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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민우 Mar 23. 2024

세번째 컷

전봇대 너머로

 가로등을 찍은 이후 난 전봇대와 가로등이란 전부 찍고 다녔다. 그러다 필름 가격이 아까워서 돌아다니다 마음에 드는 물체만 찍겠다고 생각이 들었고, 그 물체는 전봇대에서 소방시설, 건물, 골목 등으로 확장되었다. 그리고 마음에 드는 컷이 나오면 방에 줄을 고정시키고 거기다 사진들을 걸었다. 아버지는 "참 취미 참 고약하네. 사람 좀 찍으라 사람 좀. 방이 왜 이렇게 음산하냐." 하긴 쓰레기통 사진이 있는 방을 좋아하는 사람은 딱히 없을 것이다. 그래도 아랑곳않고 계속 그런 서글픈 도시의 소리를 뿜어내는 사진들을 찍었다. 그 사진기는 흑백이였기에 더더욱 그 소리를 잘 담아냈다.


 어느 날은 아버지와 같이 전포를 걸을 때였다. 아버지는 평소에 중년답지 않은 멀끔한 인상을 가지고 계셨는데, 갑자기 나에게 임무를 주셨다. "진우야, 네가 사람을 찍는다면 내가 필름 하나 사줄게. 예쁜 사람이면 두개. 어때?" 난 자리에 멈칫 서서 "아부지, 넘 힘든 거 아닙니꺼."  "와? 니 평소에 그렇게 뺀질나게 여자 번호 따면서 그거 하나 못하나. 하, 기다려 봐라. 집 갖다가 나오자." 아버지는 그렇게 날 집에 데리고 가시더니 셔츠와 슬랙스, 그리고 블레이저를 주셨다. 그리고 내 머리를 깔끔하게 빚어주시더니, "자 이러면 사진가스럽제?" "아부지, 넘 옛날 스타일 아닙니꺼. 그냥 제 옷 입고 맙니다." "그랴? 그럼 나가자." 난 머리를 다시 풀고 길거리로 아버지와 같이 나갔다.


 전포 길거리에는 커플들이 많았다. 커플들이 많았다... 난 심술이 나 그냥 내 돈으로 필름을 살까 고민했다. 입이 삐뚤어져 아버지 옆에 서니 아부지는 한숨을 푹 내셨다. "마, 진우야. 근처 카페나 함 들어가자. 다리 아푸다." 그렇게 난 아버지와 같이 사잇길 위쪽의 한 유명한 카페에 들어갔다. 안은 사람으로 북쩍 거렸는데 우리는 창가 자리에 앉아 말없이 커피나 휘적거렸다. "진우야. 좀 용기 좀 가져봐라. 그거 하나 찍는다고 싫어할 사람 어딨겠노. 그냥 번호따듯이 물어삐라." "아니, 번호랑 이건 다른 거 아닙니꺼. 아부지는 대체 어무니하고 어떻게 결혼하셨는지 이정도면 의문입니더." "내는 마, 사진으로 번호 땄다고. 딱 예쁘다고 하고 사진으로...."


 그때, 한 여자가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필름 카메라를 흘깃 보면서 머뭇거리고 있었는데, 이때다 싶어 아버지는 그 여성 분에게 말을 걸었다. "혹시 카메라 한 번 보실렵니꺼?" "아. 그래도 돼요?" 그리고 그 여자는 조심스레 카메라를 만지더니 감탄을 하며 아버지께 말을 걸었다. "이거, 단종된 모델인데 어떻게 구하셨어요?" "현역으로 샀지예. 젊었을 적에 제 돈 다 끌어 모아서 산겁니더. 혹시 사진 관심있으십니까." 그러자 그 여자는 자기가 사진학과라고 밝히면서 이런 희귀한 카메라는 처음 본다고 말했다. 그때 내가 쓰는 카메라가 꽤나 비싸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아버지와 그 젊은 여자는 계속 말을 나눴는데, 나는 관심이 없어 커피나 휘적거리고 있었다. 그러다 그 여자의 친구로 보이는 사람이 다가와서 그 여자를 데리고 가려 하는 찰나, "진우야. 이때다. 빨리 사람 찍으라. 예쁘시구만. 사진 하나 찍어드려." 나는 아버지의 재촉에 못 이겨 사진기를 받고 "실례지만, 한 컷 찍어드릴까요?"라고 여쭤보았다. 그러자 사진학과는 기뻐했고 그 친구는 약간 벙찌더니 "...그럼 테이블에서 앉아있는 걸로 찍어주실 수 있으실까요?"라고 했다. 난 기꺼이 그러겠다며 발을 옮겼고 포즈를 취해달라 했다. 사진학과 여자는 너스레를 떠며 우린 자연스럽게 이야기나 나누자고 했고 난 그 광경을 한 컷 찍었다. 사진은 인화되었고 난 그녀들에게 사진을 보여주었다. 사진학과 여자는 보물을 받은 것 마냥 기뻐했고 그 친구는 유심히 보다가 감사하다며 고개를 꾸벅한 다음 사진을 받았다. 난 애초에 가질 생각이 없었기에 그냥 드렸고 아버지는 흡족한 미소로 나를 보았다. 그게 내 세번째 컷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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