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리의 감각, 극단적이지 않아도 우린 함께 할 수 있다
불편한 생각에 노출되지 않을 권리
한 주간지에서 발견한 낯선 권리 하나. 단숨에 읽히지 않는 말이었다. 한 호흡 정도는 끊어내야만 제대로 읽을 수 있었는데 다소 번역체 같은 말투 앞에서 어색함이 감돌았다. 불편한 생각에, 노출되면 안 되는 권리라.
'권리' 라면 능동적으로 나아가 볼 법도 한데 '불편한 생각에 노출되지 않을'을 덧붙이니 다소 방어적으로 보인다. 마치 이 권리는 앞에 있는 네가 먼저 지켜줘야 내 권리를 지킬 수 있다고 말하는 듯하다. 내 권리의 조타석을 남이 차지하고 있는 듯 한 느낌이랄까. 최대한 수동적이면서도 해석에 따라 어마어마한 능동성을 가지고 있는 이 권리는 전 세계적으로 유행 중이다. 아니 유행이라고 표현하기엔 시간이 흘러도 옅어질 것 같진 않으니 앞으로 정착한다고 봐도 될까. 낯설게만 느껴지는 이 권리 위에서 우리는 지금 애매한 줄다리기를 하는 중이다.
‘불편한 생각에 노출되지 않을 권리’를 주장하는 학생들은 한국에서만 등장한 기현상이 아니다. 미국 사회심리학자 조너선 하이트와 변호사 그레그 루키아 높은 책 〈나쁜 교육〉에서 “이른바 ‘공격적인’ 생각에 노출되면 안 된다는 견해가 캠퍼스에서 대세를 이루고 있다”라고 썼다. 10대 초반부터 SNS를 즐겨온 ‘i 세대’가 대학생이 되면서 문제가 심화됐다는 게 책의 분석이다. SNS와 스크린 이용 시간, 부모의 과보호, 학교의 관료주의적 규제 따위를 문제의 원인으로 꼽았다.
권리를 되뇔수록 누군가를 향해 선포하는 느낌이 강했는데 기사를 읽어 내려가면서 확신이 들었다. 강한 어투와 주장, 듣기 싫은 성희롱에 끊임없이 노출될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 상대적인 약자층에 들어있던 사람, 맞다. 이 권리는 학생으로부터 출발했다. 점점 확장되어 가는 이 권리를 통해 학생들은 '불편하지 않을 수업권'을 주장한다. 수업의 전체적인 맥락도 중요하지만 일부 수업 내용에 등장하는 매체나 용어에서 불쾌한 내용을 사전 차단하겠다는 이야기다. 이를테면 로스쿨 교수들이 수업 중 사용하는 '음란물 판례'도 지나치게 느껴진다면 조정을 요구할 수 있다. 학교 교육에서 특정 단어가 불쾌하다 느껴지면 쓰지 않도록 조정할 수도 있다.(그동안 조정을 할 수 없었던 게 아니라 하지 못하는, 할 엄두가 안나는 사회적 분위기가 압도적이었기에 지금과는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학창 시절, 성희롱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었던 일부 교사들을 생각해보면 학생들의 권리 주장이 남일 같지는 않다. 한 편으론 반갑기까지 하다. 이참에 교단에서 이런 성희롱 요소들을 죄다 밖으로 쫓아내버리는 것도 한 방법일 수 있겠다. 들을 수도 없고, 제대로 항의하지도 못한 채 고개만 돌려야 했을 수많은 학생들을 위해. 언젠가는 해석되어야 할 '자유의 권리'의 또 다른 구체적인 얼굴일 테다.
다만, '불편함'은 어디까지일까.
우린 어디까지 나아가야 할까.
폭발하듯 뿜어져 나올 권리 사이에서 대치할 사회적 합의는 어디쯤에 머물러야할까.
늦지않게 살펴보아야 할 질문들이 있다.
저자들은 일례로 미국 브라운 대학에 생긴 ‘안전공간’을 소개했다. 2015년 이 학교에서는 페미니스트 작가 두 명이 ‘강간 문화(책은 ‘사회에 팽배한 태도로 인해 성적 공격이나 학대가 일상적이고 하찮은 일로 여겨지는 현상’이라고 정의한다)’에 대해 토론회를 열었다. 이 토론회에서 한 사람은 미국이 강간 문화 아래에 있다고, 다른 쪽은 그렇지 않다고 주장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몇몇 학생은 강간 문화가 아니라는 입장의 연사를 학교에서 보는 것만으로 “감정 격발”이 생길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마음의 평정을 찾을 수 있도록 쿠키, 담요, 강아지 영상 따위가 준비된 방을 마련했다. 이 안전공간을 찾아온 학생은 토론회에서 “제가 소중하게 꽉 붙들고 있던 믿음이 상충하는 견해에 거침없이 폭격당하는 기분”을 느꼈다고 호소했다.
불편함이 성희롱에서 성교육까지 넓어진다면.
'성'으로 확장된다면.
'여자'와 '남자'로 나눠진다면.
'비'소수자와 소수자로 싹둑 잘라버린다면.
그저 불편만을 위한 불편이 돼버린다면.
'불편함'은 여느 때와 같이 보편적인 지지를 받을 수 있을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의문들만 가득 안았다. 앞으로 해결해야 할 숙제는 산더미다.
바야흐로 '극혐'의 시대가 오지 않았나.
싫어요에서 좀 더 강력한, 비판 보단 좀 더 편한, 비난 보단 본능적인 편가름을 위해 우린 '혐오'를 선택했다. 혐오에서도 모자라 '극 혐오'의 시대로 접어드는 이 순간. 내 사람이 아니면 상대의 이야기 조차 들어주지 않는 고치들이 점점 단단해져만 간다. '불편한 생각에 노출되지 않을 권리'도 안전의 위협에서 출발했다. '혐오'도 마찬가지, 둘은 시작이 닮았다. 안전하기 위해 우린 얼마든지 움츠려 들 수 있다. 누가 나무랄 순 없는 영역이다.
다만 '권리'만큼은 극으로 가지 않았으면 한다. 끝으로 몰고 가 하나의 세계를 실종되게 하진 않았으면. 존재가 멸종되는 일은 있어선 안 된다. 권리의 감각, 극단적이지 않아도 맹숭맹숭해 보여도 우린 함께 할 수 있다. 함께 살아갈 수 있다.
안전할 권리는 무겁다. 하지만 의미가 확장된 안전을, 현존하는 신체 위협을 제거하듯 보호해야 한다는 주장을 따라가다 보면 기이한 풍경에 닿는 때가 있다. 급진적 페미니스트 교사는 성 비위로 직장을 잃고, 아이비리그 학생들은 유아가 된다. 법적 여성은 여대에 가지 못한다.
기사의 마지막 문단이 무겁게만 다가온다.
* 2020.03.03. 시사인 '페미니스트 교사가 성희롱 멍에 쓰기까지' 기사에서 일부 발췌
'극혐'이 교실을 판치고 있었던 한 때. '극혐'을 입에 달고 다니던 한 친구를 불러 물었다.
"왜 쟤를 '극-혐'씩이나 하는 거야?"
"그냥요"
"왜?"
"그냥 싫으니까요"
"왜"와 "그냥"의 실랑이는 끝이 없었고 '극혐'은 이후에도 특별한 원동력 없이 끈질기게 살아남았다. 이유는 없다. 그냥 싫으니까 싫은 거다. 혐오하니까 혐오하는 거고. 혐오가 죽여버린 많은 언어들에 대한 항변은 어디에도 없다. 내 편 아니면 들어주지 않는 세상, 바야흐로 '극혐'의 시간에 우린 도달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