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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in Nov 16. 2020

베를린, 수요일 03

Monday to Sunday in Berlin

베를린은 전 세계의 대도시 중에 녹지 비율이 가장 높은 도시 중의 하나로 수많은 공원이 도시 전역에 자리하고 있는데 그중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공원이 티어가르텐이다. 16세기 브란덴부르크의 제후(諸侯)를 위한 사냥터로 조성된 티어가르텐은 베를린의 중심부에서 서쪽으로 뻗어있으며 카페를 비롯한 펍, 레스토랑은 물론 호수, 동물원, 아쿠아리움까지 자리하고 있는 거대한 공원으로 오늘처럼 햇살이 좋은 날이면 우리가 가끔씩 산책을 오는 곳이기도 하다. 집 근처에 있다면 자주 올 텐데... 아쉽다. 이 곳을 좋아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다른 곳에 비해 깨끗하고 조용하기 때문이다. 내가 집 바로 앞에 위치한 괼리처 파크 Görlitzer Park에 가지 않는 이유는 그곳을 하이에나처럼 어슬렁거리는 마약상 痲藥商 의 치근덕거림이 귀찮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지저분하고 시끄러워 산책을 즐길 수 없기 때문이다. 산책보다는 시끌벅적한 소풍이나 파티가 어울리는 그 공원은 어느 순간부터 기피하는 곳이 되어버렸다. 돌이켜보면 베를린에 처음 발을 디뎠던 2010년부터 몇 년간 친구들과 그곳에 자주 갔었다. 누군가 커다랗게 틀어놓은 음악소리를 안주삼아 풀밭에 앉아 병맥주를 마시기도 하고 온갖 종류의 신기한 사람들을 구경하며 커피를 마시기도 했다. 이젠 자유분방하게 느껴졌던 그 당시의 풍경이 혼돈으로 다가온다. 세상의 모든 걸 포용할 수 있을 것 같았던 내 젊은 가슴이 닫히는 걸까, 그렇게 나이가 드는 걸까? 상관없다. 난 그저 조용한 산책이 즐기고 싶을 뿐이다. 

우린 푸르름이 절정에 달한 가로수를 따라 걸었다. 산책을 하기 너무나 좋은 날씨였으나 수요일 오후 티어가르텐의 풍경은 한가하기만 했다. 하긴, 수요일 오후에 여유롭게 산책을 즐길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 같다. 띄엄띄엄 자리 잡은 연인들을 지나 호숫가 근처의 벤치에 앉자 미풍에 부대끼는 나뭇잎 소리가 기분 좋게 우리를 맞이해 주었다. 고요하고 섬세한 소리에 잠시 귀를 기울여 본다. 미소가 절로 번졌다. 지금 이 순간에는 어떤 아름다운 음악도 이 자연의 소리에 비할 수 없으리라. 원하면 언제라도 이 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담요를 가지고 왔더라면 더 좋았을 걸.”

“그러게. 풀밭에 누워 한 숨 잤으면 좋겠는데 말이야.”

“오빠는 그렇게 오래 자고도 또 잠이 와?”

“꼭 자지 않더라도 눈을 감고 나뭇잎 부딪히는 소리 듣고 있으면 너무 좋을 것 같아서.”

“그럼, 여기 누우면 되잖아.”

“벤치는 딱딱해서 싫어.”

“오늘 티어가르텐에 올 줄 알았으면서 왜 담요를 안 가져왔을까?”

“지난 며칠 너무 느긋해서 그런가? 상관없어. 지금도 충분히 좋으니까.”

“정말 좋다. 불안할 정도로 여유로운 것 같아.”

“무슨 느낌인 줄 알지만 걱정할 필요 없어. 그냥 느긋하게 즐기면 돼. 그러다 보면 익숙해져.” 

“익숙해지면 무료하게 느껴지지 않을까?”

“아니, 이런 여유로움은 무료해지지 않아.”

“그렇다면 다행이고.”

“단지 너무 당연하게만 여기지 않으면 돼. 그러다 보면 소홀해 지거든.”

“소홀해진다고?”

“응. 사람 관계랑 비슷해. 알게 되고 가깝게 되고 익숙해지면 소홀해지기 쉽잖아. 흔히들 가까운 사람 혹은 친한 사람은 나를 더 잘 알고 있으니 이해해줄 거라고 생각하니까.  내가 그들에게 예전처럼 표현을 하지 않거나 소홀 해지더라도 말이야. 하지만 그건 착각이야. 내가 소홀해지면 상대방은 서운해하고 그러다 보면 오해가 생겨 관계가 틀어지기도 하지.”

“무슨 말인 줄 알 것 같아.”

“어려울 것 없어. 그냥 내가 좋아하는 혹은 즐기는 것들을 아끼고 고마워하고 표현하면 된다는 말이야.”

“가장 쉽고 단순할 것 같은데.”

“맞아. 하지만 그럴수록 어렵기도 해.”


나는 하는 일의 특성상 다른 이들에 비해 시간의 사용이 자유로운 편이라 오래전부터 느긋한 일상을 누리고 있다. 물론 불규칙적인 생활이 불안하거나 불편할 때도 있었지만 다른 사람이 주는 월급을 받으며 잠시 규칙적인 생활을 경험한 후부터는 그 불안함과 불편함은 샐러리맨의 스트레스와 비할 게 아니란 걸 뼈저리게 느꼈다. 물론 내 개인적인 관점으로 어느 쪽이 옳다 그르다 혹은 좋다 나쁘다를 말하는 게 아니다. 사원증을 자랑스럽게 목에 걸고 다니며 사회생활을 즐기는 사람도 있으니까. 하여간 난 두어 달 남짓 소위 말하는 월급쟁이로 생활하면서 당연하게 생각했던 일상의 여유로움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깨닫게 되었고 1초의 망설임도 없이 회사를 그만뒀다. 다시 느긋한 생활로 돌아왔고 십 수년이 지난 지금까지 느긋한 일상에 소홀해지지 않으려 노력한다. 


“지난가을이었나? 마지막으로 이 곳에 산책 왔을 때가...”

“주말에 비어가든에서 점심 먹었을 때? 그게 벌써 그리 오래됐어?”

“맞아. 오빠가 소풍 준비하기 귀찮다고 해서 여기 비어가든에서 브런치 먹었잖아.”

“분위기는 정말 좋았는데 음식은 별로였던 기억이 나네. 하긴 티어가르텐은 먹으러 오는 곳이 아니라 산책하러 오는 곳이니까.”

“그 날 사람 정말 많았지?”

“응. 가을의 마지막 주말 즈음이어서 그랬을 거야. 날씨도 어찌나 화창하던지.”

“운 좋게도 우린  호숫가 근처에 자리 잡았지만.”

“그랬지. 노 젓는 사람들 구경도 하고 책도 읽고 사진도 찍고.”

“그러다 오빠는 내 다리를 베고 누웠잖아.”

“마리는 매니큐어 칠하고. 아마 은색이었을 걸?”

“하하하, 별걸 다 기억하네. 그땐 모든 순간이 아름다운 영화의 한 장면 같았어.”

“르누아르나 모네 그림의 한 장면 같기도 했고.”

“오늘도 날씨가 좋지만 봄과 가을은 분위기가 많이 다른 것 같아. 여명과 황혼이 다른 것처럼.”

“그렇지. 봄은 새싹이고 가을은 낙엽이니까.”

“봄과 가을이 다르지만 둘 다 좋아. 아쉬운 건 두 계절이 너무 짧다는 거야. 즐길만하면 이미 지나가버리니까.”

“그러니까 그 순간을 최대한 즐겨야지. 지금처럼. 물론 내년에 또다시 봄이 돌아오겠지만 우리가 즐기고 있는 오늘과 같을 수는 없잖아.”


우리의 소풍 준비는 비교적 간단하다. 풀밭에 깔고 앉을 얇고 가벼운 담요 한 장과 읽을거리 그리고 손이 많이 가지 않는 샌드위치와 음료면 충분하다. 처음에는 샐러드, 샌드위치나 김밥, 과일, 디저트, 각종 음료 등을 준비해 소풍 분위기에 흠뻑 젖어보려 했었는데 그것들을 준비하는데 생각보다 에너지 소모가 커서 어느 순간부터 가볍게 준비하거나 배가 고프면 아예 근처 카페나 식당에서 끼니를 해결하기도 한다. 기분 좋게 따사로운 햇살이 무성한 나뭇잎 사이로 적당히 내리쬐는 장소를 찾는 것이 더 중요하다. 아무리 따뜻한 햇살이 좋아도 오랫동안 온몸으로 맞기에는 힘들고 그렇다고 그늘에서 그 기분 좋은 햇살을 바라만 보기만 하는 것은 아쉽기 때문이다. 그런 명당을 차지하고 앉아(찾았다면) 도시락을 즐기는 것도 좋고 책이나 잡지를 읽는 것도 좋지만 무엇보다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등을 대고 누워 살며시 눈을 감고 의식과 무의식의 상태를 오가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미풍에 흔들리는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살이 눈을 간지럽히고 그 절정의 순간 난 달콤한 꿈을 꾸고 있는 듯 미소를 흘린다. 


“마리.”

“응?”

“정말 신기하지?”

“뭐가?”

“우리 인생 말이야. 어디로 흘러갈지 아무도 모르잖아. 내가 태어난 곳에서 한참이나 멀리 떨어진 이 곳, 베를린에 살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어. 더욱이 내 마음속에 자리하고 있는 유럽의 도시도 아니었는데.”

“내가 한국 사람과 결혼을 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던 것처럼.”

“돌이켜보면 내가 베를린에 오기 전까지의 삶은 내가 생각했던 혹은 계획했던 것과는 상관없이 흘러왔던 것 같아. 많은 경험을 하고 즐거운 일도 많았지만 그다지 만족할 만한 성취는 없었거든.”

“대부분의 사람이 계획을 하고 실행에 옮기려 노력하지만 계획대로 되지만은 않잖아. 사실 거의 불가능에 가깝지. 계획이란 게 현실적인 것도 있지만 꿈에 가까운 것도 있으니까. 물론 계획을 세울 때는 모두 실행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지만, 믿고 싶지만 말이야.”

“그렇지. 어찌 보면 계획은 유기有機 적이어서 언제든 변형이 가능하니까.”  

“그건 그렇고, 우연히 흘러들어온 베를린에서의 삶은 어때?”

“글쎄. 우선 지금까지 이 보다 더 여유로운 삶을 누려본 적은 없는 것 같아. 물질적인 여유보다는 정신적인 여유에 편향되어있지만.”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둘 다 여유롭다면 더없이 좋겠지만 적어도 정신적인 여유를 누린다면 그 반대의 경우보다 좋은 거 아냐?”

“사람마다 기준이 다르겠지만 둘 중에 하나를 택해야 한다면 아쉽지만 물질적인 여유로움을 포기할 것 같아. 물론 지금도 둘 다 가지기 위해 발버둥 치지만 말이야.”

“나도 그래. 물질적으로 여유롭다는 게 편하긴 하겠지만 그렇지 않다고 해서 크게 불편한 것도 모르겠어. 물론 아직까지 물질적인 여유가 가져다주는 기쁨이나 장점을 많이 경험해보지 않아서 그런 걸 수도 있겠지만 말이야.” 

“하여간 난 베를린에서 살면서 처음으로 이 곳에 정착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해봤어. 세계의 여러 도시에서 생활을 해 보았지만 그곳에서 정착할 거란 생각을 해 본 곳은 없었거든. 지나가는, 거쳐가는 곳이라고 생각을 했지. 하지만 아직은 모르겠어. 이 곳이 내가 정착할 곳인지, 아니라면 어디가 될는지.”

“난 베를린이 좋긴 하지만 기회가 된다면 다른 곳에서 살아보고 싶어. 따뜻한 프랑스의 남부지방이라던지...”

“좋겠다. 마리는 추위를 많이 타니까. 내가 좋아하는 바다가 있는 곳이라면 더없이 좋겠다. 신선한 해산물도 실컷 즐기고 말이야.”

“우리가 그곳에서 뭘 하면서 살 수 있을까? 베를린보다 훨씬 비쌀 텐데.”

“그런 건 그때 가서, 가게 되면 생각해 보지 뭐. 지금은 그냥 기분 좋게 상상으로나마 즐기는 거지.”

“그래. 지금 고민을 한다고 해서 해결되는 것도 아니고, 그러기엔 오늘 날씨가 너무 아깝다. 그렇지?”


난 대답 대신 지그시 감고 있던 눈을 깜빡이며 마리를 바라보았다. 그리곤 다시 눈을 감은 채 프랑스 남부지방에서의 생활을 상상하기 시작했다. 어디가 좋을까? 사실 프랑스 남부지방이라고 해봐야 가 본 곳은 니스 Nice 밖에 없지만 느낌은 대충 떠오른다. 풍부한 햇살에  기분 좋게 끈적이는 바닷바람과 언제 들어도 질리지 않는 파도소리와 약간은 수다스럽지만 귀여운 프랑스어. 그리고 그다지 신경 쓰이지 않는 검게 그을린 피부. 푸짐하고 신선한 해산물 모둠 Plateau de fruits de mer (얼음으로 채워진 철제 쟁반에 굴을 비롯한 조개류, 갑각류 등이 함께 서빙되는 프랑스 음식.)과 적당한 산미가 느껴지는 차가운 와이트 와인. 또 뭐가 있을까? 음... 전형적인 여름휴가의 풍경 외에는 떠오르는 게 없는 걸 보니 아직 그곳에 정착할 준비는 되지 않은 듯하다. 베를린의 생활이 만족스러워 다른 곳에서의 생활은 떠오르지 않는 것일 수도 있겠지. 나중에 그곳으로 휴가라도 가서 생각해 봐도 늦지 않을 것 같다. 지금은 이 순간을 즐기는 게 더 중요하니까.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잠자리가 바뀐 적이 너무 많아서 인지 모르겠지만 난 아직도 가끔 아침에 눈을 뜨면 내가 어디에 있는 건지 헷갈릴 때가 있어. 당황스럽지만 나쁘지 않은 기분이야.”

“나도 가끔 여행을 가면 그럴 때가 있는데.”

“맞아. 그런 느낌이야. 내가 그토록 여행을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하고. 눈을 떴을 때 시야에 들어오는 낯선 풍경의 오묘한 긴장감으로부터 오는 쾌감이랄까?”

“물론 그 새로움이 좋기도 하지만 너무 자주라면 불편할 것 같아. 난 익숙한 곳의 풍경이 편안하고 좋아.”

“지금은 나도 그래. 베를린, 우리가 함께 지내고 있는 이 곳이 가장 좋아. 익숙하고 편안한 풍경이 무료해질 때 즈음엔 여행을 가면 되잖아.” 

“그러자. 다음 여행은 프랑스 남부 지방으로 가볼까?”

“좋지. 앞으로 우리가 지낼 만한 곳인지도 따져보면 되겠다.”


 가끔은 내가 존재하고 있는 이 순간이 현실인지 꿈인지 분간이 되지 않는다. 그만큼 삶을 즐기고 누리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반대로 그것을 잃을까 하는 두려운 마음이 스며있기도 하다. 난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걸까? 아마도 현실인 것 같다. 그랬으면 좋겠다. 만약에 꿈이라면 조금 더 오래 꾸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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