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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성화 Sep 22. 2022

무지라는 능력

 ‘연애의 참견’이라는 프로가 있다. 연애 사연을 받아 드라마로 재구성, 패널끼리 그에 대한 토론 및 참견을 한다. 절대적으로 아르바이트 자리를 필요로 하고 가장 현명한 결정을 매번 내릴 수 있어야 하며 점차 똑똑해져 갈 수밖에 없는 머리 놀림의 역사를 아는 사람과, 애인이 아르바이트하는 자리에 친구들을 많이 데려오면 이득인 줄 알며 국가장학금에 대해서는 알 필요가 없었던 사람의 이야기가 방영되었던 적이 있다. 쟤네들 대학교 졸업하면 서로 접점도 없어, 더 연애 못해, 헤어져라 헤어져, 하며 참견을 덧붙였던 기억.


 무지라는 능력을 갖출 수 없다는 것은 스타벅스 아메리카노와 빽다방의 앗메리카노가 가진 정서적 만족감의 차이를 알아버리는 것. 앞에 앉은 친구가 항상 커피를 남기는 버릇이 있는지 없는지 인지할 수밖에 없도록 여유를 적게 가진 것. 테이블 건너편의 그는 능력 있어 보이나 나는 아니라면, 그 관계는 앞으로 어떻게 운영해 나가야 할지 난항에 빠지기 마련이다.


 외국어를 쓰는 여행지에서의 바보 같은 웃음이 갖는 특별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대충 괜찮은 뜻이겠지, 대충 매력적인 사람이네 하는 그런 웃음. 온 세상을 대충 눈웃음짓고 흐리게 볼 수 있는 어떤 여유에 의해서 그렇다. 모를 수 있으면 건강해 보일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어느 정도 몰라야 아름다워 보일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그러나 그 건강과 아름다움은 멸균된 것일 수도 있다. 추함 속에서 독하게 살아남은 연꽃의 형상과는 좀 다른 온실 속의 무언가일 수도 있다.


 내가 온실 속에서 유리창에 코를 처박고 바깥을 지켜봐 온 종족이라서인지, 그래서 나는 그 추함을 아는 사람을 동경한다. 따뜻함 속에서 고작 장미 가시에 긁힌 상처 몇 개를 치료했으면서, 세균에 감염될 위험이 없었고 주치의의 유난한 돌봄 속에서 살아왔으면서 대단한 걸 해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좀 유치하지 않나. 그런 사람이 스스로 밑바닥에서부터 올라왔다던지 하는 말을 내뱉는다면 그것은 매일 주어진 따뜻한 상차림에 대한 모독일 테니까.


 다시 돌아와서, 추함을 아는 사람. 안전바가 없는 롤러코스터 같은 인생을 단단하고 경직된 얼굴을 하고 버텨낸 그런 사람. 바이러스의 창궐을 맨몸으로 맞고 고열에 시달리다가도 그것도 결국은 지나간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 입술에 그 어떤 불평도 불만이 없어 온실 세계인들을 불편하게 하지 않는 사람. 아니 어쩌면 세계에 저항함이 쓸모없다는 생각에 다다라버린 사람.


 하긴 그런 사람은 많지 않다. 왜냐. 인지에의 능력자로서 거듭나려면 가장 필요한 것은 딱 죽지 않을 만큼의 고난과 그 이상의 일들을 피할 수 있는 운이다. 그게 없으면 우리의 인지 영역 바깥에서 그들은 소리소문없이 사라졌을 테니까.


 땅을 밟고 있어도 하늘을 본다는 말이 참 의아하다. 그리고 순수한 동시에 현명하다는 말을 좋아한다. 그런 글귀들과 잘 어울리는, 인지의 잔인함을 견뎌낸 사람과 인생의 팀전을 꾸려나가는 것이 내 소망이다. 그리고 다음 소망은 아무래도 그와 낳은 2세들이 대학에 가겠다고 할 때 학자금대출을 받지 않아도 될 수 있게 해주고 싶은 것 정도, 그정도다.


 어떤 사람이 어느 정도의 능력자일까 궁금하다면, ‘당신은 금수저세요?’ 하는 질문을 던져보기를. ‘아... 잘 모르겠는데’라는 대답이 돌아온다면 그의 능력은 거의 초능력에 가까운 것이니 눈여겨보아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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