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현상은 우리가 생명체라 여기는 것들에게서 가장 보편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 운동이다. 각각의 부분(기관)들이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있는 생명체들은 다수이자 하나이다. 다수이자 하나라는 모순을 가질 수밖에 없는 생명체는 자기가 하나임을 상기시키지 않으면 다수가 되어버려 흩어진다. 그래서 생명체는 자기를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자기 자신이 되어야만 한다. 이것이 우리가 생명현상이라 부르는 생명체의 자기 보존 욕망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의 영혼론에서 생명체의 영혼을 세 가지 분류로 나누었다. 식물혼, 동물혼, 인간혼이 그것이다. 식물의 혼은 영양섭취와 같은 생존을 위한 영혼이며, 동물의 혼은 감각을 수용할 수 있는 영혼이다. 그리고 인간의 혼은 수용한 감각을 이성적으로 사유할 수 있는 영혼이다. 각각의 혼은 서로 개별적으로 생명체에 담겨있는 것이 아니다. 동물은 식물혼과 동물혼을 함께 가지고 있으며, 인간은 식물혼과 동물혼 그리고 인간혼을 모두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생존을 위한 식물혼은 모든 생명체들에게 가장 보편적으로 담겨있는 영혼이다.
함수지는 식물에 담긴 생명의 보편성을 담아내고 있다. 작가는 자신의 작업을 통해 식물의 생명현상을 발견하는 것으로 인간의 생명현상 또한 함께 포착하고자 한다. 식물은 자신을 보존하기 위해 토양에서부터 양분을 흡수하며 내리쬐는 햇볕을 받는다. 이것은 외부의 물질을 자기로 만드는 내면화 작업이다. 그런데 내면화 작업을 하기 위해서 선행되어야만 하는 것이 있다. 바로 외부와 내부의 구별이다. 자기가 자기가 되기 위해선 자신을 한정 짓는 것, 외부와 내부가 분리됨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러므로 생명체들은 이러한 분리지점을 모두 가지고 있다. 껍질, 표피, 가죽 그리고 피부와 같이 표현되는 것들이다. 피부의 존재는 모든 생명체들에게 필연적인 과제로서 주어진다.
피부는 자신을 위함과 동시에 타자를 위한 것이다. 오로지 세계가 자신으로만 가득 차있다면, 모든 것이 유기적으로 교환되어도 자신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에 피부는 필요하지 않다. 피부는 내가 있음과 동시에 타자가 있음을 인정해만 생기는 지점이다. 그러면서 동시에 피부는 한정 짓기만을 하는 장소가 아니다. 피부가 모든 것을 거부하여 자신의 내부가 닫힌계가 된다면 그 생명체는 자기를 표현할 수도, 운동할 수도 없는 그저 사물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피부는 자기를 한정지음과 동시에 외부의 타자를 맞이할 준비를 하는 장소이다.
<부드럽고 뾰족한 것> 2023, 순지에 채색, 색연필
무조건적인 거부를 할 수 없는 피부의 양면성 때문에 생명체들은 항상 상처받을 위험에 노출받는다. 자기에게 타자는 필수적이면서 위협적이다. 필수적임과 위협적임은 생명체의 자기 보존적인 관점에서 상반된 의미처럼 느껴질 수 있지만 이 둘은 다른 것이 아니다. 어쩌면 타자는 위협적이기 때문에 필수적이다. 위협과 같은 자극이 있기에 자기 보존의 욕망이 생성될 수 있으며, 또한 자기 보존의 욕망이 있기 때문에 위협을 느낄 수 있다. 그러므로 이 두 가지 속성은 불가분적이다. 자기는 위협을 소화시킴으로써 탄생한다. 상처 입고 아무는 이 과정에서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피부가 탄생한다. 생명체는 피부의 재생이라는 새로운 자신의 경계지음이라는 행위 그 자체를 통해 자기 동일성을 유지한다. 새로운 피부가 돋아난 나는 과거와 다른 나이지만, 동시에 과거의 내가 가지고 있던 역량의 현실화로서 연속적인 나이다. 그리고 이러한 연속성을 보장해 주는 것은 피부의 재생 그 자체이다.
타자를 맞이하기 위한 소통의 준비장소로서의 피부를 작가는 식물의 말랑한 표피와 굳은 나무껍질 그리고 예리한 가시로 표현한다. 타자와 관계하며 나타나는 다양한 양상들, 그리고 이것들에 영향받으며 생명체에 내재된 거부할 수 없는 고뇌들을 작가는 얇은 순지에 반복적인 흔적들을 남김을 통해 구현한다. 작가가 남긴 흔적들은 자기의 흔적이자 멈출 수 없어 반복하는 생명의 흔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