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시 마사히코 '단편적인 것의 사회학'
녹슨 쇠창살
손때가 얼룩덜룩한 유리 창문
"스페인 가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게 뭐야?"
이 주간의 스페인 여행을 마치고 한국에서 만난 친구 p가 물었다. 톨레도 대성당, 스페인 광장, 열정의 플라멩코... 를 제치고 어이없게 제일 먼저 떠오른 건 창문, 아주 오래돼서 녹이 슬어버린 창문이었다. 오랫동안 눌어붙은 스티커 자국이 덧칠되어 있고, 햇빛 가리개로 썼을 신문지가 선명한 활자를 잃어버린 지 오래된 톨레도 어느 골목집 유리창문. 그 앞을 감싸고 있는 쇠창살은 녹이 슬고 굳어 오돌토돌 붉은 쇠가 훤히 드러나 있었다. 톨레도의 대단한 역사 유적도 아닌, 여행 중에 창문이 와장창 깨지는 극적인 경험을 품은 것도 아닌, 어느 대단한 서사에도 포함되지 않았던 오래된 창문. 그게 기억에 남았다.
"왜?"
2주 내내 스페인 여행하면서 기억에 남는 게 창문이라니, 재차 묻는 p의 질문에 갑자기 한 장면이 불쑥 튀어나왔다. 스페인 여행한 지 3일째. 한참 유럽풍 골목이 아름다워 내비게이션이 가리키는 방향을 우회해서라도 골목골목을 탐방하고 다니던 참이었다. 대단한 유적보단 관광지와 상관없이 돌아가는 톨레도의 일상에 잠시 녹아들고 싶었다. 그렇게 들어선 한 아무개 골목. 건너편엔 한 스페인 젊은 부부가 유모차를 끌고 걸어오고 있었다. 저 사람들도 결혼한 지 얼마 안 됐나 봐, 서로 알아듣지 못할 언어들을 뿜어내며 가까워지고 있는 찰나 "푹!!" 머리 위에서 정체불명의 비닐봉지 하나가 떨어졌다.
이게 뭐야! 놀라서 위를 쳐다보는 우리와는 다르게 딱히 놀라지도 않고 봉지를 주워 드는 남자의 얼굴. 옆에서 재밌다는 듯 웃음 짓는 여자의 얼굴을 보니 봉지를 투척한 이는 그들의 가족이 아닐까 짐작할 뿐이었다. 4층 높이쯤 되는 집에서 나이가 지긋한 중년 여성은 알아듣지 못할 스페인어로 봉지를 가리켰고 남자는 봉지만 쳐다보고 무심하게 대꾸했다. 아마 저 중년 여성은 아들의 엄마겠군. 아들 부부가 놓고 간 무언가를 던져줬던 거구나.
그렇게 스페인 부부와 우린 눈 하나 마주치지 않고 서로를 지나쳤다. 그때 지나친 오래된 건물 일층 유리 창문엔 빛바랜 피노키오 그림 하나가 붙어있었다. 언제부터 붙어있었는지도 모를 만큼 거미줄을 잔뜩 품은 채. 모래 먼지를 한 겹 먹은 유리 창문이 바람에 삐걱거렸다.
"그래서 스페인 유리 창문이 생각나."
p는 어깨를 으쓱하곤 더 이상 질문을 하지 않았다.
이란인지 아라크인지에 관해 이야기를 하다가 지쿠시 데쓰야가 "그곳의 부상자가"하고 말했을 때 야마노 유키치가 작은 소리로 "부산자?" 하고 말했다. 지쿠니 데쓰야는 "아니 부상자가 말입니다" 했고, "아, 네" 하는 흐름으로 그다음 이야기가 이어졌다. (p. 18, 인생은 단편적인 것이 모여 이루어진다)
이 세계 도처에 굴러다니는 무의미한 단편에 대해, 또는 그러한 단편이 모여 이 세계가 이루어져 있다는 것에 대해, 나아가 그러한 세계에서 다른 누군가와 이어져 있다는 것에 대해 생각나는 대로 적어 보고자 한다. (p.13, 머리말)
사회학자 기시 마사히코의 책 <단편적인 것의 사회학>에선 무의미하고 단편적이지만 세계 곳곳에서 굴러다니고 있는 것들에 주목한다. 제목이 주는 중후한 (사회) 학문적 느낌은 잠시 접어달라. 작가는 '주목'이라는 거창한 단어를 사용하기도 미미한 생활의 단편들을 모아 '사회학'이라는 거대한 담론에 넣을 생각은 딱히 없어 보인다. 그저 구술 작업을 하면서 들었던 무용한 것들, '분석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 찬찬히 나열한다. 사회학자로서 실격이 될지도 모를 일에 대담하게 한 걸음 걸어간 기시 마사히코의 책은 그래서 더더욱, 책장을 덮지 못하게 만든다.
"이런 무의미한 길가의 돌멩이가 나를 만나 어떤 의미를 이뤘고 결국 사회가 이렇게 변했습니다!"와 같은 웅변식 기승전결을 이뤘다면 다시 고이 접어 책장에 꽂아뒀을지 모를 일이다. 다만 작가는 진득하게 말한다. "누구에게도 숨겨 놓지 않았지만, 누구의 눈에도 보이지 않는 것"이 세상에서 꾸준하게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예를 들면 "화단에 아무렇지도 않게 놓인 화분"이나 "톨레도 오래된 유리 창문" 같은 것들. 쓸모를 찾거나 서사를 찾는다면 존재를 드러낼 기회가 마땅찮겠지만 아무튼 어딘가에서 생활을 꾸려나가는 것들의 세계를 담았다. '꾸려 나간다는'말이 다소 적극적이라면 그저 가만히 생활 텃밭을 '차지하고 있다'쯤으로 이해해도 되겠다.
기시 마사히코는 '인터넷 중독'이라 아무도 들리지 않는 오래된 블로그를 찾아 자주 들어간다. "이혼하고 살이 쪄서 싸구려 호스트바 밖에 갈 수 없어"라던지 "오-대박!" 한 달에 한 번쯤 올라오는 맥도널드 후기가 전부인 오래된 누군가의 블로그. 의미를 찾을 순 없지만 언제나 거기 있는 방대하고 단편적인 서사 앞에서 작가는 아름다움마저 느낀다. 세상은 어이없게도 영화나 드라마 같이 웅장하고 이미 있는 서사보단 "아무 일도 아닌 것 같은 아무 일"로 가득 채워진 채 돌아가고 있다. 번 -아웃. 어쩌면 늘 곁에 있는 단편적인 서사마저 의미 있는 일로 둔갑시키기 위해 우린 지나치게 애쓰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작가가 '구술'을 기초로 작업하지 않았다면 아마 일상적이고 단편적인 것들의 무의미함을 그냥 지나쳤을지도 모를 일이다. '사회학'을 전공하지 않았다면 어디에도 묶이지 못할 이야기들을 발판 삼아 삶을 논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동안 진득하게 사회학을 팠고 서술했고 꾸준하게 말했기에 자신 있게 무의미 그대로를 말할 수 있었으리라.
평범하고자 하는 의지
이것이어야 말로 '평범함'이다. 그것에 대해 아무것도 경험하지 않고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 평범한 보통사람이다. (p. 166, 평범하고자 하는 의지)
책의 후반부에서는 앞에서보단 좀 더 진하게 작가의 사회 철학을 녹여냈다. 개인적으로는 좀 더 힘주어 읽느라 책장을 덮고 자주 생각에 잠겼던 부분이다. 작가는 여러 소주제를 통해 평소 '평범하게' 지니고 있던 말들과 기준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배제된 사람들을 꾸준하게 언급한다.
이 와중에 '자연스럽게 배제하는'이라는 말에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의지 없이 '배제'라는 말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해 잠시 생각에 잠겼다. '자연스러운 배제'에서는 무기력하지만 끊을 수 없는 끈질긴 힘이 느껴졌다. 돌이켜보면 성소수자, 장애인, 여성에 대한 수많은 언급 사이에서 상대적인 사람들(이성애자, 비장애인, 비000와 같이 부르는 명칭도 다소 어색한)은 힘주어 자신의 삶과 조건에 대해 반추하지 않아도 됐다. 부르는 명칭마저 어색해서 맞는지 검색해 볼 정도니까. 자연스럽게 배제됐기에 기를 쓰고 존재를 알려야 하는 "딱지 붙은"이들의 생활은 어쩌면 처음부터 '평범하지' 못하게 설계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사회는 다수를 소비해야 돌아갈 수 있으니까, 그렇게 믿으니까.
'소수'는 사회가 만들어놓은 설계에서 자연스럽게 벗어나 있기에 개척도 본인이 감당할 몫이 된다. 존재의 기로에 서있는 소수자들에게 개인의 단편적 서사는 꿈같은 이야기일지도.
"생일 축하해" "결혼 축하해" 따위의 소소한 말들에서도 '행복'의 기준을 단단하게 세우는 작업이 아닐까. '행복'에서 벗어나 길을 잃은 자들에게 의도치않게 우리가 가하는 폭력은? 작가가 던지는 질문 속에서 번번이 펀치를 맞고 책을 덮었다.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평범의 울타리에 올라타 있는 무미건조한 내가 보였다. 책장을 넘기기 쉽지 않았지만 그대로 접어 책꽂이에 넣어두고 싶지 않았다. 어떻게든 대답은 하고 싶었기에.
누구도 누구에게도 손가락질받지 않는, 평온하고 평화로운 세계, 자기가 누군지 망각한 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세계, 그것은 우리 사회가 꾸는 꿈이다. (p.170, 평범하고자 하는 의지)
아무도 없는 곳에서
쓰러진 나무는 어떤 소리를 냈을까?
신선한 질문이었다. 고개를 돌리면 고개 뒤편에 있을 세계에 대해. 대단하지 않아서 보지 않았던 일들에 대해. 어중간하게 평범해서 따로 알지 못한 이들에 대해. 무의미가 이루는 방대한 아름다움에 대해. 이 책은 꾸준하게 이야기를 들려준다. "요령부득인 데다 똑 떨어지는 답도 없는 흐리터분한 책이지만 읽어주시면 좋겠습니다." 작가의 부탁처럼 '똑 떨어지지 않아서' 계속 읽을 수밖에 없는 책이다.(매력이 있단 뜻이다)
부디, 누구에게나 평범이 가닿을 수 있는 세상이 오길.
꾸준하게 '인생 책'이라고 말해줬던 동료 k 덕분에 이 책을 다시 꺼내볼 수 있었다.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