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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친절한 래교 Aug 17. 2023

인맥을 얻었지만 자신감을 잃었다.

영국에 도착하고 2주 후.. 2022년 8월 초, 처음 우리의 보금자리로 이사를 했다. 물론 컨테어너 짐은 아직 도착할 기미가 없었고.. (6월에 보낸 컨테이너는 10월 중순 도착 ;;) 이민가방에 가져온 살림살이가 전부인 채로 2층 단독 집으로 이사를 들어갔다. 하지만 커다란 집에 덩그러니 사람 4명만 들어가니.. 말할 때마다 동굴처럼 울리고 집이 집이 아닌 느낌.. 거주지가 있어야 꼭 안정이 되는 게 아니라는 걸 주재원 이사를 준비하면서 처음 느꼈다. 되는대로 자는 게 아니라 잘 자리에 잠을 자야 하고 있어야 할 물건이 제자리에 있어야 그게 집 다운 집이었다. 내 몸 하나 들어갈 공간이 있는 것만으로는 일상의 안정감을 찾긴 어려웠다. 물론 한국이 아니라 외국이라는 점도 분명 작용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한국에서도 영국으로 출발하기 2달 전 컨테이너로 짐을 다 보냈고 텅텅 빈, 때로는 필요한 물건이 없는 채로 2달을 한국에서 보냈었다. 그 당시 모든 게 급격하게 변화는 나의 상황을 받아들이기엔.. 나이 40 넘게 먹었어도 매우 벅찼었다. 그래서 배부린 소리인 줄 알면서도 집 마저 내 마음 둘 곳이 없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고 그렇게 타국에서 한없이 서러워졌다.

텅텅 빈 거실







나의 서러운 마음을 겨우 달래준 것은 영국의 날씨였다. 비의 나라라고 알고 있었지만 내가 도착한 7월 말의 영국 날씨는 환상적이었다. 타들어갈 것 같은 뜨거운 햇살에 당황했지만 그늘로 들어가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선선한 바람이 불고 쾌적함으로 기분이 좋아지는 날씨, 하늘이 이렇게 높았었나.. 싶을 정도로 높고 높은 파란 하늘, 구름 위에 또 다른 세상이 펼쳐질 것 만 같은 그림 같은 구름들, 어디에서나 나를 반겨주는 듯한 초록초록 식물들과 다양한 꽃들. 여름의 영국 하늘을 보고 있자면 내셔널갤러리, 테이트 브리튼의 명화들이 괜히 나온 게 아니라는 걸 단박에 알 수 있다.

우리 집 정원에서 본 하늘










그렇게 화창한 어느 여름날, 우연히 만나게 된 옆집 M 그녀는 나에게 매우 다정하게 말을 건넸다. 나의 영어 실력으로는 그 자리를 도망쳐야 마땅하지만 사람과의 교류를 워낙 좋아하고 도전하길 좋아하는 나의 성향상 영국 정착 초기에는 일단 부딪쳤다. 번역기를 사용할 수밖에 없었는데 무턱대고 번역기를 들이밀면 실례일 듯해서 그동안 외국인 만나면 써먹으려고 달달 외운 “ l’m not good at english. I use translator.”을 떨린 마음으로 말한 뒤 번역기를 사용했었다. M은 나에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며, 말을 했지만 나에겐 매우 문제가 되었다. 그녀는 영어로 말하고 나는 번역기를 사용하고.. 무엇이 문제이냐고? 그녀가 말하는 영어를 알아들을 수가 없었던 난감한 상황… 결국 나는 온몸의 감각을 귀로 초초초집중한 결과 Lady, Dinner,  September 단어를 알아 들었고 대충 눈치껏 9월 모임에 초대하고 싶다고 알아 들었다. 아니 영국 문화가 이렇게 개방적인가? 개인적이고 폐쇄적이라 들었는데.. 만나자마자 우리 가족을 자기 집으로 초대한다고?? 우선 고맙다. 알겠다. 나는 원한다.라고 대충 대답한 뒤 남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 옆집 M이 우리 가족을 자기 집으로 초대한대!! 여보가 얼른 정확한 날짜를 물어봐” 호기롭게 말했는데.. 알고 보니 9월 우리 동네 여자들 모임에 초대한다는 말이었다. 하하하 분명 Lady라고 들었는데 왜 가족 초대라고 내 맘대로 알아들은 거지? 뭐.. 초대한다는 말은 알아 들었으니 절반은 성공이다! 그렇게 혼자 자축 아닌 자축을 하며, 스스로에게 용기를 북돋았다.











운명의 그날! 남편에게 칼퇴하라고 신신당부한 날! 그리고 영국 와서 처음으로 혼자 저녁에 외출한 날! 나는 겁도 없이 영어의 두려움보다 새로운 모임에 나간다는 설렘이 더 컸었다. 남편은 나에게 ‘정말 너는 대단해. 나 같으면 절대 그 모임 안 나갔을 텐데.. 너의 영어 실력으로 모임을 나가다니..’ 라며, 혀를 끌끌 찼지만 나는 뭐 어떻게든 되겠지. 번역기 쓰고 손짓발짓하면 다 될 거야. 한국에서 다들 나의 성격이라면 충분히 잘 지낼 거라는 말을 믿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게 그리 설레는 일이었을까? 정말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이 괜히 있는 말이 아닌듯 하다.


분위기 좋은 영국 레스토랑에서 만난 동네 언니들. 15명 정도 모였는데 유일한 동양인은 나 홀로. 게다가 자리를 잘못 앉는 바람에 제일 가운데 상석에 앉게 됐다. 이건 아닌데.. 찰나 생각했지만 이미 나가지도 들어가지도 못하는 상황이 되어버린 상황. 그렇게 처음부터 꼬였던 모임 2시간 내내 진땀 한 바가지를 흘렸다.  늘 쥐 죽은 듯이 조용한 공간에서 숨소리까지 죽여가며, 온 신경을 집중해도 단어 몇 개 들리는 게 고작인데... 레스토랑 음악과 다른 테이블의 일상적인 소음, 그리고 그녀들의 엄청난 말의 속도를 듣고 있자니 나는 누구며, 내가 여기 왜 있으며, 뭐 하고 있는 건가.. 하는 생각에 머리가 핑핑 돌았다. 도저히 맨 정신으로 이곳에 있을 수가 없어서 두통으로 끊었던 샴페인을 마구 마시기 시작했는데 내가 몇 잔을 마셨을까? 영어 때문에 어지러운 건지 술기운에 어지러운 건지 구분이 안 될 때쯤 번역기를 꺼내 들고 옆에 있는 언니들과 대화를 하기 시작했다. (역시 술은 고마운 친구다)








그때 생각보다 많은 인맥이 생겼다. 바로 앞에 앉은 M과(모임에 초대해 준 분) 그 옆에 앉은 L은 우리 아이들에게 관심을 보였고 알고 보니 그 두 분은 학교 선생님이었다. 적응하기 힘든 첫째 아이가 숙제할 때마다 눈물을 흘린다고 하니(어미 마음 찢어짐 ㅠㅠ) 선뜻 도와주겠다며, 그 뒤로 일주일 2번씩 우리 아이들 숙제를 봐주게 되었다. 그리고 대각선으로 멀리 앉아 있어서 대화를 할 수 없었던 A는 핸드폰을 건너 건너 번역된 내용을 나에게 보여줬는데 내용은 즉, 자기 아들과 같은 학교를 다녔던 아이 중 한국엄마가 있는데 소개해줄까? 하는 내용이었다. 대박!! 영국 온 뒤로 한국사람을 만날 일이 없었는데.. 그래서 말할 사람이 없어 입에 거미줄 치고 살았는데.. 한국사람을 소개해준다니!! 순간 눈물이 나올 뻔했다. 격하게 고맙다고 꼭 소개해달라고 했고 그 뒤. H 언니를 소개받아 지금은 소울메이트 언니가 되었다. ( 이 언니 덕에 한국인 로열아카데미 출신 음악선생님, 한국인 수학선생님 등을 소개받고 당야 한 영국살이 팁도 전수받았다. ) 그리고 내 옆에 앉아 있던 언니는 (알고 보니 나보다 10살 동생) 나에게 호감을 보이며, 대화를 하기 위해 천천히 쉬운 단어로 이야기를 해주었다.(감동쓰)

급 웃겼던 일은 갑자기 내 나이를 물어보길래 41살이라고 하니 진심으로 화들짝 놀래면서 주변 언니들에게 어쩌고 저쩌고 말하는데.. 다들 나를 보며 ' oh my god' 하고 깜짝 놀랐었다. 이게 뭔 상황인가.. 취했던 술이 깰 만큼 나도 찐 당황;; 그들은 나를 둘러싸고 skin 어쩌고 저쩌고 Forty one 어쩌고 저쩌고 하는 말을 듣자 하니.. 나이 비해 피부가 너무 좋다는 말을 하는 거 같았다. 한 마디로 동안이라는 말!! 한국에서는 안 먹혔는데.. 여기 오니 동안이라고 먹히네~ 이 언니들 고맙게ㅋㅋ 그렇게 웃픈 추억까지 생겼지만 이날의 가장 놀라운 점은 위에 모든 대화를 파파고에 의존했다는 사실 ;;;;;


번역기 없으면 절대 안돼!!! 하지만 맞는 말인지.. 제대로 전달되었는지 알 수가 없음. (이상하게 번역될 때가 있어 한국어, 영어를 왔다 갔다 하며 확인도 함)













남편 말대로 영어 못 한다고 기죽어서 이 모임에 나가지 않았더라면.. 나는 제대로 번역이 안 되는 번역기를 붙잡고 매번 아이들 숙제로 골머리 썩었을 것이며, 아는 한국사람 한 명도 없이 더더 외로이 지냈을 것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날 나는 더 처철하게 깨졌다. 그날 모임에서 말 못하는 나를 가운데 두고 양쪽에서 끊임없이 대화하는 상황이 꽤 있었다. 말을 걸 수도 없고 끼어들 수도 없는 민폐 상황. 그런 상황에 기분 좋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굳이 이렇게까지 사람을 가운데 두고 대화를 해야 하나? 내가 자리를 옮겨야 하나? 등등 별별 생각이 다 들었지만 결론적으로 나를 두고 둘이 대화 한 언니들이 이상한 게 아니라 말을 못 하면서 그 모임에 호기롭게 나간 내가 이상한 거였다. 핸드폰이 없었으면 대화는 거의 진행 불가능 했고 나와 대화를 나눈 사람들은 핸드폰으로 대화를 하는 바람에 대화의 맥이 끊길 수밖에 없었다. 대화란 자고로 티키타카가 맞아야하는데 핸드폰 타이핑이 웬 말인가. 원하든 원치 않든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낄끼빠빠를 모르는 민폐녀가 되었다. 그 뒤로 무식하면 용감해선 안된다는 생각이 처음 들었고 더더욱 외국인 만남이 어렵게 느껴져서 잘 가던 채러티샵과 다른 가게들까지 방문하는 게 꺼려졌다. 그날 인맥을 얻었지만 자신감을 잃었다. 그리고 나의 마음의 상처는 춥고 고독한 영국의 겨울날씨처럼 꽤 길게 나를 파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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