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크리스마스 연휴엔 오빠 가족들과 시간을 보냈다. 사랑하는 조카들과 함께 보낸 시간도 좋았지만 몰랐던 오빠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서 좋은 시간이었다.
우리 오빠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어릴 때부터 공부를 열심히 하는 학생이었고 덕분에 꽤 괜찮은 대학교에 진학했고 대학교에서도 장학금을 꾸준히 받았다. 목표한 바를 이루기 위해 당시 대학생들에게 유행하던 배낭여행(모든 대학생들이 유럽여행을 갈 수 있던 건 건 아니라는 것도 안다)이나 해외여행도 한 번 가지 않고 쭉 열심히 인생을 살아왔고 그렇게 열심히 산 덕분에 아주 어려운 시험에 합격해 전문직의 인생을 살고 있다.
그런 오빠의 인생을 보면서 대단하다 느끼는 동시에 조금 더 자유롭게 살지 않은 것에 대한 아쉬움은 없을까 늘 궁금했었다. 조금 더 어릴 땐 오빠 인생 노잼이야- 라고 생각했던 것 같기도 하다. 나이가 좀 더 들어서야 사람마다 중요시하는 인생의 가치가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 이후론 쉽사리 남의 인생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게 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 더 놀아볼걸'하는 후회는 없을까 여전히 궁금했다.
지금까지 우리 부모님의 재정상태는 꽤나 오르락내리락 했는데 내가 아주 어릴 땐 썩 넉넉하지 않았던 것 같고 내가 어느 정도 머리가 컸을 땐 아빠도 회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사람이 되고 엄마의 사업도 잘 된 탓에 부족함 없이 지냈다. 그렇다고 부자는 아니었지만 나에게만은 갖고 싶은 것은 다 사주는 부모님이었다. 우리가 성인이 되면서 조금씩 집에 재정적 위기가 찾아오고 내가 대학교 다닐 때쯤엔 꽤 어려워진 시기도 있었는데 나는 그때 그 사실을 잘 알지 못했다. 부모님은 내가 그런 일들은 몰랐으면 했고 덕분에 나는 조금은 눈치를 챘지만 쭉 모른척하고 있을 수 있었다.
하지만 나랑 4학년이나 차이가 나는 오빠는 달랐나 보다. 부모님이 알려준 것인지 오빠가 눈치를 챈 것인지는 모르지만 오빠는 집의 재정이 예전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내가 프랑스에서 어학연수를 하며 해맑게 유럽 한 바퀴를 돌고 있을 때 오빠는 농협 결혼식장 뷔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는 사실을 이번에 처음 알게 되었다. 나는 오빠가 근로장학생으로 학교에서 일을 한 건 알고 있었지만 결혼시장 뷔페 아르바이트를 했다는 것은 전혀 알지 못했다. 이야기 중간에 '오빠가 뷔페 아르바이트를 했다고? 왜 난 몰랐지?' 물었더니 '넌 그때 한창 즐겁게 놀고 있었지'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20대의 미경이는 정말 철이 없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내가 프랑스 어학연수를 준비하던 그 즈음 집안이 꽤 어려워진 시기였는데 나에게 보내주기 어려울 것 같단 얘기를 하기 싫었던 부모님은 아무 말 없이 날 프랑스에 보내주신 것이었다. 그렇게 나는 해맑게 유학길에 올랐고 그 1년 동안 집안의 기둥을 한두 개쯤은 뽑은 것 같다. 뽑힌 기둥을 부여잡고 있느라 오빠는 공부하는 중간중간 아르바이트를 하며 용돈을 벌고 있었던 것이다. 10여 년이 지나서야 알게 된 이야기. 못난 딸 못난 동생은 아니라고 생각하고 살았는데 부모님께도 오빠에게도 미안해지는 순간이었다.
오빤 그 뒤에도 나를 데리고 일본 여행도 다녀오고 대학교 4학년이 된 나에겐 내 첫 맥북도 선물해 주었었다. 자잘하게 받았던 용돈은 말할 것도 없다. 알고 있었지만 다시 생각해도 정말 아낌없이 주는 나무였다. 잠깐이지만 오빠 인생 노잼이라고 생각했던 나를 반성한다. 막내딸이란 이유만으로 가족의 큰 울타리 안에서 참 평온하게도 살았다. 아마도 덕분에 지금의 나라는 사람이 될 수 있었을 거다.
다행인 건 우리 집도 어느 정도 다시 안정을 찾았고 오빠는 어릴 때 포기했던 것들을 지금은 가족들과 충분히 누리면서 산다. 나와 남편도 부모님 손 벌리지 않고 살 수 어른이 되었고. 이젠 하나의 가족이자 동시에 세 개의 가족이 된 우리, 각자 자기 자리에서 잘 지내며 서로에게 힘이 되는 그런 가족이 되고 싶다. 이왕이면 듬뿍 도움을 줄 수 있는 그런 가족이 되고 싶다.
요즘 사실 가족이란 존재에 대해서 조금은 회의감이 들었었다. 한국 특유의 너무 큰 가족 공동체 속에서 좋은 일만 있으면 좋겠지만 사실은 서운한 일도 생기기 마련이고 정말 가끔은 있는 것보다 없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엄마를 계속 힘들게 하는 가족이 있는데 그걸 막아주지 못하는 아빠가 야속하기만 했다. 하지만 아빠 또한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 이미 40년 넘게 쌓인 이 시간을 내가 어쩔 도리가 없다. 난 그저 그런 부모님 앞에서 툴툴거리는 막내딸이 될 뿐이다.
이런 고민을 하고 있던 나에게 오빠와 함께 보낸 크리스마스는 너무 좋았다. 가족이 도대체 뭐길래라는 마음이 그래도 가족이 최고다는 마음으로 바뀌었다. 서로를 힘들게 하는 가족도 있지만 여전히 가족의 가장 큰 가치는 바라지 않고 베푸는 맘이라는 것을. 우리 가족이 서로를 위하는 마음은 여전히 굳건하다는 것을. 가족이라는 든든한 힘을 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