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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in Oct 26. 2020

베를린, 화요일 01

Monday to Sunday in Berlin

“오빠, 우리 오늘은 미테 Mitte 가서 관광객 놀이할까?

“미테 Mitte?”

“두스만 Dussmann(베를린의 대형 서점) 갈 일이 있어서.”

“책 살 거 있어?”

“아니, LP 구경하러 가게.”

“두스만 Dussmann에서 LP를 팔아?”

“응, 음반 코너에 미개봉 빈티지 LP랑 최근 발매된 LP만 파는 곳이 있대.”

“그래? 몰랐네.”

“같이 갈 거지?”

“응, 어떤 음반들이 있을지 궁금하네.”


나와 마리는 집에서 주로 LP로 음악을 듣는다. 여러 개의 턴테이블을 가지고 있는데 요즘에는 가장 최근에 구입한 70년대 필립스 제품을 사용한다. 기다란 티크 사이드보드 위에 놓인 육중한 턴테이블에 다가설 때면 언제나 망설인다. 턴테이블 옆에 놓여있는 LP 중에서 어떤 음반을 틀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다 괜히 이 버튼 저 버튼을 눌러보기도 한다. 아무튼, 많지도 적지도 않은 우리의 LP 중에 새 LP는 몇 장 되지 않는다. LP로 새 음반을 발표하는 뮤지션이 많지 않을뿐더러 가끔 오래전 발매된 음반의 미개봉판이나 소장용 판을 중고 레코드숍에서 발견하더라도 그 가격이 대부분 부담스러우니까.


“우반 U-Bahn 타고 갈까 아니면 에스반 S-Bahn?”

“우반 U-Bahn 타고 알렉산더플라츠 Alexanderplatz에 가서 두스만 Dussmann까지 걸어가자.”

“프리드리히슈트라쎄 Friedrichstrasse로 바로 안 가고?”

“관광객 놀이 하자며?”

“비 올 것 같은데...”

“이럴 때 입으려고 레인코트 산 거 아냐?”

“아, 맞다. 내 예쁜 레인코트!”

“오늘 처음 입는 거지?”

“어, 지난달에 구입하고 한 번 입어봤는데 비올 때는 처음이네.”

“변덕스러운 날씨에 레인코트가 얼마나 실용적이고 편한지 알게 될 거야. 적어도 우산 잃어버릴 일은 없잖아.”

“그걸 누가 모르나? 맘에 드는 건 다 비싸니까 그렇지.”

“가격이 부담스러워도 입다 보면 그 값어치를 해. 투자라고 생각해.”

“투자가치가 있는지 어디 한 번 보겠어.”

“벌써 새 레인코트 입을 생각에 기쁘지 않아? 그걸로 이미 투자가치가 있는 거라고 생각하는데.” 

“갑자기 오빠가 제일 좋아하는 파란 레인코트를 샀을 때 기억나네. 흐린 날이나 비 오는 날이면 항상 외출하자고 했잖아. 그 레인코트 입고 싶어서.”

“처음이니까 그랬지. 기능 테스트도 해보고 싶었고 새 옷이라 길도 좀 들여야 했고. 특히 매킨토시 Mackintosh 코트는 처음에 길을 잘 들여야 해.”

“하여간 그때 얼마나 아이 같고 귀엽던지...”

“그것 봐. 레인코트 하나로 내가 귀여워질 수 있으니 투자가치 있는 거 맞지?”

“그렇다고 하지 뭐. 하여간 알렉산더플라츠 Alexanderplatz부터 걸어가는 걸로.” 

“응. 걷다가 비 많이 오면 버스 타면 되고.”

“그래. 날씨가 이러니 그나마 관광객이 좀 적겠네.”

“글쎄. 그 동네는 항상 많지 않나?”

“적어도 발걸음 옮기기 어려울 정도는 아니겠지.”

“그랬으면 좋겠다.” 


미테 Mitte는 독어로 ‘중앙’ 또는 ‘중심’이란 뜻의 단어로 베를린 중앙에 위치한 지명이다. 미테 Mitte 지역의 중심, 알렉산더플라츠 Alexanderplatz에서 남서쪽으로 길게 뻗은 대로를 따라 브란덴부어거 토어 Brandenburger Tor 가 위치한 파리제아 플라츠 Pariser Platz까지 약 2.5km에 이르는 지역은 관광과 쇼핑의 중심지로 1년 내내 관광객들로 붐빈다. TV타워 Berliner Fernsehturm를 시작으로 무제움스인젤 Museumsinsel의 베를리너 돔 Berliner Dom, 베를린에서 가장 아름다운 광장으로 불리는 잔다멘마크트 Gendarmenmarkt, 브란덴부어거 토어 Brandenburger Tor, 도이체어 분데스탁 Deutscher Bundestag 등의 수많은 랜드마크를 비롯해 백화점과 상점이 몰려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마리와 내가 살고 있는 크로이츠베어그 Kreuzberg와 멀리 떨어져 있지는 않지만 이 곳에 올 때마다 다른 도시라 느껴질 정도로 분위기가 다르다. 가끔 우린 수많은 관광객 틈에 섞여 다른 도시를 여행하는 듯한 느낌을 즐긴다. 물론 관광지의 전형적인 무질서와 혼란은 그리 오래 즐길거리는 아니다.


알렉산더플라츠 Alexanderplatz에 도착한 우리는 빗방울이 코트에 내려앉을 때 만들어 내는 둔탁한 소리와 미세한 진동을 즐기며 걷기 시작했다. 그녀의 예상대로 거리는 그다지 붐비지 않았지만 산책하기 그리 좋은 조건은 아니었다. 특히 무제움스인젤 Museumsinsel 지역부터 시작되는 여러 공사 구간은 정확히 언제부터 시작되었고 언제 끝날지 모르는 곳으로 날씨가 화창한 주말이면 수많은 교통량과 관광객이 뒤섞여 기피해야 할 곳 중의 하나다. 아름다운 운터 덴 린덴 Unter Den Linden을 점령한 공사장 펜스에는 공사 일정이 쓰여있지만 난 믿지 않는다. 아니, 아무도 믿지 않는다. 베를린에서 D-DAY 란 그저 대략적인 시간의 개념일 뿐인 경우가 많다고 느끼는 것은 나만이 아닐 것이다. 베를린 신국제 공항의 개항이 2007년부터 벌써 네 차례 연기된 사건? 은 국제적인 웃음거리로 한국으로의 직항 편을 고대하던 내 기대를 번번이 무너뜨렸다. 언제 개항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유로존의 경제를 책임지고 있는 독일의 수도 베를린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에 대한 여러 의견과 분석이 있지만 이 이야기는 그만하련다. 유쾌하지도 않을뿐더러 지루하기까지 하니까. 


“이 곳은 수 없이 지나쳐 갔지만 실제로 박물관을 관람한 건 작년에 부모님 모시고 갔을 때가 처음이었어. 내가 아직 그래픽 디자인을 전공하는 학생이었을 때에는 여행을 가면 일부러 박물관이나 갤러리 위주로 바쁘게 움직였는데 어느 순간 그게 너무 피곤한 거야. 일종의 의무감이었다고 해야 하나?”

“알아, 무슨 말인지. 그 순간부터 여행이 지루해지고 힘들어지지. 하지만 어렸을 때는 경제적으로 제약이 많잖아. 그래서 조금이라도 더 봐야 하고 느껴야 한다는 막연한 의무감이 있었던 것 같아.” 

“맞아. 특히 나 같은 경우에는 한국에서 유럽으로의 여행이었으니 더욱 그랬지. 한 번은 암스테르담에서 반 고흐 뮤지엄 Van Gogh Museum을 보고 나서 옆에 있는 암스테르담 국립박물관 Rijksmuseum으로 발걸음을 옮기는데 왠지 별로 가고 싶지 않더라고. 갑자기 외롭고 의욕도 없고 ‘도대체 내가 여기서 무얼 하고 있나’라는 허무한 생각도 들고... 혼자 오랫동안 여행을 할 때 찾아오는 일종의 ‘정체기’랄까? 그래서 반 고흐 뮤지엄 Van Gogh Museum 뒷 쪽에 있는 넓은 공원 벤치에 앉아서 맥주를 마시기 시작했지. 작은 노트에 글도 적어가면서. “

“뭐라고 적었는데?”

“뭐 그냥. 그때 기분을 적었던 것 같아. 집에 그 노트 아직도 있어. 내 책상에.” 

“그래? 그럼 집에 가서 읽어줘. 오빠 어렸을 때 여행하면서 어떤 글들을 썼었는지. 그럼 나도 조금이나마 그 기분을 알 수 있겠지? 난 오랫동안 혼자 여행을 해본 적이 없어서 어떤 느낌일지 잘 모르겠어.”

“응. 그럴게.”

“글을 쓰고 나니까 기분이 좀 나아졌어? 국립박물관엔 갔어?”

“아니. 그 날은 아무 데도 안 가고 거기서 글 쓰며 맥주만 마셨지. 날이 어두워져서 검푸른 하늘이 공원을 덮을 때까지.”

“왠지 우울한 영화의 한 장면 같은데.”

“진짜 영화의 한 장면 같았던 순간은 그다음이야. 숙소로 돌아가려고 몸을 일으키는데 어디선가 까마귀 떼가 날아와 검푸른 하늘을 배회하는 거야. 마치 ‘까마귀가 있는 밀밭 Wheatfield with Crows 1890’ 속의 풍경처럼.” 

“반 고흐의 마지막 작품 말이지?”

“응. 그가 자살 직전에 그린 그림.”

“어쩌면 그 까마귀들이 반 고흐의 ‘혼’이었을지도 모르겠네.”

“무슨 말이야?”

“반 고흐가 마지막으로 그린 게 까마귀 떼잖아. 그들에게 자신의 ‘혼’을 남기고 자살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 ‘혼’이 자신의 작품들이 전시된 뮤지엄 주변을 배회하는거고.”

“그럴 수 있겠다. 다음에 반 고흐 뮤지엄 주변에서 까마귀 떼를 만나면 인사라도 해야겠네. 전에 몰라봐서 미안하다는 사과와 함께.”

“반 고흐는 죽고 나서 자신이 이렇게 유명해질지 알았을까?”

“죽고 나서 유명해지면 뭘 해? 살아생전에 그렇게 힘들게 살았는데. 난 피카소 작품보다반 고흐의 작품을 더 좋아하지만 그들 인생을 놓고 보자면 피카소의 인생이 훨씬 멋지고 부러워. 살아생전에 모든 걸 누렸잖아. 꿈을 이루면서 부와 명예를 얻었고 그 부와 명예는 그를 또 다른 예술 세계로 인도했고.” 

“맞아. 나도 그렇게 생각해. 우리가 일반적으로 기피하는 고독과 외로움, 슬픔과 절망이 위대한 예술을 창조해내는 커다란 힘이라는 의견에는 나도 어느 정도 동의하지만 내 자신이 혹은 내 주변 사람이 반 고흐 같은 예술가라면 너무 힘들 것 같아. 그냥 살아있는 동안 즐겁고 행복하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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