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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인 Mar 30. 2020

세상이 네모인데 당신도 네모입니까

희정 '퀴어는 당신 옆에서 일하고 있다'


"제가 남중 남고를 나왔잖아요"


모임을 하던 중 동료 p가 덧붙인다. '남중, 남고'는 대화 주제와 아무 상관이 없었다. 갑자기 끼어든 p의 고백이 혼란스러웠다. 남자만 입학할 수 있는 중학교, 고등학교. 남자 남자. 내가 알던 p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말이었다. 갑자기 우리 사이 훅 들어온 문장은 너무 명징하고 친절했다.


'여중 여고 나왔잖아요 제가'

내게 맞춰 바꿔본다면 아무도 관심 갖지 않을 말이었다. 나에겐 아무런 힘이 없는 문장은 p 입에서 나오는 순간 돌덩이가 되어 떨어졌다.


나는 열렬히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p가 은근히 건넨 말에 무례한 눈 맞춤을 하지 않도록 당장 고개를 들지 않는 일. p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이란 고작 그것뿐이었다. 고운 목소리와 머리 길이 따위로 성을 분류했던 내 무신경을 탓하며. p가 마지막 쐐기를 박기 전에야 비로소 알아차렸다.


"제가 트랜스젠더잖아요."


마늘의 정체성은 트랜스젠더라는 용어만으론 설명될 수 없다. 마늘은 자신을 특정한 성별(남자 아니면 여자)로 규정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트랜스젠더라고 말한다. 세상이 유일하게 알아듣는 언어이기 때문이다. 마늘은 세상이 알아듣는 만큼이라도 자신을 표현한다.( p.48, 패싱: 거짓 혹은 진실)


p는 트랜스젠더였다. '세상이 유일하게 알아듣는 언어'로는 그렇다. 그저 책 읽기를 즐겨하는 사려 깊은 사람이라고만 생각했다. 작은 시골마을에서 생계를 이어나가고 어린 시절에 울음이 많았던 사람. 깊게 파인 울음의 이유를 뒤늦게야 알아차렸다. 어쩌면 그 앞에서 고개 숙인 난 p가 겪은 멍청한 '세상'의 일부였을지도 모르겠다. 모른 척 고개 숙일 의지만 갖고 있는.


"내가 퀴어라는 걸 사람들이 모르잖아요.

그게 차별이죠"


한 달째 장바구니에 담겨있던 책 뒤편에는 이런 말이 담겨있었다. 왜 미리 네가 누군지 알려주지 않았느냐 묻는다면 알리고 나서도 고단해 보였던 p의 모습이 답이었을 테다. 당당함을 요구하는 것, 개인에게 감당을 전가하는 것. '차별'이란 단어가 좀 더 굵게 보이는 불편을 느끼며 서둘러 책을 주문했다.


모욕 면접, 꾸밈 노동, 블라인드 테스트,
유리천장, 어린 여자, 정규직, 공정, n포 세대


비장한 마음으로 선택한 책은 생각보다 '퀴어하진' 않았다. '퀴어'는 이제 뜻(이상한, 색다른)을 넘어선 존재 그 자체가 되었음을 알았다. 지은이가 선정한 몇 가지 주제들은 '퀴어'기에 겪는 일들만은 아니었다. 책엔 '청년의 노동'이 있었다. 직장에서의 차별들, 일상에 녹아든 고정된 젠더 역할, 공정의 부재, 청년으로서 짊어진 책무들. 접점은 씁쓸하게도 좋은 점보단 고통으로부터 생겼다.


지은이는 말한다.

"이 책의 '저들'에게 던진 질문 역시 새롭지 않을지 모른다. 바라는 것은 참신함이 아니다. 그들에게 건넨 질문이 '우리'에게 되돌아오길 바랄 뿐이다."


책은 '저들과 이들'이 겪은 고단함의 접점을 거슬러 올라가 '우리의 노동'에 대해 알려준다. 너무 일상이 돼버린 불편이 다시 거스러미를 일으킬 수 있도록. 잘못된 걸 잘못됐다 마주할 수 있도록.


애인 있어요? 그런데 왜 그러고 살아? 임신과 출산 예정이신가요? 결혼은 언제 할 거야? 남자가 말이야, 여자는 원래.


일부의 잘못된 언사로 치부된 불편은 '저들'의 입을 통해 사회 구조적 문제로 확장시킨다.

기업은 노동의 지위를 낮추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을 모색해왔다.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대로 저임금만이 노동자의 지위를 낮추는 게 아니다. 통제가 필요하다. 규율을 강화하고, 수동성('까라면 까는')을 강조한다. 이 모든 방편이 '먹히려면' 고용이 불안해야 한다. 일자리를 잃을지 모른다는 불안은 순응을 강화시킨다.


다만 책은 '저들도 우리랑 똑같이 평범한 고민을 하고 있다' 정도에서 멈추지 않는다. 책은 집요하게 상기시킨다. 고작 고통마저도 배제된 이들이 존재한다는 걸. 그들은 고통 앞에서 똑같은 질문을 받는다.


"그런데, 당신은 누군가요?"


내가 누군지, 왜 '특이하게' 살아가고 있는지. 여차하면 '세상이 알아듣는 언어(트랜스젠더, 게이, 레즈비언 등)' 정도로 함축하면서 설명해야 한다. p의 '남중 남고'도 숱하게 지나야 했을 질문에 이골이 나버린 대답이었을 거다. 남들이 알아듣는 언어로 재빨리 선점해버리면 다음 관문을 다소 쉽고 허무하게 빠져나갈 수 있으니까.


수많은 관문을 통과해봤자 그들에게 사회는 '보통의 청년'과 같이 아프냐고 묻지 않는다. 먼저 '이상함'에 대해 훈수 둘 게 많기 때문이다. 그들은 사회가 기대하는 '청년'의 몸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아픔마저 배제된다.


그들은 살기 위해 결국 '패싱'을 선택한다. 존재를 드러내지 않는 패싱.

바이섹슈얼인 미리는 잘리지 않기 위해, 임금을 떼이지 않기 위해, 안전하기 위해 '패싱'한다. 패싱이란 지나치는 일이다. 누구도 가던 걸음을 멈춰 뒤돌아보지 않도록, '그들처럼'보이는 일. 미리는 남녀가 짝을 이루는 것이 '정상'이라는 사회에서 '평범'을 행세한다. 간단히 말해, 남자만 좋아하는 척 군다. 내 옆에 성소수자가 있을 리 없다는 사람들의 믿음이 미리의 위장을 돕는다.(p.32, 키워드 1 모욕 면접)


정상을 연극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그들 앞에 가장 절실하게 놓여 있는 건 '생계'다. 여자, 남자, 이성애, 동성애 모든 걸 차치하더라도 우선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일을 하고 돈을 벌어야 하지만 그들에게 주어진 일자리는 거의 전무하다. 그들은 '퀴어'임을 숨겨야만 고용될 수 있었다. 자본은 처음부터 쓸모를 위한 몸만을 원했다. 추가 비용을 높이고 계산식을 어지럽히는 퀴어의 몸을 받아줄 자본과 기업이 있을 리 없다.


존재를 밝히면 감당해야 할 장벽이 수도 없이 높아진다. 여차하면 도망갈 수 있게 프리터(아르바이트로 생계유지)를 하거나, 아예 블라인드 처리된 일(콜센터)을 찾아다니거나. 그거마저 어렵다면 차라리 숨기는 게 낫다는 그들의 '패싱'은 회피가 아닌 적극적인 생존 전략이다. 비겁하다 욕할 수 없다.


책을 읽으며 '소수자'라는 말을 수도 없이 곱씹었다. 세상은 언제나 존재에 각박했다. 수적으로 열세라면  더더욱. 함께 읽던 주간지에서는 이런 문장이 나왔다. '똑같이 때려도 제일 약한 곳이 먼저 부러진다' 코로나로 두드러진 다수의 아우성에 소수자들은 더 밖으로 밀렸다. 만성이 생긴 듯이. 생존은 오로지 그들의 몫이다.


존재를 매일같이 설명해야 하고 증명해야 하는 '저들'의 삶 앞에서 사회가 부리는 참견이 참 부지런하단 생각을 한다. 무슨 이론을 갖고 온다 해도 존재를 지우란 말을 함부로 할 순 없다. 상상의 부재는 사회를 병들게 한다. 습관의 편리함은 소수만 죽이는 일이 아닐 것이다.


나를 둘러싼 규범이 언제 어디서든 내 몸에 꼭 맞을까. 퀴어를 경계에 선 사람 혹은 경계 밖에 있는 사람으로 규정하기 전에 그 경계가 대체 어디에 그어졌는지 물어야 하지 않을까. 어느 곳에 서야 '정상인'일까. 세상에 성소수자이기만 한 사람은 없다. 또한 '정상'이기만 한 사람도 없다. 무수히 많은 정체성이 내 몸에 겹쳐 삶으로 표현된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쪽과 저쪽을 철저하게 나눈다.

고작 하나의 정체성으로 존재를 지우는 일이 가능할까. 책은 끝까지 따라다니며 우리에게 질문한다.


세상이 네모인데 당신은 네모입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비非 퀴어가 맞습니까
청년 노동에 관심이 많다면 꼭 읽어보길 바란다. '저들'의 이야기만은 아닐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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