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의 어느 날, 휴대폰 속 오래된 사진첩을 들춰보다 낯선 동영상을 발견했다. 1분 남짓 되는 짧은 영상의 촬영일은 2023년 7월, 장소는 내 방이다. 하얀 커튼 사이로 햇살이 옅게 들어오고 있는 걸 보면 날씨가 맑았나보다. 화면에 보이는 건 CD 노래 가사지를 들고 있는 내 연인의 손. 침대 머리맡에 나란히 누운 우리는 CD플레이어로 밴드 전기뱀장어의 '탠저린'을 듣고 있다. 익숙한 멜로디 속, 카메라는 연인을 잠시 비춘다. "어둠 속에 있군." 나는 대낮인데 어둡게 찍히는 그를 보며 킥킥댄다. 이내 카메라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서서히 이동하며 내 발가락과 방 안을 차례로 비추고 우리는 함께 노래를 부른다. "춤을 추는 탠저린, 너는 나의 탠저린..." 둘의 목소리가 나지막이 울린다.
영상을 보자 찍을 당시의 내 감정과 그때의 분위기가 해일처럼 빠르게 밀려왔다. 사랑하는 사람과 보내는 주말 한낮의 여유로운 한 때. 주중에 머리 아팠던 일은 멀리 밀어 두고 여름휴가는 어디로 갈지, 저녁에는 무얼 나눠 먹을지를 얘기하던 때. 이 사람이 단지 내 옆에서 존재한다는 이유만으로 살아갈 이유가 생기던 때. 익숙한 체취와 온기 속에서 머릿속의 고민과 걱정들은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되던 때. 내 분수에 맞지 않게 너무 행복해서 이 행복이 언젠가 끝나면 어떡하지, 하고 불안해했던 그때. 그때를 떠올리며 나는 깨달았다. 저 때의 나는 죽었구나. 나는 이 사람을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구나.
몇 년 전, 아무 생각 없이 만남을 시작했던 나와 달리 그는 만난 지 몇 달이 지나지 않아 나와 평생을 함께하길 원한다는 얘기를 했다. 나는 애초에 누군가와 평생을 약속할 생각이 그다지 없었던 데다 결혼하자는 말은 연애 초에 흔히들 하는 얘기라 생각했기에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렇게 나는 결혼을 하지 않고도 연애를 지속할 수 있을 것이라 믿고, 그는 내가 결혼을 원하게 될 것이라 믿은 채 만남을 이어갔다. 하지만 그 후 더 많은 시간이 지나 그가 진지하게 다시 물어왔을 때도 나는 확신이 없었고, 의견을 좁힐 수 없는 다른 문제까지 겹쳐 결국 저 영상을 찍고 3개월 후 이별을 겪어야 했다.
둘 중 누구도 원치 않았던 이별이었기에 우리는 바로 헤어질 수가 없었다. 그래서 서로 마음을 정리하기 위해 한 달이라는 시간을 가졌다. 유예기간이었지만 내게는 사형선고였다. 그저 그런 이별만 경험해 봤던 나에게 이런 생이별은 너무 버거웠다. 혼자 있는 곳에서는 매번 눈물을 흘렸다. 집에서는 베개에 얼굴을 묻고 소리를 지르며 울었다. 운전할 때도, 일할 때도, 밥 먹을 때도, 잠을 잘 때도, 아침에 눈을 뜰 때도 고통이 나를 짓눌러 하루종일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출근을 해서 아무렇지 않게 일하려면 인터넷에 눈물 참는 법 따위를 검색해야 했다. 친구들과 오래전 예약해 둔 펜션에 놀러 가서도 술에 잔뜩 취해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찬바람 부는 밖에서 헤어지기 싫다며 전화기를 붙잡고 30분 동안 말도 없이 엉엉 울기만 했다. 다들 이런 이별을 겪으며 멀쩡히 살아간다고? 말도 안 돼.
결국 예정되어 있던 한 달이 지나 우리는 정말로 헤어졌고, 나는 혹독한 겨울을 보냈다. 죽을 것 같이 힘들어서 기억이 다 날아간 건지 자세한 것은 생각나지 않는다. 다만 결혼 문제가 엮여있었고 생각이 매일 바뀌었기에 하루종일 거대하고 감당하기 어려운 감정과 생각들이 머릿속을 헤집었다. 나는 사람이 하루동안 그렇게나 많은 생각을 할 수 있는 존재인지 처음 알았다. 그렇게 터질 것 같은 머리와 퉁퉁 부은 눈으로 두 달 정도를 보냈을 때, 어느 날 문득 이제 괜찮아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땐 나도 머리 아픈 고민 끝에 가족을 만들어도 좋겠다는 쪽으로 생각이 바뀌어 있었다. 그렇게 '이제 정리가 좀 된 것 같은데 아직 미련이 남아있는 상태'일 때 상대방에게서 연락이 왔고, 나는 내 의견이 바뀌었음을 알려주면서 우리는 한 번 더 만나보기로 했다. 혹시 결혼 엔딩이 아닐 수도 있지만 그래도 해 보기로 했다.
그렇게 겨울과 봄이 지나고 다시 여름이 됐다. 사진첩에는 1천 장이 넘는 사진이 또 쌓였다. 그런데 어디 마음이 마음대로 되던가. 그는 여전하고 나를 더 사랑해 주는데 나는 그게 잘 안 됐다. 서로 노력을 정말 많이 했는데, 애써 덜어냈던 마음이 다시 원래대로 돌아오지는 않았다. 헤어지고 힘들어하는 데 마음을 다 써버려서인지, 그전까지 너무 열심히 사랑해서 더 이상 줄 게 안 남은 건지, 계속 고민하느라 진이 빠져서 그랬던 건지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나는 예전의 모습으로 되돌아갈 수가 없었다. 다시 사랑해 보려고 갖은 수를 다 써봤는데 안 됐다. 근데 나는 그걸 못 받아들였다. 그래서 스스로에게 너무 많은 기회를 줬다. 내가 다시 선택한 사람인데 이럴 순 없어, 조금만 더 시간이 지나면 될 거야, 내가 기분이 안 좋아서 그런 걸 거야, 내가 이 사람의 장점을 제대로 못 봐서 그런 거야...
그러던 중 스쳐가는 일상의 한 조각을 담은 그 영상을 보게 된 것이다. 아무 특별한 일 없는 시시한 우리의 모습. 아무 특별한 일 없었어도 영원히 끝나지 않길 바랐던 그때의 모습. 앞으로 더 많은 시간이 지난다 해도 다시는 저런 감정을 느낄 수 없겠구나, 머릿속으로 희미하게 느끼고는 있었지만 물리적으로 확인하고 나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 저번에는 헤어져서 눈물이 났는데 이제는 내 마음이 예전 같지 않아서 눈물이 났다. 게다가 이 관계를 신경 쓰고 내 감정을 검열하는 데 너무 지쳐서 더 이상 노력할 힘이 남아있지 않았다. 사랑한다는 말을 듣고도 머뭇거리는 날들이 계속되었고, 우리는 두 번째 이별을 했다.
함께 듣던 '탠저린'을 이제는 혼자서 듣는다. '두 손을 포개고 함께 춤을 추던 일, 어느새 해가 졌는지 한참을 몰랐던 일...' 가사에 눈시울이 붉어진다. 영상 속 여름날 침대에 누워 나지막이 부르던 노랫소리와, 어느 추운 겨울밤 버스 정류장에서 스파이스 걸스 노래에 맞춰 춤을 추던 우리 모습이 떠오른다. 지나가던 사람이 이상하다는 듯 쳐다보던 것도. 집에서 잠옷 차림으로 추던 우스꽝스러운 춤과, 페스티벌이나 콘서트 공연장에서 손을 잡고 추던 춤도 생각난다. 나는 여전히 생각이 많고, 혼자된 게 무섭고, 미화되는 기억에 내 선택이 맞는지 의심하게 되기도 하지만 으레 이별의 과정이라 생각하며 마음을 다스린다. 단지 다른 사람에게는 보여주지 않는, 오직 서로에게만 보여줄 수 있는 그 모습들을 나눌 수 있었음에 마음 깊이 감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