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사심 채우시네요?" 수업을 마치고 교실을 나오는데 2반 담임선생님께서 의미심장한 미소를 띠며 물으셨다. 2반 영어시간에 아이들과 함께 영국 밴드 킨(Keane)의 노래 <Somewhere only we know>를 부르는 소리를 듣고 하신 말씀이었다. (*나는 영어 교과전담교사를 맡고 있다.) 우리 둘 다 락을 좋아해서 서로의 취향에 대해 잘 알고 있었던 터라, 나는 "아 예, 맞습니다."라며 농담 섞인 미소로 회답했다. 영어수업을 핑계로 아이들에게 내가 좋아하는 노래를 스리슬쩍 영업하고 있던 나는 속마음을 들킨 것 같아 살짝 쑥스러웠지만 뭐 어떤가. 우리는 이번 단원에서 동사의 과거형을 배우고 있고, <Somewhere only we know>에는 과거형 표현이 줄기차게 등장하니 말이다. 노래가사 속 주인공은 walked, knew, felt, sat... 걸었고, 알았고, 느꼈고, 앉았고... 그 노래를 부르는 우리 아이들은 즐거워했다(enjoyed). 물론 나도.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자기가 좋아하는 걸 공유하길 즐긴다. 이 드라마 엄청 재밌으니까 너도 한 번 봐. 그 영화 재밌어, 한 번 봐. 그 노래 진짜 좋더라, 한 번 들어봐. 그 책 정말 재밌어, 한 번 읽어봐. 이런 이야기들을 주고받지만,현란하게 오가는 추천사들은 그 자리를 벗어나면 기억 속에서 홀연히 사라져버릴 확률이 높다. 어른들은 대개 취향이 확고해서 타인의 추천이 끼어들 틈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누군가 흥미로운 콘텐츠를 추천해 준다 해도 쉽게 손이 가지 않는다. 나도 추천받은 드라마를 끝까지 본 경험이 거의 없고 말이다. 그런데 초등학교에 다니는 어린아이들은 좀 다르다. 취향이라고 해봤자 기껏해야 로블록스, 아이돌 가수, 하츄핑 정도? 아직 자기만의 세계가 덜 구축되어 말랑말랑한 그들에게는 끼어들 틈이 무수히 많다. 쉽게 말하면, 순진하고 만만한 영업상대라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약 8년간의 교직생활동안 아이들에게 은근슬쩍 무수히 많은 것들을 영업했더랬다. 작게는 시험 문제에 좋아하는 연예인 이름을 넣는 것부터 시작해서, 내가 재미있게 했던 활동들을 학생들과 함께 하는 것으로까지 이어졌다. 책을 읽을 때는 책 내용을 아이들에게 슬쩍 들려준다. "선생님이 요즘 읽고 있는 책이 있는데..."하고 운을 떼면, 아침 독서 시간 내내 멍 때리는 아이들도 "책 제목이 뭐예요?"하고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묻는다. 역사 관련 책을 읽고 나면 사회시간 역사 단원에서 해당 부분을 읽어준다. 아이들은 수업시간에 배운 내용이 책에서 등장하는 걸 듣고는 눈을 반짝인다. 실제로 에세이, 소설, 인문학 등 내가 읽은 책을 똑같이 따라 사서 읽었다는 아이들이 꽤 있었다. 그거 어른들한테도 어려운 책인데.. 어쨌든, 영업 성공!
손 편지를 써서 우체통으로 보내는 데 몰입해 있던 시절에는 아날로그의 손맛과 답장 기다리는 짜릿함을 영업한 적도 있다. 3학년 국어 시간 편지 쓰기 단원을 공부할 때 아이들과 함께 '우체통 살리기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계시던 작가님께 편지를 썼다. 안전상의 문제로 우체통에 편지를 넣는 건 나 혼자 했지만, 작가님께서 30명 가까이 되는 아이들에게 일일이 써주신 답장과 함께 직접 그린 그림이 담긴 엽서를 보내주셔서 다 함께 큰 감동을 받았었다. 당시 답장을 받고 기뻐서 어쩔 줄 몰라했던 꼬맹이들이 지금도 기억할지는 모르겠지만, 그때의 영업은 이달의 영업사원으로 등극할 만한 대성공의 기억으로 나에게 남아있다.
이 외에도 화실에 다니며 수채화를 배웠을 때는 미술 시간에 수채화를 상세히 가르치며 종이에 색을 입히는 재미를 영업하고, 사진을 배웠을 때는 카메라로 찍은 아이들의 사진을 엽서로 만들어 선물하면서 사진의 의미를 알려주었다. 음악 시간에는 대학교 때 풍물 동아리에서 활동했던 경험을 살려 소고를 치며 교실 안을 뱅뱅 돌면서 풍물놀이의 재미를 간접적으로 체험시켜주기도 하고, 무형문화재분들께 탈춤을 배웠던 썰을 들려주며 전통 음악의 아름다움과 재미를 알려주었다. 아이들이 내 기대와 달리 딱히 흥미를 못 느끼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지만 일기장에 오늘 수업이 재미있었다고 쓰거나 쉬는 시간에 나에게 쪼르르 달려와 다음에 또 하자고 조르면 나는 가슴속이 환해진다. 얘들아, 너희도 해 보니까 재밌지? 그렇지?
뭐니 뭐니 해도 가장 짜릿한 영업은 내가 좋아하는 노래를 들려주는 것이다. 담임을 맡을 때는 새 학기 첫날, 낯선 교실에 발을 들일 아이들의 긴장을 풀어주기 위해 노래를 틀어둔다. 나는 개학 며칠 전부터 좋아하는 노래 중 잔잔하고 산뜻하며 가사가 건전한 노래를 골라 사심 가득한 플레이리스트를 만든다. 그렇게 엄선된 노래를 틀어두면 이렇게 묻는 학생들이 꼭 있다. "선생님, 지금 나오는 노래 제목이 뭐예요?" 뿌듯해진 나는 올라가는 입꼬리를 애써 감추며 속으로 외친다. 아싸, 영업 성공!
국어책에 비에 관한 쓸쓸한 시가 나왔을 때는 에픽하이의 <우산>을 들려줬다. 도덕시간에 진정한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생각해 볼 때는 샤이니의 <아름다워>를 들었다. 사랑에 대해 배울 때는 9와 숫자들의 <그대만 보였네>를 들었고, 청각장애와 수어에 대해 알아볼 때는 BTS의 <Permission to dance>를 들었다. 한글날에는 악동뮤지션의 <가나다같이>를 함께 불렀고, 영어 시간에 길 찾기를 배울 때는 찰리 푸스의 <Left right left>를, 소유격을 배울 때는 제이슨 므라즈의 <I'm yours>를 들려줬다. 미래를 나타내는 표현을 배울 때는 위저의 <Island in the sun>과 보이즈 라이크 걸스의 <The great escape>를 들었다. 신규교사 시절 학생들이 쓴 1년 마무리 소감을 읽다가, 국어시간에 에픽하이의 우산을 들었던 게 가장 기억에 남는다는 글을 보았을 때의 짜릿함이란.
지금 영어시간에 가르치고 있는 <Somewhere only we know>는 2004년에 발매된 곡이라 아이들이 모를 것이라 생각했는데, 첫 소절이 나오자마자 들어본 적 있는 노래라는 듯 "아~" 하는 탄성이 들렸다. 이 정도면 영업 중 절반은 성공한 것. 게다가 노래를 처음 들려줄 때는 규모가 큰 페스티벌 공연 영상을 보여주어 전 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그 노래를 즐기고 목청껏 따라 부르는 모습을 함께 본다. 이런 건 보기에도 재밌지만 노래를 배우고 싶다는 마음이 더 커지게 만들고, 무엇보다 락 페스티벌이라는 문화에 대한 호기심도 불러일으킨다. 나는 이렇게 수업시간에 내가 좋아하는 밴드, 노래, 페스티벌까지 3종을 모두 영업한다. 수업인 척 하지만 사실 선생님의 사심이 가득 담긴 선곡, 그러나 진짜로 훌륭한 노래인 데다 덤으로 자연스레 익히게 되는 동사의 과거형까지! 이 정도면 아이들에게도 남는 장사 아닌가. 우하하. 아이들은 본인들도 모르는 새 옥장판을 샀다는 사실을 미처 알지 못한 채 "오 심플 띵~" 하며 <Somewhere only we know>의 후렴구를 흥얼거리고, 빨리 노래를 부르자며 나를 재촉한다. 선생님의 집에는 이 노래가 담긴 CD가 있고, 매년 가을만 되면 그 CD를 듣는다는 사실을 여러분들은 모르시겠죠. 나는 몰래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는다.
겸직이 금지된 교사들에게 나라가 허락한 유일한 마약... 아니 유일한 영업은 이렇게 은밀하게 이루어진다. 운동, 그림책, 놀이, 사진, 음악, 미술, 경제, 코딩 등 많은 교사들이 몰래몰래 옥장판을 팔고, 많은 학생들이 자기도 모르게 다양한 콘텐츠에 스며드는 듯하다. 이쯤 되니 '다음 단원에서는 무얼 가르칠까?'가 아닌 '무얼 팔아볼까?' 하고 생각하게 되는 요즘이다. 나도 학교를 다니면서 영업당했던 것들이 있는지 찬찬히 떠올려보니 중학교 3학년 때 CA 부서 중 '미국드라마 감상부'에 들어갔던 게 기억난다. 지금 다시 보니 너무 대놓고 사심 가득한 부서 아닌가요 선생님? 그런데 선생님 덕분에 제가 미드에 빠져서 영어 듣기 실력이 많이 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아, 이렇듯 학교는 모든 교사들에게 합법적인 영업의 장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