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라는 영화가 있다. 우리에게 익숙한 홍콩배우 양자경이 주연한 판타지 영화인데, 작년에 개봉하며 전 세계적으로 큰 흥행한 영화다.(국내에서 10월에 재개봉한다니 그 인기가 아직도 식지 않은 듯하다.)
이 영화의 매력은 아주 평범한 가족 영화에 멀티버스라는 판타지 요소를 가미해 영화적 상상력과 스케일을 무한히 확장했다는 것이다. 무척 재미있고 미친 듯 황당하면서도 메시지가 묵직한 영화였는데, 이 영화에서 특히 흥미로웠던 것은 누군가의 삶이 선택의 기로에 설 때마다 각각의 선택대로 여러 갈래의 삶이 만들어진다는 점이었다. 아주 오래전 TV프로, 이휘재의 “그래 결정했어!”로 유명한 '인생극장'을 생각해 보면 쉽다. 그 프로에서도 삶의 기로에서 선택에 따라 두 갈래의 각기 다른 인생이 각각 펼쳐진다.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에서는 더 나아가 선택 가능한 수만큼 여러 갈래의 인생이 만들어지고 각각의 인생이 진행되다가 또 다른 선택의 기로에 서면 또 다른 인생들이 파생된다. 이렇게 한 사람의 인생이 수많은 가지치기를 통해 수많은 우주, 멀티버스를 만들어 낸다는 것이 이 영화의 세계관이다.
나도 이 영화의 세계관을 살짝 빌려와 보려 한다. 이모가 선택하지 않은 인생이 다른 우주에서 이어지고 있다면, 어떤 모습일까? 상상은 자유니까, 이모의 또 다른 선택들이 만들어 낼 수 있었던 멀티버스, 그 속의 이모를 한번 상상해 본다.
어린 시절 “공부를 조금만 열심히 하면 참 잘할 아이.”라는 선생님의 말을 한 귀로 흘려듣고 친구들과 어울려 노는 것에 빠져 지내는 이모를 상상해 본다. 학교는 그저 친구들과 어울려 노는 곳, 계집애가 맨날 쏘다닌다는 할머니와 엄마의 구박을 받으면서도 명랑하게 지내는 이모. 어쩌면 어린 시절 대부분의 평범한 학생의 모습일 것이다. 이모의 두 여동생들이 바로 그런 학생들이었으므로 그녀들의 삶을 따라가면 멀티버스 속 큰 이모의 인생도 상상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이모보다 6살 어린 작은 이모는 학창 시절, 절(寺)에 열심히 다녔다. 외조부모님의 종교가 불교이기는 했지만, 다른 형제자매는 아무도 다니지 않았는데 혼자만 열심히 다녔던 것을 보면 작은 이모 스스로 불교에 관심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녀는 꾸미기를 좋아하는 멋쟁이였으며 친구가 많은 발랄한 학생이었다. 작은 이모는 절에서 청년부 활동을 하며 미래의 남편이 될 남자 친구를 만났다. 이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결혼을 해 아들을 하나 낳았고, 시부모님의 병시중을 오랫동안 들었으며 자식은 외아들 하나만 두었지만 손주 복이 많아 아들 내외의 4남매를 돌보며 지내신다.
큰 이모의 막내 여동생인 우리 엄마의 삶도 비슷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가진 것이라고는 젊음 밖에 없는 남자와 결혼해 슬하 삼 남매를 두었다. 남편이 퇴직을 하고, 사업을 하다가 접고, 또다시 사업을 했다가 망하고... 수많은 고비를 거쳤지만 그래도 세 남매 중 둘은 결혼을 해서 손주를 둘 보았고 무릎 연골이 다 닳고 관절염을 앓아도 아직 솔로인 막내아들과 5살 손주를 돌보며 작고 소소한 행복으로 하루하루 지내신다.
큰 이모가 평범한 학생이었더라면, 아마도 두 자매와 비슷한 삶을 살지 않았을까?
우리 엄마나 작은 이모처럼 결혼해 아이를 하나나 둘 정도 낳고 우울이라는 파도가 가끔 밀려들더라고 가족이라는 돛에 의지한 채 지내실지도 모른다. 안정적인 가정을 꾸려 가족의 지원을 받으며 우울증 치료를 꾸준히 해 나가셨을지도 모른다.
이모가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대학에 진학했다면 어땠을까? 고등학교를 좋은 성적으로 마쳤으니 대학 진학에서도 장학혜택을 받을 수 있지 않았을까? 혹은 등록금을 빌려서라도 진학할 수 있었을 것이다. 생각할수록 안타깝다. 이모가 조금 더 세상을 알았다면, 주변에서 이모에게 진학에 대한 정보를 줄 사람이 있었더라면, 이모가 좀 더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원하는 것을 쟁취하는 성격이었다면 방법을 찾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모는 공부는 잘했지만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스스로의 길을 개척할 만큼 독립적이지는 못했다. 그건 이모만의 책임은 아니었다. 그 시대에(어쩌면 지금도) 가족문화와 사회 분위기 속에 여성들이 자기의 욕구를 드러내고 스스로 길을 개척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모가 대학에 갔다면? 한 분야에 정통한 학자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학창 시절 공부에 그토록 집착했던 모습을 생각하면 아마도 자신의 분야를 강박적으로 파고들었을 것이다. 세상과 자신을 분리하고 도도하게 혼자만의 길을 걸었을지도 모른다. 그랬다면 아마 내 기억 속 다정한 이모의 모습은 존재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또 세 자매의 끈끈한 우애와 사랑도 없었을지 모르겠다.
이모가 간호대학에 입학했더라면 어땠을까? 종교에 대한 질문에 교회에 다닌다고 거짓말을 해서 합격했더라면? 하나에 몰두하는 성격이었기 때문에 간호대학에 가서도 공부를 잘했을 것 같다. 간호사라는 직업을 갖는 건 엄두가 나지 않았을 수도 있지만 어쨌든 다시 공부에 매진해 3년이라는 시간을 바쁘게 보냈을 것이다. 이모는 간호사가 되는 것에 걱정이 많았겠지만 동료들과 함께 공부하고 그 길을 향해 찬찬히 걸어갈 시간적 여유가 있었다면 진짜 간호사가 되었을 수 있다. 아이 같은 마음으로 조카들과 어울려 놀고 웃었던 것을 생각하면 소아과 간호사가 되어 재능을 마음껏 펼쳤을지도 모른다.
나는 몇 년 전 아이가 열 감기를 앓아 동네 가정의학과 병원을 일주일 넘게 드나들었다. 열이 올랐다 떨어졌다를 반복했는데도 병원 의사는 태평한 얼굴로 같은 처방만 내려줬었다. 육아 경험이 미천했던 나는 그저 선생님이 하라는 대로 약을 먹이고 병원만 열심히 오고 갔다. 그런데 그 병원의 나이가 지긋한 간호사선생님이 나를 불러 세웠다. 그녀는 갑자기 목소리를 낮추더니 아무래도 열이 너무 오래가니 여기 말고 큰 병원에 가보라는 거였다. 그 선생님의 말에 부랴부랴 대학병원에 갔고 아이가 단순 열감기가 아니라 모세기관지염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더 지체했으면 폐렴으로 진행되었을 것이었다. 모두 연륜과 관심으로 아이를 보아준 간호사 선생님 덕분이었다. 만약 이모가 간호대학에 갔더라면 내가 만난 그분처럼 보호자의 기억에 남는 특별한 선생님이 될 수도 있지 않았을까? 간호사가 되었다면 자신의 병도 객관적으로 보고 치료할 수 있지 않았을까?
다만 이모가 우울증을 무시하고 일본에 건너갔더라면 어땠을까를 상상하는 것은 좀 어렵다. 아마도 이 시나리오는 더 큰 비극으로 치달았을 수도 있다. 언젠가는 터질 폭탄을 짊어진 채 새로운 환경에서 오는 극심한 스트레스를 이모가 견뎌낼 수 있었을까? 그곳에서는 도움을 청하기가 더 어려웠을 것이다. 어쩌면 이모는 의심 많은 모텔주인을 만나지 못해 생을 마감했을지도 모른다. 이 부분에서는 나의 상상력도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한다.
상상력! 어쩌면 이모의 삶에 필요한 것은 상상력이었을 수도 있다. 이모에게 주어진 환경과 상황을 뛰어넘어 선택하고 행동하는 것은 상상조차 힘들었던 것 같다. 이것은 개인의 능력 탓이 아니라 사회적 배경 때문이었다. 개인의 상상력은 그가 속한 집단이 기대하는 모습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이모에게 대학생이 되는 상상, 간호사가 되는 상상, 일본에 가서 생활하는 상상이 가능했다면 그녀는 자신의 삶을 다른 방향으로 이끌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하지 못했다. 가족의 기대를 벗어나는, 자신에게 주어진 제한된 삶을 벗어나는 상상을.... 환경이 만들어낸 한계를 뛰어넘는 인물은 어느 시대나 흔하지 않다.
첫 번째 자살기도가 미수로 끝났지만 이모의 삶이 그 사건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이모의 가슴에 남아있는 죽음의 불씨가 점점 자라나 암세포가 됐을지도 모른다. 이모의 삶을 무엇 하나로 규정할 순 없을 것이다. 이후 이모의 삶은 분명 크고 작은 행복과 웃음으로 채워졌지만 그 작은 불안의 불씨 역시 꺼지지 않고 여전히 남아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