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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홍희 Dec 18. 2021

돈이 좋습니다.

그렇다고 돈독 오른 건 아님

전 돈이 좋습니다. 20대부터 80대까지 10년 단위로 목표를 세웠는데, 20대부터 50대까지는 현업에서 쉬지 않고 일하는 겁니다. 왜 50대까지냐, 60살에는 이탈리아 볼로냐 대학교에서 기호학을 박사까지 따기 위해 출국해야 하거든요. 70살부터는 책을 쓰고 강의 비슷한 걸 하다가 80살에 죽는 게 목표입니다. 물론 토요일마다 하는 첼로 연습 때, 되도 않는 스스로의 실력에 악에 받친 채 악보를 거칠게 넘기다 베인 손가락이 감염되어 일요일에 죽을 수도 있죠. (그렇다면 범인은 J. S. 바흐입니다.) 아니면 매우 당황한 채 81살 생일을 맞이할 수도 있습니다. 


혹은 진짜 당황한 채 101살 생일을 맞을 수도


왜 돈이 좋다는 이야기를 하다가 54년도 더 남은 81번째 생일 이야기를 하게 되었는지 모르겠는데, 어쨌든 전 돈이 좋습니다. 한국인은 삼세번이니 한 번 더 말하자면, 전 돈이 좋습니다. 딱히 어디에 쓰는 건 아닙니다. 꽤나 여러 번 말한 듯 싶은데 제 한 달 옷값은 3만 원이고요, 그마저도 작년엔 한 벌도 안 샀습니다. 갓-디즈의 복지로 사내 카페에서 아메리카노를 1,000원에 마실 수 있는데 진심으로 아까워서 스낵바의 에스프레소 머신에서 내려 마십니다. 올해 8월 말에 친구가 에어컨을 선물해 주기 전까지 전셋집에서 에어컨 없이 여름을 두 번 지냈습니다. 동향이라 아침 6시 30분이면 36도까지 오르더군요. (이 수학적 대칭이라니, 어찌 경이로운 지구라 말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한겨울에도 난방 대신 이불 두 채를 덮고 자고요. 요즘 입고 다니는 무스탕 같은 떡볶이 코트는 20살 겨울에 선물 받은 겁니다.


그렇다고 이런 옷은 아님


그럼에도 돈이 좋은 건 취향입니다. 존경하는 후배가 선물한 노란색 라미 만년필을 좋아하고, 소스 없는 샐러드를 좋아하면서도 분기에 한 번은 먼지 같은 월급을 털어 - 좋아한다 했지 많다고는 안 함 - 제법 괜찮다는 밥을 먹어보는 것처럼요. 그래서 59살까지 현업에서 쉬지 않고 일을 할 겁니다. 또 해야 하겠죠, 좋아하는 걸 많이 모을 수 있으니까.


그래서 법과 도의, 선의와 양심 그리고 도리를 어기지 않고 제 일이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며, 정서적으로 또 정신적으로 발전할 수 있고,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달성해야 하는 기본적인 기준들을 채우도록 도우면서도, 80살까지 살겠다는 목표 이외에 설정한 다른 많은 삶의 목표들을 달성할 수 있는 일이라면 최대한 많이 할 겁니다. (의외로 별로 없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퍼뜩 스쳐 지나간다면 기분 탓이겠죠?)


돈 좋다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주변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 노란색 라미 만년필을 선물한 후배가 그러더라고요. 자기 친구들에게 제 이야기를 많이 한다고요. 1,000원이 아까워서 공짜 커피를 내려 마신다고 욕한 걸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이야깃거리가 되는 사람이 돈을 좋아한다면 후배도 그 친구들도 돈에 조금 더 관심이 생기지 않을까 기도해 봅니다.


라미 만년필 후배랑 286793840953년 만에 만난 날


그러다 보면 일에도 조금 욕심을 낼 수 있고 야근을 무조건적으로 미워하지 않을 수도 있겠고, 어쩌다 주식을 (아, 이건 말려야 하나…?) 아니면 펀드를 하게 될지도 몰라요. 경매나 부동산에 관심이 생길 수도 있겠고요. 제가 모르는 돈의 파이프라인을 설계한다면 가장 좋겠네요. 나한테 알려주면 더할 나위 없겠다.


그러다 보면 경제력이 생기겠고 그러다 보면 60살에 대학에서 공부하고 70살에 강의하는 사람이 꿈이 될 수도 있겠죠. 또 그러다 보면 생각지도 못하게 사회에 꽤나 오래 남아 활개를 치고 다녀야 할 겁니다. 사라지지 않고 남아 준다면 ‘80살까지 살겠다는 목표 이외에 설정한 다른 많은 삶의 목표들’ 중 하나는 달성한 셈이 됩니다.


어쨌든 결론은, 돈이 좋습니다. 그걸 벌어다 주는 일도 좋고요. 근데 이건 다음 주에 있는 90분 짜리 외부 강의 자료 준비를 정말 너무 하기 싫어서 한 번의 퇴고도 안 하고 썼습니다. 사람이 이렇게 복잡합니다. 2021년의 제 목표는 갓-디즈를 대표하는 에디터가 되는 것이었는데요. 100% 달성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년에도 같은 목표로 좋아하는 돈을 열심히 벌겠습니다. 놀랍게도 새해 다짐 글이며 0부터 9까지 모든 수를 원없이 써본 첫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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