 기본이지.”
“하얀 잔에 담긴 그 은근하고 우아한 색色을 보고 있으면 눈이 맑아지는 것 같다니까.”
“가공방법에 따라 녹차마다 고유한 색色이 있으니 그걸 비교해가며 차를 즐길 수 있는 것도 녹차의 매력인 것 같아. 재밌기도 하고.”
“페이퍼 앤 티 Paper & Tea (세계 각지의 다원에서 차, 주로 녹차와 홍차를 수입하여 판매하는 고급 티숍.)가 카페도 하면 좋을 텐데.”
“그러게. 사람들에게 다가가기 위해선 그게 가장 쉬운 방법일 것 같은데.”
“내 생각엔 특정 고객만을 상대하려는 마케팅 전략이라 카페를 하진 않을 것 같아.”
“맞아. 페이퍼 앤 티 Paper & Tea 슬로건 ‘You drink coffee i drink tea my dear.’ 도 생각해 보면 굳이 많은 사람들에게 티를 권하고 싶어 하진 않는 거 같아. 나는 티를 즐길 테니 너는 커피 따위나 마셔라라는 어감이 있잖아.”
“응. 가격대도 보통 사람들이 쉽게 접할 수 없을 만큼 비싸잖아. 시중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티백제품 하고 비교하면.”
“슈퍼마켓에서 파는 싸구려 녹차에 비해 상대적으로 비싼 건 사실이지만 따져 보면 비싸다고만은 할 수 없는 것 같아. 티에 대한 재밌는 기사를 읽었는데 필자가 말하길 티는 세상에서 가장 싼 값에 즐길 수 있는 기호식품 중에 하나래.”
“가장 싼 기호식품? 무슨 말이야?”
“예를 들어 유럽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고급티 브랜드 마리아쥬 프레르 Mariage Frères 에서 보통 10-15€ 정도면 100g짜리 제품을 구매할 수 있고 고가의 제품을 사더라도 100g에 60€ 정도야. 한 잔에 보통 1-2g 정도의 찻잎을 사용하니까 아무리 비싸 봐야 한 잔에 1€ 가 조금 넘는 정도잖아. 그에 비해 고급 와인이나 위스키 같은 기호식품은 입이 벌어질 정도로 비싸니까.”
“듣고 보니 그렇네.”
“더욱이 차는 몸에 좋기까지 하니 얼마나 착한 기호식품이야!”
“착한 기호식품이라. 재밌네.”
“특히 주류나 담배 같은 기호식품에 비하면 말이지.”
“아, 갈증 난다. 마실 거 주문하자.”
“그래. 난 홈메이드 아이스티 마실래.”
“나는... 이게 뭐지? 새로운 건데?”
“계절 한정 메뉴네. 간단히 말하자면 에스프레소 쉐이크 같은 거야.”
“맛있겠는데. 그럼 난 이걸로.”
몇 년 전 함께 제주도를 여행하면서 오설록 티 뮤지엄에 간 적이 있었다. 마리는 그곳에서 생산한 녹차와 녹차 롤케이크를 맛보고는 지금까지 독일에서 마셔왔던 녹차의 정체는 도대체 뭐였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그녀의 말대로 신선하고 깊은 향이 담긴 제주산 덖음차는 그동안 카페인 섭취를 위해 습관적으로 마시던 커피와는 달리 여유와 평온함을 안겨 주었다. 나 역시 평소에는 거의 마시지 않던 녹차에 대한 관심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우린 여러 가지 녹차를 사 가지고 베를린으로 돌아왔다. 그 뒤로 녹차를 비롯한 각종 차와 다기, 그리고 온도 조절이 가능한 전기 주전자 등을 마련하여 집에서 차를 즐기고 있다. 집에 찾아온 손님에게 차를 대접할 때면 어떤 차가 그 사람에게 맞을지, 나름 즐거운 고민을 하기도 한다. 알맞은 온도에 나름 정성을 담아 대접한 녹차를 마셔본 게스트들의 반응은 거의 비슷하다. ‘와우, 이게 녹차야? 내가 마셔봤던 녹차와는 많이 다른데.’ 그리곤 그 오묘한 맛에 두 번째 잔을 즐기며 대화를 이어간다.
“우와, 이건 정신이 번쩍 들 정도로 달콤한데!”
“그렇게 달아?”
“커피 맛이 거의 안 날 정도로 달아. 조금만 덜 달았으면 좋았을 텐데.”
“그럼 바꿔달라고 해.”
“그러기엔 이미 너무 많이 마셨는데. 아이스티는 어때?”
“신선하고 상큼한 맛이야. 마셔봐.”
“아냐. 어차피 무슨 맛인지 모를 거야. 이게 너무 달아서.”
마침 우리 테이블을 지나가던 웨이트리스가 우리의 대화를 들었는지 주문한 음료가 마음에 들지 않느냐고 물었다. 난 잠시, 아주 잠시 동안 머뭇거리다가 괜찮다고 했지만 그녀는 그 음료를 만드는 직원이 항상 시럽을 너무 많이 넣는다며 원하면 다시 만들어다 준다고 했다. 나는 ‘괜찮아요. 음료를 만드는 분이 정말 스위트(귀엽고 다정한)한 사람인가 보네요.’라는 농담을 건넸고 그녀는 가볍게 웃어 보였다.
리테라투어하우스 Literaturhaus Berlin 카페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돈이 필요할 때마다 잠시 일을 하는 뜨내기? 들이 아니라 제대로 교육을 받은 직원이거나 적어도 서비스가 무언지 아는 사람들이다. 부담스럽지 않게 적당히 친절하고 세심하다. 우리가 이 곳을 좋아하는 또 다른 이유다. 베를린의 카페나 레스토랑에서 일하는 대부분의 사람들, 말도 안 되는 서비스(가끔 누가 손님인지 헷갈릴 때도 있다.)에 팁을 바라는 아니, 팁을 당연시 여기는 그분들! 이 배워야 할 부분이라 생각한다.
“아~ 좋다. 봄 향기 나지 않아, 오빠?”
“응. 풀내음 하고 꽃향기가 가득하네.”
“이 곳 정원은 언제나 포근한 거 같아.”
“꾸미지 않은 듯 꾸민 게 편안하지? 여유롭고. 그게 어려운 건데.”
“그런 것 같아. 억지로 꾸몄다기보다는 그냥 자연스러운 거 같아. 정원 하고 우리가 앉아 있는 의자나 테이블 그리고 사람들이 어우러져 있는 게. 이 곳을 디자인한 사람은 여유를 즐기는 사람일 거야. 그러지 않고 이런 공간을 만들 수는 없을 테니까.”
“나도 그렇게 생각해. 마치 자신이 편안하게 여유를 즐길 공간을 만든 것처럼. 하지만 이런 공간을 제안한 디자이너를 받아들인 클라이언트 역시 멋과 여유를 아는 사람이지. 멋진 디자인들이 클라이언트에 의해 생매장되는 일은 생각보다 너무 흔하거든. 내가 한국에서 경험한 대부분의 클라이언트들은 디자이너가 필요한 게 아니라 이미 자기가 그려 놓은 그림을 대신 그려 줄 사람이 필요한 거였어. 나는 그럴 때마다 이야기했지. 디자인 전공하고 있는 학생 데려다 놓고 시키면 비용도 훨씬 적게 들고 일도 수월할 거라고.”
“맞는 말이네. 그런 생각은 안 해봤는데. 특정 분야의 전문가한테 일을 의뢰한다는 건 그 사람을 믿고 맡긴다는 게 당연한 것만은 아니구나. 그런 믿음이 없이는 좋은 결과가 나올 수 없을 텐데. 우선 일을 즐길 수 없을 테니까.”
“그렇지. 자신의 일을 즐긴다는 건 정말 중요해. 자신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주위의 모든 사람까지 편하게 만들거든. 그런 일을 해야 오래 즐길 수 있지.”
“평생 즐길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겠지.”
“평생 즐길 수 있는 일이라... 뭐가 있을까?”
“글쎄. 구체적으로 생각해 본 적은 없지만 번역일은 아닌 것 같아.”
“아니, 꼭 직업으로써가 아니라 평소에 우리가 함께 즐길 수 있을 만한 놀이랄까?”
“그럼 오늘 같은 ‘게으른 브런치’나 ‘게으른 산책’?”
“그거 좋다. 현실적이라 부담도 없고.”
“그럼 이제 우리도 평생 즐길 수 있는 일이 생겼네.”
“그렇네. 의외로 쉽게 찾았네.”
평생 함께 즐길 수 있는 일을 찾아 기분이 좋아진 우리는 팁을 두둑이 얹어 계산을 하고 카페를 나와 오른쪽 길을 따라 걸었다. 목적지가 있는 건 아니었다. 단지 왼쪽으로 가는 것보다 조용해서 방해받지 않고 산책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가벼운 마음으로 천천히 걷다 보면 사소하지만 새로운 것들이 보이기도 하고 가끔이지만 보물창고 같은 곳을 발견하는 행운이 따르기도 한다. 그러한 이유가 아니더라도 걷는다는 것은 좋은 거니까 적어도 밑질 건 없다. 5월의 향기로 가득한 가로수길을 우린 그렇게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