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예술가라 칭해지길 바라는 자들이 너무 많다. 작품이라 불러지는 것도 너무나 많다. 이것들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들이 마땅히 예술가라 부름 받을 준비가 되어있는지는 의문이다. 내가 이러한 준비상태에 이야기하는 것이 누군가에겐 정말 웃긴 일이지만 말이다. 예술의 불명확성을 핑계 삼아 예술이란 것을 사업의 도구로만 취급하거나 자신의 행동의 정당화나 면피를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을 나는 너무나 싫어한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의문이 든다. 여러분들에게 예술이란 무엇인가?
단지 신비감과 해방감에 의해서, 예술과 예술가란 기호를 얻기 위해 이것들을 바란다면 바라는 것을 얻기 힘들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을 바라는 이유가 예술의 관조 이전에 타인에게 수용받거나 칭찬받기 위함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들이 마냥 해로운 것은 아니지만, 이것들만을 토대로 자신의 작업을 수행한다면 그 작업에는 칭찬받고 싶어 하는 외로운 아이가 한 명 있을 뿐이다. 우리는 그러한 것을 예술이라 부르는가? 자신이 밟고 있는 대지에 대한 저항과 의문이 없는 무조건적 수용을 예술이라 칭한다면, 세상에 예술이라 부르지 못할 것이 없고, 그것이 다른 것들과 구별될 수 없으므로 예술이란 것이 있을 이유도 없어질 것이다. 그러니 결국 그들 스스로가 자신이 원하고자 한 것을 없애고 있는 것이다. 작은 액세서리 하나만을 남기고서 말이다. 물론 이러한 것들을 양분하듯이 자를 수 있는 것은 아니니 애매한 가름선 위에서 자신에게 끝없는 성찰과 저항밖에 요할 수 없다.
그리고 관성에 의해서, 어릴 적부터 지속해 왔기에 예술이란 것이 자신에게 자명하게 체화되어 있는 것으로만 생각한다면 그들 또한 자신이 바라는 것을 얻기 힘들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단지 거스를 수 없는 세계 속에서 하나의 춤을 계속 추고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들이 특별하기 때문이 아니다. 세계를 사는 모두가 각자 자신만의 춤을 추고 있으며, 그들이 단지 예술이라 부름 받는 춤을 추고 있기에 그들이 자신에게 예술이 체화되어 있다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춤과 타자의 춤을 구분 지을 의문과 저항이 없이 그들이 추는 춤의 기술의 숙련만을 논하고 있다면, 그들 스스로 예술이란 것을 말하지 못할 것이다. 안락함이 남을 수도 있지만 말이다.
그러니 나는 의문 없는 예술은 없다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예술가의 의문이 단지 자신의 주관적 내밀함만으로 그것을 진부함에 저항하는 새로움이라 말한다면, 예술가는 그 의문과 작품이 왜 가치가 있는가에 대해 대답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결국 예술에 대해 논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개인의 주관에서 출발하며 다수의 주관을 염려하는 새로움을 조명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 우리는 그러한 것을 예술이라 말할 수 있으며 가치가 있다 말할 수 있다.
또한 많은 이들이, 아마도 모든 이들이 위로를 받고 싶어 한다. 특히 자연스런 불안이 동반되는, 많은 예술을 추구하는 자들 또한 그러하다. 위로는 복합적인 인정받음이다. 결여, 동질감, 있음과 같은 것들의 인정, 누군가의 염려에 위로받는다는 것은 이러한 것들을 타자에게 전달받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인정들은 위로를 주고자 하는 자에 상관없이 누구에게나 받아도 느낄 수 있는 것들인가.우리는 위로를 받고자 하기 이전에 위로받을 대상을 먼저 고려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의 비유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주인은 노예가 아닌 자와의 인정을 갈망하여 투쟁한다. 누구에게나 노예의 양태가 있으며 주인의 양태가 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주인과 노예는 특정 대상을 의미하기보다는 하나의 대상의 여러 가지 내적 양태들에 가깝다. 돌아와서, 주인의 면모는 마땅히 인정받고 싶은 자의 인정을 바란다. 자신이 원하는 목표를 먼저 선취하고 있는 자라던지, 빛을 지고 있어 감사함을 느끼고 있는 자라던지, 혹은 자신이 모르는 무지의 영역에 서있는 자와 같이, 자신을 초월해 있어 진부하지 않음을 느낄 수 있는 자들에게서 우리는 인정받고 싶어 한다. 외재적인 것에서 내재적인 것을 인정받는 형식으로, 타자에서 느껴지는 이러한 양태들에 인정을 받을 때 우리는 위로받음을 느낀다.
그러나 외재적인 것의, 즉 타자의 우월함에만 기대어서 위로를 갈구한다면, 그 바람에는 저항이 결여되어 있다. 이것이 모든 이에게 문제점이 되지는 않지만, 예술가에게는 다르다. 저항의식의 결여와 새로움의 창조 부재는 예술가 자신의 의의를 무색하게 만든다. 이러한 위로는 단지 스스로의 죽음을 통해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이들이 위로를 받고자 한다면, 그것은 자신의 내재적 양태들의 끊임없는 운동을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 위로받고자 하는 내적 분열과 갈등에 대한 성찰과 인정 그리고 통합에 대한 의지, 이러한 운동에서 우리는 예술가의 진정성을 느낀다. 그리고 진정성이 선행되었을 때에만 비로소 그들이 원하는 타자의 인정과 위로를 얻을 수 있다. 이러한 연유에서필연적으로 그들은 고독하다. 작품을 감상한다는 것은 그들의 고독을 존중하는 행위이다. 그리고 이러한 존중에서 예술가들은 위로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예술을 사랑하는 여러분에게, 여러분들이 예술 작품에 애정을 느끼는 이유가 무엇인가. 단지 자신이 그러한 취향을 가지고 있기에 자연스러운 애정이 따른다는 소박한 믿음은그 애정을 기성품에 대한 애정과 구별할 수 없는 것으로 만든다. 만약 자신의 애정이 다른 애정들과는달리 고유한 가치를 지닌다면, 작품에 대한 애정은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를 묻게 한다. "그것이 왜 좋은 것인가?"또한 자신의 취향을 좋은 것이라 여기며, 자신과 다른 취향을 가지거나 취향을 고려하지 않는 자들에게, 그들이 좋지 않은 취향을 가졌다는 생각은 그들과의 거리감을 생성한다. 이러한 거리감은 개인에게 일종의 자기애적 표현과 우월감의 표출이 된다. 그러나 좋음 그 자체에 대한 질문이 아니라 단순히 거리감을 위해 자신의 취향을 옹호하는 것이라면, 그 자는 무지함과 공허함 그리고 타자의 시선과 도전 때문에 자신의 취향이란 것을 유지하기 힘들 것이다. 그러니 자신의 취향이 방어적이거나 치장적 표현이 아닌, 자신의 애정을 소중히 여기는 것이라면, 그 사람은 자연스럽게 질문을 멈출 수 없다. 결국 작품에 대한 사랑은, 질문을 멈출 수 없음 그리고 그 질문을 즐기며 애정하는 것과 다르지 않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애정하는 자들을 이해하기 위해 그들에게 질문할 수 있다. "당신은 무엇을 묻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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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자
보통을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누구든 "이 정도는 되어야지."라고 생각하는 요소들이 있다. 성격, 외모, 친구, 애인, 자산, 만족감, 삶의 질... 등등. 보통이라고 생각하는 자신의 기준들은 어떻게 만들어지는 건지, 갈증에 떠밀려 요구하기를 반복할 뿐 의문을 던지기는 어려운 것 같다.
하나의 특정한 개인의 모든 측정한 수치들이 평균에 들어맞는다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중앙값에 해당하는 자가 있더라도, 중앙값의 수치는 매초마다 바뀔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인간들은 탄생과 죽음을 반복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류라는 모집단이 계속 변화하니 중앙값을 장시간 고정시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개인이 이 정도의 엄밀함을 요구하는 것은 아니니 이러한 논의가 유의하지 않다 느낄 수도 있지만, 여기서 중요한 점은 모집단의 변화에 의해 중앙값이 변화한다는 것이다.
하나의 개인이 인류 전체와 만나는 경험을 가지는 건 불가능하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보통이란 경험의 한계에 갇혀있을 것이다. 그러니 개인이 생각하는 보통의 모집단은 주관적인 개인의 경험이다. 그리고 모든 사안에 자신의 모집단을 적용하는 것 또한 어렵기 때문에, 무의식적으로 개인은 자신이 생각하는 각기 다른 사안들마다 모집단에서 간추린 각각의 표본들로 자신의 보통을 만든다. 인간은 경험으로 갇힌 텅 빈 공터 속에서 자신의 테두리들을 바라볼 뿐이다.
이 지점에서 지적할 수 있는 것은, 보통과 같은 주관적 기준들을 세우려 할 때, 사람들이 그 기준이 어떤 계기들로 만들어진 것인지 알아보려 하는 것보다 그 기준을 당연하다 여기는 태도를 가지기 쉽다는 것이다. 이러한 맹목적인 믿음 때문에 개인은 기준의 생성과정을 외면함으로써 기준을 생성한 책임 또한 회피하게 된다. 그래서 자신이 생각한 기준이 타인에게 상처를 줄 때에도 그 아픔의 책임으로부터 회피한다. 하지만 그 기준들은 분명 그 주관적인 체험 속 세계의 기준이다.
그러므로 주관적 기준의 생성 책임을 외면해선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책임을 회피하지 않는 것이 개인의 기준을 수정하라는 것은 아니다. 개인의 주관적 기준들을 특정 의지에 의해 통제될 필요가 없을뿐더러 그것이 가능한 작업인지도 의문이다. 또한 주관적 세계 속 기준의 생성이 온전히 개인의 의지에 의한 것 또한 아닐 것이다. 다만, 자신이 만든 기준으로 생기는 영향들이 자신의 세계관이라는 무게감을 가져야 할 것이다. 무게감이 타인의 단점에 대한 거부감을 걷어내어 주고, 타인이 만든 기준이 자신에게 끼치는 영향 또한 덜 민감하게 해 줄 것이다. 가치가 와해되며 무엇을 추구해야 할지 혼란스러운 사회이다. 이러한 사회 속에서 창조자로서의성숙함과 무게감이 타인과 더 깊은 소통을 가능하게 해 줄 것이다.
타인의 상처를 볼 때에는 어떤가, 잔인한 부상을 당한 사람의 상처에서 눈을 피하지 않을 용기가 과연 내게 있을까. 만약 손가락이 절단된 사람을 본다면. 두려움과 연민, 배려등이 섞인 복합적인 감정을 느낄 것이다. 이때 느끼는 두려움의 이유는 뭘까? 상처에서 예상되는 고통의 두려움, 혹은 나와 다른 상태에 있다는 거리감에서 느껴지는 두려움, 파악하기 힘든 복합적인 거부감이 우리를 혼란스럽게 한다.
복합적인 거부감은 신체적인 상처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상처를 보았을 때에도 느껴진다. 바로 비슷한 경험이 없어 공감하기 힘든 마음의 상처를 가진 사람을 보았을 때이다. 가난, 트라우마, 중독, 결핍.. 등으로 인한 거리감이 관찰자에게 거부감으로 변질되어 전달된다. 거리감 있는 상처를 목격한 관찰자들은 그들의 상처들을 바라보기 힘들어하며 시야에서 그들을 지우려고 한다.
하지만 사람들이 자신의 감정을 혼동하고 있는 게 아닌지 의심스럽다. 복합적인 거부감속에 담긴 상처 입은 사람의 '상처'와 '자신과 상대방의 차이점'을 동일한 것이라 생각하는 혼동이다. 이러한 혼동을 해소하기 위해서 감정을 더 섬세하게 느껴볼 필요성이 있다. 타인의 상처를 보았을 때 우리는 '상처'에 거부감을 느끼는 것이 아니다. 그 상처로 인한 '자신과의 차이점'이 거리감을 통해 우리의 공감을 방해하여 상처 입은 사람들을 '이해하기 힘든 다른 세계의 사람'이라는 영역으로 추방해 버린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해하기 힘든 타자를 두려워한다. 조명 없는 어둠 속의 두려움처럼, 인간은 알 수 없음을 잘 견뎌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처와 차이는 분명 다른 것이다. 자신과의 차이점이 두려워 타인을 마주 보기 힘들지라도 타인의 상처에게서 눈을 돌려선 안된다. 공감의 의지가 있다면 상처 그 자체를 바라보는 시야를 통해 타자의 아픔과 연민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상처와 차이를 분리하기 위해 노력하더라도, 분명 상처를 볼 때 차이는 우리의 곁을 맴돌며 본능적 두려움을 느끼게 한다. 이러한 지점에서 관찰자에게 '무지할 용기'가 요구된다. 어둠 속을 밝히지 않아도 어둠 속에 자신을 내던지는, 무지한 것을 무지한 그대로 곁에 둘 수 있는 용기이다. 타인과의 차이를 반드시 극복할 필요는 없다. 차이를 무지한 상태 그대로 받아들일 용기가 타인의 상처를 상처 그 자체로 마주할 수 있게 해 주기 때문이다. 이 지점이 인간 사이에 있는, 깊은 계곡과 같은 단절의 한계를 이어주는 다리가 되어준다. 이 시점에서 타인의 상처는 두려움의 이유가 되지 못한다. 단지 배려의 이유일뿐이다.
그리고 다른 종류의 용기 또한 필요할 때가 있다. 바로 자신을 바라볼 때이다. 우리는 자신의 눈으로 자신의 얼굴을 바라볼 수 없다. 얼굴을 확인하기 위해 우리는 거울을 바라본다. 그러면 자신의 눈으로 자신의 감정을 바라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감정을 비추는 거울들이 필요하지 않을까. 사람들은 어떠한 대상들에 자신을 비춰 자신의 감정을 확인하고 있는 걸까.
감정들은 우리의 속을 항상 떠돌고 있다. 하지만 얼굴 바라보는 것과 마찬가지로 감정들이 우리의 속을 떠도는 상태에선 스스로 그 감정을 느낄 수 없다. 감정을 응집시켜 그것을 느끼게 해 줄 무언가, 즉 인식할 수 있는 대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신을 어떠한 대상 '감정의 거울'들에게 비추었을 때 비로소 그것에 반사되어 비치는 자신을 감정으로써 느낄 수 있다. 감정은 사고되지 않는 것들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 흔적만을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다. 이 감정을 비추는 거울들은 무엇이든 될 수 있다. 사물이 될 수도 있고, 경험이 될 수도 있고, 사람이 될 수도 있다. 분명한 것은 이 거울들은 항상 내게 타자로서 앞에 서있다.
일상 속에서 사람들이 자신의 감정을 비춰볼 때, 자신의 감정을 비출 거울을 찾지 못해, 쌓여버린 감정에 마음이 체한 사람들을 자주 발견한다. 자신이 인지할 수 없는 막연한 불안함과 슬픈 감정들을 먹먹하게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 표현할 길이 없어 감정과는 전혀 다른 행동들로 표출되는 버릇들을 많이 목격할 수 있다. 그들을 보며 소망한다. 그들 앞의 맑은 거울이 될 수 있기를. 상대방을 또렷하게 비춰주는 맑은 거울이 되어 그들의 갈증들이 덜어지길. 그리고 그들에 비추어진 나를 좋아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
<objet a>, 2024
자기
우리들은 인격이다. 그리고 인격들을 존중하며 어쩌면 생명보다 더 우선시 될 수도 있는 최상의 가치로 여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인격을 바라볼 수 없다. 인격들은 단순히 자신들이 무엇인가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들이 무엇인가에 대한 차이를 통해서, 즉 부정성의 계기를 통해서 규정된다. 이러한 부정성은 생물을 무생물과 구별한다. 인격 안에서 부정성은 자신을 초월할 수 있는, 사유 지평의 상승을 이루게 해 준다. 인격들은 단지 느끼는 것도, 단지 생각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사유의 너머의 것 또한 사유한다. 즉, 인격들은 ‘있음 자체’에 관한 사유를 할 수 있다.
인격들은 하나의 ‘내적차원’을 가진, 다시 말하자면 ‘체험하는’ 존재에 속한다. 체험 대신에 우리는 이것을 ‘정신적인 상태’ 라 표현할 수도 있다. 인격성은 존재가 ‘존재 일반’의 추상이 아니라 고정된 객관성의 전제를 넘어서는 지향, 즉 존재의 패러다임이다.우리는 매번 자신이 '무엇으로 존재하는 것'으로, 즉 명확히 포착될 수 있는 방식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가 인격들로서 항상 어떤 역할을 연기하고 있다는 사실에 기반하여 하나의 역할극을 행하는 참여자임을 느낄 수 있을 뿐이다. 개인의 정체성은 곧 그 유기체의 정체성을 의미한다. 하나의 유기체의 정체성이란 관점에서, 그 사람의 정체성은 항상 외부의 다른 것과의 차이에 의해 인지되어 확정된다. 그러나 이 같은 기초적인 생명체적인 경계에 바탕을 둔 정체성은 그저 정체성을 찾는 여정에서 정체성을 형성하는 특성을 지니고 있는 몇 가지 단서만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지 인격 그 자체는 아니다. 인격은 이러한 자연적인 신체 기관의 산물이 아닐뿐더러, 이 생명체적 특징들로 인한 측면들은 인격의 최종적인 한계나 종착점이 아니다.
인간은 상징을 통해 세계와 연결된다. 우리는 언제나 이미 해석된 세계에서 살고 있으며, 이와 동시에 세계는 항상 더 해석될 여지가 있는 곳이다. 동물들 또한 그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 세계에 살지만, 우리는 이것을 그들의 세계가 아니라 환경이라 부른다. 왜냐하면, 동물들은 그 의미를 상대화시키는, 다시 말해서 그것을 특정한 의미로 반성하는 자기의식까지 그 의미를 끌어올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기호화된들 것에서 기호화한 세계의 생성에 참여하는 존재로서 인격들로 드러난다. 그 때문에 인간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사물들보다 이러한 사물들의 기호들을 더 자유로운 방식으로 통제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능력이 우리가 인격임을 가능하게 한다.
중립적이고 상호 주관적이며 통제 가능한 심리학적 실험에서는 주관적인 요소들이 실험 주관자의 의도에 의해 배제되기 때문에, 정확한 결과를 내기는 하지만, 한 인간이 실제로 어떤 존재인지에 대해서는 거의 말해주지 않는다. 한 인간의 인격은 그 깊이와 풍부함에 있어서 오직 그에 대한 어떤 것을 기꺼이 체험하는 사람에게만 해명된다. 그러므로 상상력이 풍부한 예술에서 나타나는 주관적인 상징의 세계는 실재를 숨길뿐만 아니라 동시에 실재를 드러내 준다. 예술은 실재를 어떻게 보고 듣고 이해하는가를 가르쳐 준다. 실재는 우리에게 있어서 있는 그대로 단순하게 존재하지 않는다. 실재는 항상 더 하거나 덜 한 어떤 것으로 존재한다. 실재는 언제나 우리의 배후에서, 외부에서 비치는 풍부한 색채의 빛 속에 있거나, 어둠 속의 침묵에 숨겨진 채로 남아 있다.
결국 모두가 자기 자신이 되고 싶어 한다. 그런데 자신이 무엇인지 우리는 알고 있을까. 나는 나에게 언제나 문제가 되는 무엇이다. 어떤 질문을 할 때든지, 어떠한 것을 인식할 때라든지 항상 그곳에는 나라는 자가 전제되어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는 항상 묻는 자가 누구인지를 묻고 그자가 되고 싶어 한다. 그러나 그러한 자는 세상 어디에도 없다. 물을 때만 있을 뿐, 묻고 나면 항상 사라지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쩌면 그자에 대한 그리움이나 잔여감만으로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기척이 느껴져 뒤를 돌아보면 아무도 없지만 계속 고개를 기웃거리게 되는 관성과도 같은 것으로 말이다. 그러니 그자가 누구인지 의문이 들지만 신경 쓰지 않기로 마음먹은 자들을 어리석다 할 수도 없다. 그러나 그들에게 잔여감이 사라진 것은 아니기에 그들은 이유 없이 기계적으로 고개를 두리번거릴 뿐이다. 결국 언제나 의문만이 남는다. 어째서에 대해서도 왜에 대해서도 마땅히 대답할만한 것이 남아있지 않다. 그러나 만일 자신이 그 묻는 자라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만큼 책임감 없어 별로인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러니 물음을 던지며 의문놀이를 즐기는 수밖에 없다.
고대 희랍어 포이에시스(poiesis, ποίησις)는 가공이나 제작과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때의 제작은 단순히 물질의 변형을 뜻하는 것이 아닌, 제작자가 생각하는 목적에 부합하는 참된 모습으로 자연의 물질을 가공함을 뜻한다. 그리고 포이에시스를 위한 기술을 테크네(techne, τέχνη)라고 하였으며 이것이 라틴어에서 아르스(ars)라고 번역되어 art의 어원이 되었다.예술가는 자연을 선취하여 자신이 생각하는 참된 모습으로 가공함을 통해 작품을 제작한다. 이때 예술가의 주관이 담긴 조화로움이 자연의 배치를 바꾸는 기술이 되어 예술가 스스로를 표현해 준다. 자연의 물질들과 인간의 구성성분은 같다. 이 둘이 다른 이유는 단지 구성성분들의 배치의 차이이다. 자신의 고유한 배치를 자연물을 가공하여 표현하는 것은 곧 내재된 자신의 외화가 된다. 그러므로 표현된 작품은 예술가와 다른 것이 아니다. 배치의 고유성이 곧 예술가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주는 사건이 된다.
<objet a>, 2024
우리
관찰은 우리가 외부로부터의 자극을 내면으로 수용해 세계를 만드는 것이다.개인들은 엄밀하게 각각이 다른 세계를 살고 있다.우리의 감각기관 외부에 있는 물질들은 독립적으로 내재된 가치를 표현하지 않는다. 물질들은 개인의 관찰과 상호 작용을 통하여 세계의 일부분이 되어 내재된 역량들을 펼칠 기회를 얻는다. 이러한 시점에서 관찰자는 창조자이다.
그렇다면 세계 내부의 관찰자 자신의 탄생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세계 내부의 '나'는 전지전능한 창조주의 모습을 하고 있지는 않을 것 같다.내가 만들어낸 '나'는 나의 세계 속에서 무엇을 바라는가? '나'를 나의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쇼윈도로만 대한다면, 나는 끝없는 소외에 빠질 것이다. 나를 인지하기위해선 '나'의 바람을 통해 간접적으로 느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나의 쇼윈도를 철거하여 공실로 남겨둔다면, 그 자리에는 공허함밖에 남지 않을 것이다.
'나'를 인지하는 것은 자극을 수용하는 역할로부터 시작된다. 그러므로 자극을 받았을 때의 반응이 곧 개인의 존재를 표현하게 된다. 그러나 공허함에 만물이 무자극 해진다면 나는 '나'를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 걸까. 나를 표현할 필요가 사라지는 것을 평온이라 생각한다면 끝없는 허무주의에 빠질 것 같다. '나'를 동역학적 힘과 같은 것으로 표현하기 위해 파동으로 생각해 보자. 진폭이 한없이 0에 수렴한다면 나는 안정적이고 한결같은 '나'가 될 것이지만, 이것이 죽음과 다른 게 무엇인가, 바이탈 사인의 최후처럼 끝없는 경고음이 나에게 경종을 울린다.
우리는 자신을 박제된 채로 남겨두지 않기 위해선 타자에게 자신을 내어주어야만 한다. 타자에게 자신을 내어주는 방식으로 타자에게 창조자가 될 기회를 부여한다. 이러한 표현의 과정에서 관찰하는 주체와 관찰당하는 객체의 경계는 허물어지며, 그 자리에는 상호침투하는 소통이 채워진다. 소통이 부재한 채로는 나와 나 아닌 너는 있을 수 없다. 내가 네가 아닐 이유는, 네가 내가 아닐 이유들과 다르지 않다.
타자와 소통하기 위해 필요한 요소들이 있다. 그중 주된 요소들 중 하나가 바로 도덕이다. 세계에 오로지 나 혼자만 존재한다면 도덕은 필요하지 않다. 도덕은 타자가 있기에 필요하다. 이것은 '우리'를 위해 지켜져야만 하는 것이다. '우리'의 범위는 기술과 학문의 발전을 통하여 점차 확대되어 왔다. 가족에서 부족으로, 국가로, 이념으로, 인간으로, 동물로, 자연으로. 인간은 지식의 최전방을 확장시켜 더 많은 것을 인지하게 되었고, 그것들은 모두 타자가 되어 우리의 시선 앞으로 왔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마주 보며 배려해야 할 것들이 많아져 피로감을 느끼는 사람들 또한 많아졌다.
이러한 피로감 앞에서 누군가는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 "만일 내가 도덕적이지 못한 행동을 하더라도 나의 부도덕함을 목격할 수 있는 타자는 소수이므로, 모든 타자가 나의 부도덕함을 아는 것은 불가능하다. 또한 나는 매 순간마다 각각의 다른 타자를 마주하며 새로운 행동을 하므로, 내가 해온 모든 부도덕한 행동을 눈앞의 타자는 전부 알 수 없다. 그러니까 한 번쯤은 부도덕해도 괜찮을 것이다. 어쩌면 더 많이 부도덕해도 괜찮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생각하며 자신의 부도덕함을 정당화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이 떠오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도덕성을 관철하려는 자들 또한 있다. 이러한 사람들은 각자 자신만의 사유를 통하여 도덕성을 관철하려고 하지만, 이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발견할 수 있을만한 조건이 있다. 그것은 타자들이 하나의 전지적 관찰자의 시점으로 통합되어, 자신이 이 시선에 조명됨을 예민하게 느낀다는 것이다. 지속되는 일정한 시선으로 나를 조명하여 나의 선함과 도덕을 바라보는 관찰자. 전지전능한 관찰자를 전제해야만 인간은 도덕성을 시험받을 수 있으며 도덕성을 관철할 수 있다. 이 전지전능한 관찰자는 나의 속에 내재되어 있는 '나를 바라보는 또 하나의 나' 또는 '대상 없는 광범위한 타자의 시선' 혹은 '신적인 시선'과 같은 것들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그러나 점점 이러한 시선의 조명은 자극과잉과 피로감에 의해 옅어진다. 혼란스러운 사회 속에서 "왜 '저들'이 아니라 '우리'여야 하는가?"라는 의문이 많이 떠오르지만, 우리가 맹신하는 도구적 이성에 기반한 합리성은 인간의 이기심과 도덕사이의 간극을 좁히기 어려워 보인다.
우리는 항상 자기 자신이 되고 싶어 한다. 그리고 자신이 되는 것은 우리 속에서 나와 타자가 공존해야만 가능한 것이다. 공존이 성립하지 않는다면 자신은 맹목적인 공허한 외침이 되거나 청자 없는 고독만이 남게 된다. 우리는 어떻게 개인의 바람과 보편적 시선을 일치시킬 수 있을까. 주관과 객관의 일치, 이것을 철학자들은 진리라 생각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진리를 바라볼 수 있을까. 우리를 기다리는 조화로움은 과연 무엇일까?
단자들의 연합은 기능이 되고, 생명이 되고, 의지가 된다. 물질들의 연합을 인도하는, 자연에 내재된 '자연'스러운 배치의 규칙이 있다면, 그것은 물질들이 배치되기 이전에 이미 전제되어 있는 규칙일 것이다. 수학과 기하학 그리고 과학적 법칙들이 이러한 규칙들에 속한다. 그렇다면 인간 또한 이러한 법칙들 속에 포섭되는가? 법칙을 파악하는 것과 함께 의문을 가지는 것 또한 인간에게 내재된 법칙이라면, 스스로에게 질문하는 인간에게 자연에 내재된 조화로움을 논하는 것은 가치의 문제가 된다. 아포리아 속에 내던져지기 때문이다. 어떠한 배치와 조화를 추구할 것인가? 이 지점에서 인간학은 미학이 된다. 조화로운 배치를 위한 아름다움이 곧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 규정이 되기 때문이다.
인간학적 시선으로 나다움과 인간다움을 구별하는 것은 어려운 작업이다. 인간다움이란 무엇인가? 우리가 누군가를 인간답다고 표현할 때에는 크게 두 가지 갈래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첫째, 완벽하지 않음이라는 의미로 사용되곤 하며, 둘째, 동물과 달리 이성적이며 도덕적이다라는 의미로 사용된다. 첫째의 의미는 인간을 기계적임과 거리를 두는 것이며, 둘째의 의미는 인간을 야생적임과 거리를 두는 것이다. 인간적임의 두 가지 용례에서 발견되는 공통적인 특징은 인간적임을 맹목적임과 대치시킨다는 것이다. 인간적임을 합리적인 기계적 맹목성과 대치시키며, 또한 약육강식과도 같은 동물적인 야성적 맹목성과도 대치시킨다. 이러한 인간적임의 두 가지 용례는 인간을 기계성과 야만성 사이에 있는 존재라는 것을 나타내준다.
그렇다면 나다움은 어떤 것인가? 우리는 인간이지만 '인간적이다'라는 표현으로만 나를 설명하는 것은 어렵다. 특히 우리는 같은 인간들 사이에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인간적임은 인간들 사이에서는 보편적인 개념이다. 그러므로 '인간적이다'는 인간들 사이에서는 가장 나다움과 멀리 떨어져 있는 개념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나다움은 인간적이지 않은, 보편적이지 않아 예측할 수 없는 특이함과 같은 것들이다. 누구보다 더욱 기계적인 것도 나다움이 될 수 있으며, 누구보다 더 육감적인 것도 나다움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나다움만을 추구할 수 없다. 인간은 항상 타자와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극단적인 나다움만을 추구하여 인간적임에 소홀하다면, 우리는 다른 인간들에게 배척당할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모두가 보편적 인간적임만을 추구한다면, 모두가 비슷해져 극단적인 차이에서만 나다움을 찾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작은 차이에 더욱 큰 가치를 찾아야만 하는 사회는 히스테릭하다. 히스테릭한 사회에서는 아주 미세한 변화에도 예민함과 피로를 느끼게 된다. 그러므로 건강한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나다움의 억압과 해소가 조화로워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추구해야 할것은 작은 조화가 아니라 큰 조화이다. 작은 조화란, 보편적 인간적임을 통하여 인간성과 도덕성을 강요하여 구성원들의 통일을 바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조화는 지속적이지 않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히스테릭하기 때문이다. 나다움은 끊임없이 억압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히스테릭한 주체의 억압된 나다움은 언젠가 폭발과 죽음과 같은 극단적인 방식으로 표출된다. 반대로 큰 조화란, 타인의 나다움을 포용하여 인간적임과 나다움의 줄다리기를 긍정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간적이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행위도, 그것이 나다움을 위한 의지의 표현이라면, 그것의 이질적임에 당혹스러움과 불편함을 느낄 수 있지만, 그것에 무관심이 아닌 긍정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아름다움'의 어원이 '나다움'인 것처럼, 나다움을 조화롭게 추구하는 자들을우리는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자들이라 할 수 있다.그런 사람들을 예술가라 부른다.
<objet a>, 2024
아름다움
살다 보면 마땅히 그럴 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무언가 거부할 수 없는 이유가 있는 것처럼 이루어지는 일들이 있다. 이러한 일들을 운명이라 표현할 수도 있지만, 인연보다 운명은 더욱 필연적이며 무겁고 버거운 주체의 사건으로 느껴진다. 반면에 인연은 관계적인 사건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이것은 타자들과 마주하며 느껴지는 사건이다. 그리고 인연이라 느껴지는 타자들과의 마주함은 우연적임과 동시에 필연적이다. 어떻게 두 가지 상반된 속성이 하나의 의미 안에 포함될 수 있는지, 그리고 우연과 필연은 어떠한 의미를 가지는지, 인연의 속성을 해명하는 것은 너무나 복잡하게 느껴진다.
우연함에는 여러 의미가 담겨 있지만 이것을 크게 세 가지 분류로 나누어 볼 수 있다. 1) 원인이 없음, 2) 목적이 없음, 3) 이유를 아직 모르기 때문에 우연이라 느낌이다. 첫 번째는 작용인의 부재, 두 번째는 목적인의 부재, 세 번째는 무지함을 우연이라 한다. 이에 따라 우연과 대비되는 필연 또한 두 가지 의미로 나누어진다. 1) 원인이 있음, 2) 목적이 있음이다. 현대의 기계론적인 관점에서는 원인이 있지만 목적이 없음을 떠올리기 쉬우며(물론 종교인들은 목적 또한 있다 사유할 수 있다) 이것을 우리는 상식적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에 대해 깊이 사유할수록 우리는 우리의 무지함만을 마주하게 된다. 왜냐하면 원인과 목적을 소급하면 우리는 무언가의 최종근거를 요청하게 되며 이것은 우리가 공유하고 있는 상식과는 달리 매우 형이상학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류 중 그 누구도 최종근거를 경험으로 확신할 수 없으며, 개인은 오로지 안주하는 믿음과 의심하는 새로움만을 마주할 수 있다. 이러한 소급의 끝에서 우리는 거대하며 불확실한 신비만을 느낄 수 있다.
인연의 소급 또한 위와 같이 그 끝에는 신비만이 우리에게 다가온다. 이것은 관계의 신비이다. 인연에서 느껴지는 신비는 인연을 다시는 도래하지 않을 고유한 시간으로 만든다. 그리고 이 유일한 시간은 곧 창조의 시간이다. 관계에서 생성되는 모든 가치들은 이 창조의 시간에서 탄생하는 것이다. 즉, 이것은 역동적인 힘, 지금 여기의 지각, 그리고 모든 단자에 내재된 자기표현의 역량이다. 이러한 창조의 시간, 지금 여기를 자신이 가능한 최선의 방식으로 표현할 때 우리는 타자에게 새로움을 전할 수 있으며, 우리는 그 새로움이 현상과 조화로울 때 그것을 아름답다 느낀다.
사랑은 관계에 신비를 강렬하게 느낄 수 있는 사건이다. 사람들과 사랑을 나누는 것은 불편하면서도, 이것만큼 아름다운 것이 없을지 모르겠다고 느낀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이것에 유용함과 고유성을 이해하면서도 이것에 기뻐하는 법에도, 즐기는 법에도 서투름이 앞선다. 인간의 여정을 새로운 놀이를 찾아 발견하는 과정이라 생각한다면, 나의 걸음마에 맞는 새로운 놀이는 어떤 것 일지 새로움에 대한 기대는 허함과 설렘사이를 오가는 역동적인 갈망을 느끼게 한다. 새로움에 대한 자연스러운 이끌림, 역동적 갈망, 에로스의 인도, 모두 사랑함이라는 같은 의미를 바라보는 표현이다.
사랑을 행한다는 것은 다의적이다. 그럼에도 확실한 것은 그것이 분명하게 표현이라는 것이다. 상대방에 대한 나의 표현이자 나를 둘러싼 세계로 향하는 나다움의 요구이다. 표현함의 기저에는 ‘내가 이곳에 있음’이라는 근본적인 인정의 요구가 있다. 의미는 관계 속에서 생성되기 때문에 개인의 존재방식은 세계와의 상호작용을 통해 실천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사랑이라는 것은 내가 세계 속에서 선택한 대상에게 나다움을 실천함과 동시에 실천함으로써 나다움을 만들어 가는 것이다. 인간의 의식은 반성적으로 작용하여 의식대상으로부터 자신에게 다시 돌아와 정립된다. 하지만 이러한 작용이 일방향적인 실천에 의한 것이라는 얕은 믿음은 이것의 지속가능성에 한계를 그어버린다. 프롬에 따르면 성숙한 사랑은 ‘내가 주고 싶은 방식’ 임과 동시에 ‘상대가 받을 수 있는 방식’으로 표현된다. 그러므로 성숙한 사랑의 실천은 상대의 방식에 맞춰 나다움을 실천하며 상대와 조율하는 참여를 통해 자신을 표현하는 과정이 된다.
누군가가 사랑을 표현할 때 그것이 내가 받을 수 있는 방식이라면, 표현을 인정해 주는 근본적인 공감을 해야 한다. 근본적인 공감이란 상대방의 ‘그저 있음’을 경탄의 자세로 인정해 주는 것이다. 상대방의 ‘그저 있음’을 긍정하며 불안을 걷어내어 자유롭게 나다움을 표현해 줄 수 있는 세계의 도화지가 되어주는 것, 이것이 사랑을 받는다는 것이 아닐까. 사랑을 즐기며 서로를 세계에 표현하는 매개자가 되어 주는 것, 이것이 창조의 시작이지 않을까 싶다.
<objet a>, 2024
사유
1
플라톤은 동굴의 비유를 통해 인간의 무지함과 선의 세계를 밝혔다. 일상을 살아가는 범인들은 동굴 속에 비친 그림자를 실재라 믿으며 그곳에만 머문다. 하지만, 이중 호기심을 가져 지혜를 탐구하는 것을 사랑하는 자들은, 자신의 눈앞에 있는 그림자의 뒤를 돌아보며 그 너머에 질문을 던진다. 이들은 자신이 가진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 점차 밝아지는 빛의 세계로 걸음을 옮긴다. 이 과정에서 그들은 새로운 빛에 의해 고통을 느끼지만, 점차 눈앞이 또렷해져 태양에 의해 비추어지는 참된 세상을 목격하게 된다. 참된 세상을 발견한 지혜로운 이는 동굴 안에 머물러있는 자신의 친구들에게 이 사실을 전하고자 어둠을 헤치며 동굴 속으로 돌아간다. 친구들이 너무나 생소한 그의 주장에 비웃더라도 그는 그들을 사랑하며 끊임없이 진실을 전하려 한다. 플라톤은 이것을 철학자의 사명이라 하였다.
그러나 나는 여기에 새로운 관점을 추가하여 동굴의 비유를 재해석해보고자 한다. 바로 태양을 바라보면 눈은 실명을 한다는 관점이다. 선의 이데아를 모든 것의 가능 근거로서 부동의 원동자라 생각한다면, 현대의 정신분석학적 관점에서 이것은 순수 욕망의 가능 근거로서의 결여(혹은, 포착불가능한 실재)로 이해될 수 있다. 그리고 모든 욕망의 최종적인 완료는 운동의 정지, 즉 죽음이다. 이것이 결여의 완전한 해소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태양을 바라보면 실명을 한다는 사실은 동굴의 비유에서 철학자의 사명에 새로운 고민을 안겨준다. 어떻게 동굴에 수인들에게 죽음에 이를 수 있는 길을 권유할 수 있는가? 그리고 이것이 어떠한 가치를 가지는가? 무엇을 위해 수인들에게 지혜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라 설득할 수 있는가?
철학자는 수인의 곁에서 오랜 시간 고민할 것이다. 그러나 긴 고뇌의 시간이 흘렀을 때 먼저 말을 꺼낸 것은 수인이었다. 수인은 고뇌하는 철학자에게 자신의 고민을 토로한다. 그의 고민은 변함없이 반복되는 이해된 일상의 지루함과모든 것에 끝이 있다는 깊은 허무함이 자신에게 왔을 때 너무나 무력하다는 것이다. 철학자는 수인의 고민을 듣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깨우치며 수인에게 제안한다. “나를 따라오면 내가 ‘새로운’ 것을 알려주겠다.” 그리고는 둘은 함께 뒤를 돌아 동굴밖으로 아주 천천히 나아간다. 수인은 나아가며 처음 마주하는 생생함에 경탄한다. 그는 태양을 바라보고자 하는 것이 아닌, 매 순간의 새로움에 경탄한다.
철학자는 새로움에 대한 사랑이 다른 이들에게 자신이 전할 수 있는 지혜란 것을 깨우친다. 새로움을 사랑하려면 그것을 느끼는 지금 여기를 사랑하라. 새로움을 가능하게 해주는 지나간 것들을 사랑하라. 영원이 아니기에 새로움을 가능하게 해주는 자신의 유한함을 사랑하라. 죽음이 당연한 세계 속에서 그것에 잠시 저항하는 생명의 신비를 축복하라. 그리고 이것들을 행할 수 있는 자신을 사랑하라. 이것을 위해 철학자가 수인의 곁에서 고뇌하던 시간이 바로 지혜를 사랑하는 시간이었던 것이다.
2
우리는 나무를 표현하고자 할 때 ‘나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우리는 왜 ‘나무’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나무를 표현할까? 실제로 밖에 서 있는 나무는 '나무'라는 단어와는 필연적인 관계가 없다. 하지만 우리가 '나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이유는 “나무를 표현할 때에는 ‘나무’라고 칭하자.”라고 사람들 사이에서 약속을 하였기 때문이다. 이렇듯 언어는 암묵적인 약속으로 인하여 사용된다. 타인과의 약속이 없다면 우리는 언어를 사용할 수 없다. 영미권에서는 나무를 ‘tree’라고 표현하기로 약속했기 때문에 한국어를 모르는 그들에게 ‘나무’라고 말하면 의미가 전달되지 않을 것이다. 언어는 암묵적인 상호인정을 통한 기초적인 문화적 장을 형성한다.
이에 우리가 불편함을 느낄 수 있는 점은, 모든 것에 약속을 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이다. 만약에 우리가 걸어오며 보았던 나무를 나중에 만난 친구에게 설명하고자 할 때, 그 나무를 완벽하게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더욱 자세히 묘사하기 위해 “나뭇잎은 초록색, 키는 3M, 몸통은 고동색...” 이렇게 표현을 하여도 우리의 머릿속에 있는 나무를 온전히 전할 수 없다. 이러한 표현을 들은 친구는 우리가 말한 나무가 아닌 자신의 경험 속의 나무들을 상상하며 우리의 말을 이해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상 속에서는 이러한 세밀함을 요구하지 않기 때문에 불편함을 느끼지 못한다. 자연스럽게 대화로 전달되지 않는 나머지 부분들을 개인의 믿음으로 채우며 대상을 이해하기 때문이다. 일상 속의 대화에서 우리는 잠적적인 대상을 가상의 생성을 통하여 공유한다.
그러나 우리는 타인에게 감정을 전하고자 할 때 한계를 느낀다. 감정을 언어로 표현하는 순간 그것은 우리의 감정이 아니게 되어버린다. 그것은 단지 가상을 생성하게 해주는 언어로 표출된 문장이 될 뿐이다. 반대로 타인이 우리에게 감정을 표현하고자 대화를 한다면, 그것이 표현되는 순간 그것이 상대방의 감정 그 자체가 아니라는 사실 또한 우리는 알 수 있다. 깊이 고찰할수록 타인과의 대화가 어려운 행위라 느껴진다. 우리는 표현되지 않는 것들을 어떻게 인지해야 할지 막막하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표현은 모든 것을 대변해 주지 않으며 대화의 근본적인 목적이 아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표현된 것의 해석이 아닌 표현을 나누는 행위이다. 이것은 만남을 통해 새로움을 생성하는 창조적 과정이다. 사건, 감정, 가치, 관계 등등 모든 것이 이 과정에서 탄생한다. 우리에게 내재된 창조적 역량을 실현하는 이 과정을 위해 우리는 소통을 한다. 소통의 목적을 소급하다 보면, 결국 표현과 인정을 통한 자기실현으로 이어지는 것 같다.
타인의 말 그 자체에만 초점을 둔다면 삶 속에서 많은 것들을 지나쳐버릴 것이다. 그러니 언어만을 사랑하지 말자. 상대방이 사랑을 말한다면 그 문장을 사랑하지 말자. 사랑을 표현한 뒤의 잔여감을 사랑하도록 하자.
3
흄의 당구공이 굴러간다. 어떠한 자가 당구공을 당구채로 때려 공을 굴리는 것을 우리가 목격했다면, 우리는 그 장면에서 자연스럽게 그 자가 공을 때렸기에 공을 굴렸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이것은 이상하다. 사실 당구공은 그 자가 아니라 당구채와 접촉하여 움직인 것이며, 당구공의 속력은 당구대의 마찰에 의해 조절된 것이며, 당구공을 때리고자 한 그 사람의 행동은 그 자의 동기가 선행되었기 때문에 행해진 것이라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렇게 여러 가지 요인이 우리가 목격한 장면에 담겨있음에도 불구하고 짧은 순간에 항상 하나의 원인만을 주목한다. 어째서 인간은 다양한 원인들 속에서 하나의 원인에게만 특정한 지위를 부여하는가? 여러 요인을 순차적으로 떠올릴 수 있지만, 이것은 여러 요인을 동시에 목격하는 것이 아닌, 시선을 빠르게 바꿔가며 포착하는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결국 우리는 어떠한 사건을 인식하려 할 때 특정한 하나의 원인만을 박제하여 주목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인과성이 인간의 인식의 한계이자 조건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인과성 없이 어떠한 사건도 파악할 수 없다. 우리가 파악하는 아주 단순한 장면 속에도 자연스럽게 인과성이 전제되어 있다. 인간은 특정한 행위에 원인과 결과를 전제하지 않고서는 무언가를 기술할 수도, 사유할 수도 없다. 그런데 이렇게 전제되는 인과성은 필연적이라 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우리의 인과적 예측이나 해석은 과거에 있었던 사건에 기반하여 현재를 판단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당구공을 치면 굴러간다는 지식이 있기에 눈앞의 사람이 당구공을 쳐 굴렸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지식이 선행되지 않았다면, 어떤 자가 당구공을 쳐도 그 공이 혼자 굴러가는 건지, 아니면 주어진 힘에 비해 과도하게 덜 굴러가는 건지, 혹은 더 굴러간 건지 파악할 수 없다. 인간은 과거에 주어진 버릇적인 지식, 혹은 체화된 지식으로 사건의 인과성을 파악한다. 그러나 과거에 일어났던 일이 똑같이 현재에 재현되는 것은 필연이 아니다. 왜냐하면, 엄밀하게 같은 사건은 있을 수 없을뿐더러 사건에는 항상 예측을 벗어나는 일들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항상 당연하다 생각하는 예측을 전제로 사유하여 인과성을 만들어 행동한다.
세계는 복합적인 지속에 의해 이루어진다. 그러나 유한한 인간은 이를 전부 파악하지 못하여 주관적인 시선만을 포착할 수 있다. 우리는 인과성이 당연하다 생각하지만 사실 이것은 당연한 것이 아닌 인간의 편의를 위한 도구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계 그 자체에 인과성이 전제되지 않는다는 것을 추론할 수 있다. 인과성이라는 도구가 우리에게 주는 유용함은 매우 다양하지만, 이것의 한계 때문에 우리가 놓치는 것들 또한 분명하다. 세계는 시작과 끝을 포착할 수 없이 변화하는 지속이다. 그 지속 속에 유한한 인간은 잠시 머물며 세계에 동참한다. 다른 시선으로 세계를 바라보면, 우리는 세계를 이성적으로 포착하여 이해하려 할 때 보다 오히려 공감하여 느끼며 참여하고자 할 때 더욱 세계를 잘 파악할 수 있다. 이러한 시선이 현대의 지식이 당연한 우리에게 결여된 것이 아닐지 생각해 본다.
4
나이면서 내가 아닌 것, 신체를 어떻게 여기고 있을까? 쾌락을 위해 신체를 홀대하고 있을지 모르겠다. 누워서 유튜브 보기... 멍 때리면서 인스타 피드 넘기기.. 카페인 과다 복용.... 이것들은 무엇을 위한 행동인가? 정신이 무언가에 길들여짐과 동시에, 일상에서 신체의 소외를 느꼈다. 나는 어떤 방식으로 변화하고 있으며, 어떤 것을 무력하게 소비하고 있는 것일까, 혹은 나는 무엇을 어떻게 소외시켰는가?
권태가 두렵기 때문에 소모적인 시간 죽이기를 반복한다. 흘러가는 시간 속에 내가 온전히 표현되지 못하는 감정, 나의 존재가 옅어지는 시간, 권태는 불안하다. 인간은 불안한 채로 세계에 내던져져 있다. 필연적인 죽음이 결정된 채로 세계에 초대된 방문자. 내가 원해서 이곳에 온 것이 아니지만, 이미 와버린 이상 나를 끝내는 죽음은 너무나 두렵고 부담스럽다. 부담스러움을 피해 다른 흥미로운 것들로 시선을 옮겨보지만, 막연한 불안함을 떨치지는 못한다. 불안을 잊으려 충실하게 일상을 보내보려고 하지만, 피로에 지쳐 잠시 숨을 가다듬으려고 할 때 불안은 너무나 쉽게 우리에게 침습해 온다. 세상에 표현되는 자신이 적어지며 옅어짐에 불안하다. 그래서 인간은 불안과 권태를 잊기 위하여 더 쉽고 간편하며 자극적인 것들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오로지 언젠가 마주해야 할 것에게 멀어지기 위해.
신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본 적이 있었을까. 표현도 잘 못하고 수줍음을 많이 타는 순박한 친구. 하지만 항상 나를 도움을 주는 친구. 내가 세계를 인식할 수 있음과 세계에 표현될 수 있음은 오로지 내 신체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항상 무언가를 받아들이거나 표현할 준비가 되어있는 가능성의 집합으로서의 신체. 얼마나 멋진 친구인가! 유한한 한계를 지니며 무한한 가능성을 내포한 신체를 보아라. 우리는 언젠가는 헤어져야 할 이 친구와 함께 소통하며 세계 속에 나다움을 표현한다. 나는 이 친구를 소중히 대하였는가? 이 친구와의 관계가 만족스러운가? 이 친구와 협력하여 나다움을 잘 표현했는가? 질문들을 쫓다 보면 무력한 세계에서 내가 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것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정동
1
눈에서 떨어진 물방울이 가볍지 않다면
가슴으로 내려와 물레방아를 움직일 거예요
돌고 돌아 메여가는 감정이
공어가 되어 나를 때리지 않기를
하지만 가벼이 허공만을 맴돌기를 바라지는 않아요
착실히 내려와 땅에 떨어지는
빗방울이 되어주길 바라요.
2
기분을 환기시키기 위해 거리로 나왔으나 거리의 소란스러움이 남일처럼만 느껴진다. 활기참에 눈길이 멈추면서도 그것을 거리감을 두고 싶은 것으로 취급한다. 그곳의 밝음을 해바라기처럼 눈으로 좇으면서도, 태양을 바라보는 해바라기 뒤 드리워진 그림자의 어두움이 신경 쓰인다. 나의 뒷모습이 누군가의 앞을 가릴까 봐 목뒤를 돌아볼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항상 나의 앞을 가리는 것은 누구의 뒷모습도 아니며, 나의 뒤에는 어떠한 시선의 응시도 없다. 매 순간 새로이 나타나는 반성의 연쇄가 실현되고자 하는 방향을 나는 알 수 없다. 오직 반복적인 의문과 그것의 해소만을 바라는 쾌락원칙 외의 취향을 나는 알 수 없다.
3
아무런 표정 없이 그저 텅 빈 천장을 바라본다. 그곳에 보고자 하는 것이 있는 게 아니다. 그렇다고 보기 싫은 걸 피하고자 한 것 또한 아니다.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다. 그것은 어디에나 있으며, 어디에도 없다. 또한 찾고자 할 때 찾을 수 없으며, 피하고자 할 때 피할 수 없다. 이러한 것들을 깨달았을 때, 이미 우리들은 너무나 많은 것들을 소진해 버린다.
무엇이 우리를 움직이게 하는가? 그것이 쾌의 추구이든, 불쾌로부터의 도피이든, 우리는 단지 그것으로 인해서라고 밖에 표현할 수 없다. 그러므로 그것은 근거이자 조건이다. 그것을 향한 고민은 우울한 사람의 초상과 같은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썩 쾌활한 행색 또한 못 된다. 단지 이렇게 나지막이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을 무언가로 채우려 한들, 그것들은 우리 곁에 잠시 머물 뿐이다. 불변은 희망 섞인 환상이니 가치들 또한 그러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으로 남기 위해 해야만 하는 것들이 있다. 자유와 생명이 그러한 것들이다. 하지만 이러한 것들을 쫓기 위해 우리는 어떠한 것들을 떠내려 보내고 있는가? 이것들을 염려치 않는 것이 의무의 수행이라면, 우리는 우리 아닌 것들을 위한 공범이다. 그러니 이러할 때 뒤틀림을 느끼는 것 또한 자연스러운 결과이다.
공허한 천장이다. 애정을 그토록 바랐지만, 바랐던 것을 애정이라 칭할 수 있는 걸까? 따스함은 눅눅함으로, 설렘은 비이성으로, 인연은 합리성으로, 나귀 앞에 매달린 당근처럼 원하고자 했던 것들이 한순간에 이질적인 것으로 변해버린다. 이것들을 단순히 소비했다고만 표현할 수 있을까? 만일 소비로 인하여 이것들이 무가치 해졌다면, 우리는 소비 이외에 무엇을 추구할 수 있는가?
인간은 모두 공허 앞에 선 단독자이다. 누구나 빠짐없이 그것과 대면하며 살아간다. 인간들을 인도하길 자처하던 하늘의 빛은 희미해져 버린 지 오래이다. 자만인지 모를 부담스러움이 인간들을 자신으로부터 외면하게 만든 걸까. 우리는 그것 앞에서 무엇을 바랄 수 있는가?절벽 앞에서서내뱉을 뿐이다. 오직 평온만... 오직평온만을...
<objet a>, 2024
그 외
1
비평은 대상을 맥락 속에 배치시킨다. 맥락이 생긴다는 것은 특정한 문법이나 규칙에 종속되게 하여 서사성을 가질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비평 이전의 대상인 그것은 맥락과 서사가 부재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대상에 맥락을 부여해 주는 비평을 우리는 가치가 있다 여긴다. 신비를 우리의 눈앞으로 가져와 언어를 부여함을 통해 대화의 대상으로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맥락의 부여는 대상을 정의함으로써 대상의 생명력을 제거해 버린다. 정의되지 않은 신비는 세계의 부분으로써 (유기적인 운동을 가능하게 하는) 생명의 조각들을 지니고 있지만, 우리는 대상과 대화하기 위해 그것을 무엇인가에 종속시켜 박제시켜야만 한다. 그러므로 박제된 하나의 부분에서 우리는 생명을 느낄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의 부분만을 보고 있지 않다. 이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왜냐하면 부분을 바라보는 자신 또한 오로지 맥락 속에서 사유하며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개인은 자신의 기억의 전제됨을 통해 현재를 재해석하는 존재이다. 개인에게 현재는 끊임없는 재해석의 연쇄, 인식의 지속을 통해 발생한다. 나아가 지속의 반복을 통해 부분들의 연관을 밝히는 것, 전제된 기억의 확장을 통해 세계를 인식하는 것, 즉 배움을 통해 지식을 확장시켜 세계에 도달하고자 하는 앎이 곧 자유에 이르는 길이라고 말한 스토아의 가르침은 아마도 이러한 연유에서 탄생한 것이다.
우리가 무언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미 이해된 것이 전제되어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누군가의 비평이 우리에게 대화가능한 언어로 다가오기 위해서는 그 언어가 통용되고 있는 세계의 조명이 필요하다. 따라서 생명의 잔재를 포착하는 비평을 위해서는 위와 같이 세계에 다가가는 앎이 요구된다. 그런데 이러한 앎이 다른 이들이 말하고 있는 비평과 같은 의미인가? 이러한 작업의 책무는 누구에게 주어지고 있는지 의문이다. 무지함으로 인해 세계에 대한 사랑이 부재한 것같이 느껴지는 맥락들을 어떻게 바라볼 수 있을지. 그리고 이러한 것만을 바라는 시선들을 어떻게 세계와 마주 보게 할 수 있을지. 불만족스러운 의문이 쌓여간다.
2
빛과 어둠은 상보적이며 전일성을 나타낸다. 빛은 어둠의 부재를, 어둠은 빛의 부재를 통해 우리는 그 존재를 느낄 수 있다. 이러한 시점에서 '색'이란 금지와 허용의 의미를 가진다. 어둠에 의한 빛의 한정적인 금지, 금지의 잔여물이 제공되는 형식으로써 우리는 색을 목격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색에는 아찔한 에로티시즘이 있다. 제한된 빛만을 향유할 수밖에 없는 금지로서의 '색'. 그 금지를 넘어서서, 태양과 같은 빛 그 자체를 바라보려는 순간 우리에겐 실명, 즉 죽음이 다가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만물의 색들은 모두 빛과의 아찔한 줄타기이다.
3
하얀색이 있다. 하얀색, 순백, 순진, 순결.. 하양보다 순이라는 글자가 더 어울리는 색이 있을지. 순수함은 순수하지 못함의 부정이다. 부정의 부정, 하양은 하양이 아님이 아님이다. 하양은 하양이 아닐 가능성이다. 현실화되지 못한 가능성, 하양은 하양이 아닌 색이 될 가능성이다. 그러므로 색칠하기는 모두 가능성에서 현실화로 이아지는 서사적 칠하기. 모든 색이 자신을 부정한다면, 그 색은 어두워진다. 색들의 부정은 검정이다. 모든 색들은 검정이 될 가능성을 내포한다. 검정은 모든 색들의 마지막 현실화이다. 색들의 완전한 현실화. 안식, 평온과 같은 것들. 돌이킬 방법은 없을까? 덧칠을 하면 된다. 돌아간 것처럼, 언뜻 보기에 가능성이 보인다. 누군가 건드리기 전까지는... 완료가 전제되지 않는다면 진행은 있을 수 없다. 누구에게나 전제된 최종적인 완료는 나와 나 아닌 것의 차이가 사라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