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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함태진 Oct 26. 2024

회사에 충성하지 않는다

인수합병 (M&A)

<2008년 2월 4일>

"토요일에는 OOO님 댁에서 설날이라고 제약업계 한국 사람들과 떡국을 먹었다... 그런데 분위기가 그리 밝지만은 않았다. 모두들 최근 제약업계에서 일고 있는 구조조정의 물결에 대해 이야기하며 미국에서 구조조정은 더 이상 특별한 일도 아니라고들 했다. 그리고 Corporate America에는 loyalty라는 것이 있을 수도, 있을 필요도 없다는 이야기도."


 미국에서 글로벌 마케팅 일을 하는 동안, 다른 제약회사에 근무하는 한국분들과도 교류할 기회가 많았다. 특히 동부의 펜실베이니아, 뉴저지, 뉴욕에는 거의 대부분의 글로벌 제약회사가 본사나 연구소를 두고 있기 때문에 다양한 회사, 다양한 분야에서 일하는 한국분들과 교류하며 여러 가지 정보를 얻을 수 있어서 좋았다. 하지만 2008년, 그해 설날의 분위기는 무척 무거웠다.


“네? 정리해고라고요?”


모임의 좌장 역할을 하시던 업계 선배님이 회사에서 정리해고 대상이 되었다는 소식을 전해주셨다. 모두가 침묵에 빠졌다. 하지만 그뿐만이 아니었다. 모임에 참석했던 다른 회사 분들도 요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며 저마다 불안해했다. 여러 회사에서 대규모 구조조정이 준비 중인 것 같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실제로 다수의 제약회사들이 대규모 인수합병(M&A)으로 인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2009년, 화이자(Pfizer)와이어스(Wyeth)를 680억 달러(약 80조 원)에 인수하고, 머크(Merck)쉐링플라우(Schering-Plough)를 410억 달러(약 50조 원)에 사들이는 등 대규모 M&A가 연달아 발표되었다.


돌이켜보면 그해 2008년은 세계 금융위기가 막 시작되던 시기이기도 했다. 미국에서 주택가격이 급격히 하락하면서 과도한 주택담보대출에 나섰던 은행들이 무너지기 시작하는 소위 ‘서브프라임모기지 사태’가 터진 직후였다. 이윽고 월스트리트의 대형 투자은행인 베어스턴스와 리만브라더스가 차례차례 무너지면서 세계 금융위기가 본격화되었다.


엄밀히 말해서 그 무렵 제약업계 구조조정은 금융위기의 직접적인 영향 때문은 아니었다. 오히려 잦은 인수합병이 발생하는 제약산업 자체의 고유한 특성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유야 어찌 되었건, 세계 경제가 위기로 치닫는 상황에서 직장을 잃는다는 것은 여러모로 불안하고 우울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글로벌 제약회사에서 인수합병이 잦은 이유


우리가 알고 있는 대부분의 대형 글로벌 제약회사는 수많은 인수합병을 통해 성장해 왔다. 제약회사의 역사는 곧 M&A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세계 최대의 제약회사 반열에 이름을 올리고 있는 화이자, 머크, 노바티스, GSK, 사노피 같은 회사들이 거의 다 그렇다. 도대체 제약회사는 왜 이렇게 M&A에 적극적인 걸까?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는 파이프라인을 확보하기 위해서이다. 제약회사가 개발하고 있는 제품들을 ‘파이프라인(pipeline)'이라고 부른다. 마치 수도관에서 물이 끊어지지 않고 연속해서 나오는 것처럼, 새로운 후속제품들이 끊이지 않고 나와야 한다는 의미다. 만약 파이프라인에 후속제품이 잘 갖추어져 있지 않으면 수도관에 공기가 찬 것처럼 문제가 생긴다. 회사의 매출이 급격하게 요동치며 들쭉날쭉해질 수 있는 것이다.


문제는 신약이라는 것이 출시한 지 5-10년 정도 지나서 매출이 최고조에 다다랐을 즈음에, 갑자기 수도꼭지가 잠기는 것처럼 매출이 급격히 사라지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특허만료 때문이다. 예를 들어, 심근경색이나 뇌졸중에 흔히 많이 처방하는 플라빅스(Plavix)라는 항응고제가 있다. 이 약은 특허가 만료되기 직전인 2011년에 전 세계 매출액이 무려 11조 원에 달했다. 하지만 이 가운데 약 10조 원이 특허가 만료되자마자 하루아침에 공중으로 사라져 버렸다. 싼값의 복제약이 등장해서 시장을 장악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특허의 만료가 가져오는 매출의 하락이 너무나 급격하기 때문에 제약업계에서는 이를 ‘특허절벽(Patent Cliff)’이라고 부른다. 회사가 이런 큰 폭의 매출하락을 상쇄할 수 있는 파이프라인을 미리미리 확보해 두지 않으면, 회사의 운명도 함께 절벽에서 나락으로 떨어지게 된다. 그래서 파이프라인을 잘 준비하고 관리하는 것은 신약을 위주로 사업하는 글로벌 제약회사들에게는 숙명과도 같은 일이다.


그런데 아무리 잘 계획한다한들 후속 제품이 회사가 계획한 시간표에 맞춰서 착착 나와 주지는 않는다. 신약개발 자체가 가진 불확실성이 워낙 크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제약회사는 다른 회사의 기술이나 제품을 기꺼이 사 오려고 한다. 좋은 기술이나 제품을 확보하기 위해서라면 회사를 통째로 사들이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 제약산업에서 인수합병이 잦은 이유다.



인수합병의 그늘


최상위권 글로벌 제약기업들 중에서 일라이릴리(Eli Lilly)는 초대형 인수합병을 단 한차례도 하지 않은 특이한 이력을 갖고 있다. 2008년 무렵, 다른 경쟁사들은 저마다 메가톤급 M&A로 너도나도 덩치를 키우고 있었기 때문에 당시 회사 내부에서는 직원들 사이에 묘한 불안감이 감돌았다. ‘이러다가 우리 회사만 뒤처지는 것 아닌가’, ‘행여나 나중에 우리 회사가 인수합병의 목표물이라도 되면 어떡하나’ 등의 우려가 퍼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때 당시 최고경영자가 타운홀 미팅 중에 했던 말이 기억난다.


”대규모 M&A를 단행해서 덩치를 키우면, 있던 문제가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더 큰 문제를 떠 안은 큰 회사’가 될 뿐입니다. “


초대형 M&A는 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책은 아니라는 지적이었다. 특히 R&D 생산성이 초래한 파이프라인의 문제에 있어서는 더욱 그렇다.


게다가 대형 M&A는 어설프게 관리했다가는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해결해야 할 새로운 문제들을 더 많이 만들어낼 수 있다. 서로 다른 업무 프로세스를 대체할 새로운 절차와 체계들을 도입해야 하기 때문이다. 또 중복되는 조직을 도려내고 필요 없는 사업장을 매각하기도 해야 한다. 서로 다른 조직문화를 하나로 합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이런 일련의 복잡한 통합과정을 관리하기 위해, 합병 후에 회사는 ’PMI(Post-Merger Integration) 팀‘이라는 조직을 만들기도 하지만, 이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직장을 잃게 되고, 조직의 과제들은 진행이 지연되며, 남아있는 사람들은 혼란 속에서 회사에 대한 애정도 점점 사그라든다. 그래서 최근에는 많은 회사들이 대규모 인수합병 대신, ’볼트온 (Bolt-on) M&A'라고 불리는 소규모 인수전략을 선호한다. 마치 새로운 부품을 볼트로 조여서 간단하게 붙이는 것처럼, 비교적 쉽고 신속하게 회사에 꼭 필요한 전략자산만을 콕 집어서 추가한다는 의미다.


하지만 어떤 형태의 인수합병에서건 빠지지 않고 거의 항상 동반되는 것이 인력의 구조조정이다. 두 회사가 합쳐지면서 덩치가 커지면 더불어서 비용도 함께 높아지기 때문에, 그대로 두면 인수합병이 이익률 측면에서는 긍정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경비를 줄일 방법을 모색하게 된다. 그래서 직원을 ‘자산’이라기보다 ‘비용’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보는 회사일수록 구조조정의 유혹이 커지게 된다. 자본주의의 비정함이라 할 수 있다.


Photo by Luca Bravo on Unsplash




세상 일은 정말 알 수가 없다. 대규모 인수합병으로 직장을 잃은 선배들을 보며 안타까워했던 그때로부터 정확히 10년 후, 나도 인수합병의 직격탄을 맞았다. 내가 일하던 회사가 740억 달러(약 100조 원)에 다른 회사에 인수되는, 제약산업 역사상 최대규모 M&A의 타깃이 된 것이다. 그리고 그 여파로 나도 퇴사하게 되었다. '요즘은 회사에 대한 loyalty(충성심)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다'던 10년 전 선배의 탄식이 떠올랐다.


사실 한국에서도 ’회사에 대한 충성‘은 낡고 고루한 생각이 된 지 오래다. 요즘 한국 대표기업 삼성전자의 위기를 두고 말들이 많은데, 이에 대해 누군가 이렇게 언급하는 것을 들었다. “예전에는 직원들이 주인의식을 갖고 회사를 위해 자신을 갈아 넣어가며 일했는데 요즘 세대는 그렇지가 않다.“ 얼핏 들으면 요즘 세대를 나무라는 것 같지만, 사실 시대가 변했고 관점이 바뀌었다는 이야기다.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대한 열정과 책임감은 필요한 것이지만, 그것을 조직에 대한 일방적인 충성심과 혼동해서는 안된다.


우리 모두는 제각기 자신의 길을 가고 있는 여행자들이다. 그리고 회사라는 조직은 그 여정 중에 타고 가는 버스와도 같다. 어떤 사람은 한 번에 최종 목적지까지 쭉 가기도 하지만, 버스를 여러 번 갈아타야 하는 사람도 있다. 또 어떤 버스기사는 안전을 중시하고 승객에게 친절한 반면, 어떤 기사는 빨리 가는 것만 중요하고 그래서 승객에게 불친절하거나 무례하기도 하다. 회사도 그렇다.


직장생활을 오래 하면서 내 의사와 상관없이 회사를 나와야 하는 상황을 몇 번 겪어보고 나서, 한 가지 절실하게 깨달은 점은 ‘직장은 왔다가 지나가지만 사람은 남더라’는 것이다. 함께 일했던 동료들 중에 이제는 단순히 ‘예전 직장 동료’로서만이 아니라 ‘인생의 소중한 인연’으로 남아 있는 이들이 있다. 그들은 좋을 때나 힘들 때나 늘 소리 없이 응원해 주고 조언해 주는 특별한 인연들이 되었다.


돌이켜보면 내가 열심히 일했던 것은 회사에 충성해서가 아니다. 나 스스로에게 최선을 다하고 싶었고, 나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고 싶어서였다. 그리고 함께 일하는 동료들에게 피해 주지 않고 싶어서였던 것이기도 하다.


(2024년 10월)


이 브런치 매거진의 이전 글들은 브런치북 <제약회사에 다닙니다 - 1편>으로 엮었습니다. 링크는 아래에 있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https://brunch.co.kr/brunchbook/biopharma-01


(Cover Image: Photo by Kevin Matos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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