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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ybk Jul 16. 2024

나: 영감주머니 8

For all artist

모든 창작자들에게 영감을 전하기 위한 토막글들을 기록해두고자 합니다.  

이름하여 영감주머니~

잘 부탁드립니다:)


1


 비평은 대상을 맥락 속에 배치시킨다. 맥락이 생긴다는 것은 특정한 문법이나 규칙에 종속되게 하여 서사성을 가질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비평 이전의 대상인 그것은 맥락과 서사가 부재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대상에 맥락을 부여해 주는 비평을 우리는 가치가 있다 여긴다. 신비를 우리의 눈앞으로 가져와 언어를 부여함을 통해 대화의 대상으로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맥락의 부여는 대상을 정의함으로써 대상의 생명력을 제거해 버린다. 정의되지 않은 신비는 세계의 부분으로써 (유기적인 운동을 가능하게 하는) 생명의 조각들을 지니고 있지만, 우리는 대상과 대화하기 위해 그것을 무엇인가에 종속시켜 박제시켜야만 한다. 그러므로 박제된 하나의 부분에서 우리는 생명을 느낄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의 부분만을 보고 있지 않다. 이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왜냐하면 부분을 바라보는 자신 또한 오로지 맥락 속에서 사유하며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개인은 자신의 기억의 전제됨을 통해 현재를 재해석하는 존재이다. 개인에게 현재는 끊임없는 재해석의 연쇄, 인식의 지속을 통해 발생한다. 나아가 지속의 반복을 통해 부분들의 연관을 밝히는 것, 전제된 기억의 확장을 통해 세계를 인식하는 것, 즉 배움을 통해 지식을 확장시켜 세계에 도달하고자 하는 앎이 곧 자유에 이르는 길이라고 말한 스토아의 가르침은 아마도 이러한 연유에서 탄생한 것이다.


 우리가 무언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미 이해된 것이 전제되어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누군가의 비평이 우리에게 대화가능한 언어로 다가오기 위해서는 그 언어가 통용되고 있는 세계의 조명이 필요하다. 따라서 생명의 잔재를 포착하는 비평을 위해서는 위와 같이 세계에 다가가는 앎이 요구된다. 그런데 이러한 앎이 다른 이들이 말하고 있는 비평과 같은 의미인가? 이러한 작업의 책무는 누구에게 주어지고 있는지 의문이다. 무지함으로 인해 세계에 대한 사랑이 부재한 것같이 느껴지는 맥락들을 어떻게 바라볼 수 있을지. 그리고 이러한 것만을 바라는 시선들을 어떻게 세계와 마주 보게 할 수 있을지. 불만족스러운 의문이 쌓여간다.


작업 노트


 <objet a> 2024, digital photography
 <objet a> 2024, digital photography

 무엇을 창작함과 함께 박제시킨다는 양립불가능한 두 행위를 함께 하는 것이 가능할 것이라는 생각은 오만이다. 작품의 창작은 대상에 담긴 생명의 흐름을 예술가의 재배치를 통해 연장시켜 내보이는 작업이다. 이러한 작업 속에서 생명의 분출과 박제가 동시에 이루어지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니 나는 비평가도 예술가도 되지 못하겠구나! 내게는 오로지 앎에 대한 사랑만 허락되었구나.


2


 사람들과 사랑을 나누는 것은 불편하면서도 이것만 한 것이 없다. 그러나 이것에 유용함과 고유성을 이해하면서도 이것에 기뻐하는 법에도, 즐기는 법에도 서투름이 앞선다. 인간의 여정을 새로운 놀이를 찾아 발견하는 과정이라 생각한다면, 나의 걸음마에 맞는 새로운 놀이는 어떤 것 일지 새로움에 대한 기대는 허함과 설렘사이를 오가는 역동적인 갈망을 느끼게 한다. 새로움에 대한 자연스러운 이끌림, 역동적 갈망, 에로스의 인도, 모두 사랑함이라는 같은 의미를 바라보는 표현이다.

  

 사랑을 행한다는 것은 다의적이다. 그럼에도 확실한 것은 그것이 분명하게 표현이라는 것이다. 상대방에 대한 나의 표현이자 나를 둘러싼 세계로 향하는 나다움의 요구이다. 표현함의 기저에는 ‘내가 이곳에 있음’이라는 근본적인 인정의 요구가 있다. 의미는 관계 속에서 생성되기 때문에 개인의 존재방식은 세계와의 상호작용을 통해 실천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사랑이라는 것은 내가 세계 속에서 선택한 대상에게 나다움을 실천함과 동시에 실천함으로써 나다움을 만들어 가는 것이다. 헤겔과 샤르트르가 말했듯이, 인간의 의식은 반성적으로 작용하여 의식대상으로부터 자신에게 다시 돌아와 정립된다. 하지만 이러한 작용이 일방향적인 실천에 의한 것이라는 얕은 믿음은 이것의 지속가능성에 한계를 그어버린다. 프롬에 따르면 성숙한 사랑은 ‘내가 주고 싶은 방식’ 임과 동시에 ‘상대가 받을 수 있는 방식’으로 표현된다. 그러므로 성숙한 사랑의 실천은 상대의 방식에 맞춰 나다움을 실천하며 상대와 조율하는 참여를 통해 자신을 표현하는 과정이 된다.


 누군가가 사랑을 표현할 때 그것이 내가 받을 수 있는 방식이라면, 표현을 인정해 주는 근본적인 공감을 해야 한다. 근본적인 공감이란 상대방의 ‘그저 있음’을 경탄의 자세로 인정해 주는 것이다. 상대방의 ‘그저 있음’을 긍정하며 불안을 걷어내어 자유롭게 나다움을 표현해 줄 수 있는 세계의 도화지가 되어주는 것, 이것이 사랑을 받는다는 것이 아닐까. 사랑을 즐기며 서로를 세계에 표현하는 그런 존재가 있다면 행복할지, 이것을 실현하기 위한 구체적 대상들을 살피는 것을 떠나 잠시 상상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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