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의 딜레마
이건 불공정해요
우리 반 지혁이는 '공정'에 민감했다. 지혁이가 말하는 공정은 똑같음을 의미했다. 양의 동등. 내가 이만큼 혼나면 상대도 이만큼 혼이 나야 했고, 상대가 저만큼 누렸으면 나도 저만큼은 누려야 한다는 생각이 가득 차 있었다. '이만큼 저만큼'의 양이 조금이라도 어긋나는 날엔 지혁이의 분노와 하루 종일 씨름을 해야 했다. 지혁이의 '불공정' 센서는 납득 가능한 원칙대로만 하면 켜지지 않았다. 너만큼 나도, 나만큼 너도. 절대적인 공정의 세계는 불만을 잠재우는 강한 설득력을 가지고 있었다.
지혁이의 '공정'한 세계는 당연한 듯 당연하지 않았다. 우리 반에는 원리 원칙 앞에 '이만큼 똑같이' 할 수 없는 아이가 있었다. 수현이는 몸이 불편한 아이였다. 몸을 의지대로 제어할 수 없었다. 특히 행동 제어가 안 되는 날에는 친구들 몸을 치고 다니기 일쑤였다. 기분이 나쁠 법도 한데 수현이와 몇 년간 함께한 반 아이들은 수현이를 이해하려고 노력했고 별다른 문제로 붉어지지 않았다. 수현이가 일부러 그러는 게 아니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당연하게도 수현이에겐 '이만큼 저만큼'의 동등한 원칙은 적용되지 못했다.
다만, 지혁이는 종종 볼멘소리로 물어보곤 했다. "쟤는 왜"로 시작하는 말은 똑같이 적용되지 않는 원칙에 대한 불만이 가득 쌓여 있었고 결국엔 '공정'을 묻는 말로 마무리됐다. "불공정해요"
그 무렵쯤이었다. 몇 년간 현장에서 고민하던 '공정'의 딜레마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같은 단어를 품고 있지만 나와 지혁이의 '공정'은 분명 다른 지점이 있었다. 지혁이의 '공정'은 하나는 하나, 둘은 둘과 같았다. 마치 수학처럼 딱딱 떨어지는 공식은 애써가며 특별한 예시를 들고 오지 않아도 근본적으로 체득이 가능했다.
문제는 지혁이만의 공정으론 설명되지 않는 '공정'의 영역이 있다는 점이었다. 게임을 시작하기도 전에 룰을 벗어난 이들을 보듬을 곳. 시작점이 다른 이들이 준비가 되었는지 확인하고 지원해 줄 또 다른 영역. 이것도 '공정'의 영역이었다. 무작정 앞장만 서서 갈 수 없는 교사의 위치기도 했다. 둘 앞엔 똑같은 '공정'이 놓여 있었다. 사뭇 결이 다른 공정의 세계에서 수현이가 서 있을 영역은 어디일까. 지혁이와는 다른 곳일까. 생각하면 할수록 딜레마에 빠졌다.
지혁이와의 대화는 종종 산으로 갔다. 수현이의 상황을 이해시키려면 지혁이의 '인정'에 기댈 수밖에 없었는데 그럴수록 단호하게 지혁이는 자기만의 '공정'을 말했다. 지혁이의 논리는 튼튼했고, 내가 말하는 논리는 무르기 그지없었다. 정과 도덕에 호소할수록 설득은 저 멀리 도망가는 것만 같아 피로감만 높아졌다. 답답한 노릇이었다. 지지부진한 대화가 이어졌다. 우린 매일 지루한 제자리걸음을 걷고 또 걸었다.
공정의 역습
어쩌면 이 기사를 때마침 읽게 된 건 우연을 가장한 필연일지도 모르겠다. 어느 날 아침 읽고 있던 주간지에서 '공정'을 만났다. 지지부진하게 끌고 왔던 오랜 고민을 소화시킬 실마리와 함께. "공정이란 게 좋은 말이기는 한데, 맥락에 따라 묘하게 현상유지를 선호하고 개혁에 반대하는 논리가 된다." 교실만큼이나 교실 밖 사회도 한참을 '불공정'으로 시름을 앓고 있던 날들이었다.
기사에 따르면 내가 알고 있는 공정의 의미를 표면적으로 드러내는 건 어렵지 않았다.
백인 여성인 셰릴 홉우드는 홀어머니 밑에서 어렵게 자라 자력으로 대학을 졸업하고 텍사스 로스쿨에 지원했다. 그녀는 떨어졌지만 그녀보다 점수가 낮은 아프리카계·멕시코계 미국인이 합격했다. 소수인종 우대 정책(Affirmative Action) 덕이다. 마이클 샌델 교수가 책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소개한 사례다. 공정한가 불공정한가?
기자는 공정을 물었다. 여기서 대답은 둘로 나뉜다. '공정'하거나 '불공정'하거나. 여기서 '불공정'을 판단했다면 '비례 원리'를, 반대로 '공정'을 대답했다면 '보편원리'를 따르는 것이다. '공정'이란 단어 아래 성격이 사뭇 달라 보이는 두 원리가 공존했다.
'비례 원리'는 "뿌린 대로 거둔다"는 원칙이 기준이다. 비례 원리에 따르면 점수가 높은 세릴 홉우드가 대학에 붙는 건 당연하다. 오히려 점수와 상관없이 혜택을 받는 건 불공정하다고 판단한다. 노력한 만큼 돌려받는다는 비례 원리는 가장 강력한 직관 잣대를 가진다.
반대로 '보편원리'는 사회구조적 차별에 노출된 집단에 우선권을 주어 보정하려는 원리를 말한다. 구조적 차별로 평등한 교육의 기회를 누리지 못했던 이는 사회적으로 보정받아야 마땅하다. 보편원리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보장받는 평등권에서 출발하기에 비례 원리만큼이나 무시하지 못할 조건이 된다.
막상 '셰릴 홉우드' 사례는 잘 넘어갔어도 우리에겐 많은 질문이 남아있다. 만약 나의 이야기라면.
평소 보편원리를 지지하던 사람도 미세하게 감정이 흔들릴 수 있다. 비례 원리는 무엇보다 강력한 '직관'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이다. 뇌가 가리키는 직관은 본능을 움직인다. 대외적 '판단'으로 나아가기 전 결론을 내리기도 한다. 직관이 관장하는 원칙은 따로 설득이 필요 없다.
지혁이가 말하는 강력한 '공정'의 세계는 비례 원리를 품었다. 지혁이는 모든 이가 똑같은 기준에서 대우받길 원했다. 이대로만 보면 무적의 논리였다. 다만 '모든 이'에 모두가 편리하게 들어맞지는 않는다는 게 문제였다. 비례 원리는 "'게임 도중'과 '게임 이후'에 대해서는 말하지만 '게임 이전'에는 주목하지 않는다."
비례 원리는 재능과 운의 불균등 분포라는 구조적 조건에 대체로 눈을 감는다. 가정 형편이 어려워 학비를 벌기 어렵다는 조건도, 여성이 사회에서 겪는 유무형의 차별과 배제도, 소수 인종이 만나는 보이지 않는 장벽도, 같은 일을 하면서도 신분이 비정규직이어서 겪는 부당함도, 극단적 비례 원리의 세계에서는 고려되지 않는다.
게임이란 상대의 힘이 엇비슷해야 가능하다. 그런데 비례원리와 보편원리 둘은 과연 게임이 될까? 의문이 들었다. 보편원리는 비례원리 보단 한 단계 회로를 더 거쳐야 했다. '필요성'. 필요의 수요자는 소수다. 다수의 사회를 소수의 필요성으로 맞붙어야 했다. 본능의 힘은 결국 비례 원리에 단단한 기본값의 힘을 실어준다. 비등한 게임이 되기 어려운 것이다. 기자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비례 원리가 끌고 갈 극단에 놓인 경우를 지적했다.
전성기 일베 담론 체계의 핵심은 약자·소수자에게 덮어놓고 비례 원리를 적용하는 저돌성에 있었다. 일베의 ‘삼대 주적’인 여성·진보·호남은 모두 자격 없는 무임승차자로 간주된다. 여성은 데이트 비용을 내지 않고 남자를 등쳐먹고, 군대도 안 가면서 시민권은 다 누린다. 진보는 제 능력으로 성공하는 대신 국가에 떼를 쓰고, 호남은 자기들끼리만 뭉쳐서 뒤통수를 친다. 일베의 눈에, 다들 비례 원리를 어겼다.
누가 옳고 그르다는 게 아니다. 지혁이의 세계는 당연히 지켜져야 했다. 다만 지혁이의 '공정'이 끌고 갈 극단에는 수현이가 디딜 땅이 없었다. 처음부터 수현이는 비례 게임에 속도에 맞춰 오를 수가 없기 때문이다. "공정을 둘러싼 싸움을 압도하기는 어렵지만, 그렇다고 링에서 쫓겨날 정도는 아닌" 보편원리의 자리는 그다지 넓지 않았다. 일 년 내내 '공정'을 놓고 지지부진했던 지혁이와의 대화가 떠올랐다. 우리에겐 극단의 승리가 아닌 균형이 필요했지만 쉽진 않았다.
벌써 2년이 흘렀다. 지혁이가 졸업하고 나서 한동안 잊고 있었던 '공정' 키워드를 우연히 다시 만나게 된 건 한 포털사이트 댓글. "이건 불공정해요"
정확히는 '불공정'을 만났다. 그러고보니 요즘따라 SNS에서도 자주 보이는 듯 했다. 일상을 나누던 단체 카톡방에서도, 우리의 대화 안에서도. '공정'의 아우성이 다시 살아나고 있었다. 2년 전과 같이.
생각보다 비례 원리의 세계는 강력했다. 생존의 목표가 목 끝까지 차올라 있는 지금 보편원리의 '필요성'은 우선순위에서 자주 밀리곤 했다. 한 댓글에 따르면 지금은 '허울 좋은 소리'를 할 때가 아니라는 것이다. 범죄를 단순한 소비 차원에서 다루는 극단성으로 '일베'는 'N번방'까지 이어졌다. 누군가를 미워할 자유는 소속 집단을 '혐오'수준으로 묶어버렸다. 사회적 거리두기는 물리적인 거리만을 말하지 않게 됐다. 일부 사회적 분위기는 무언가를 시원하게 밀어붙일 극단에 열띤 호응을 보냈다. 섬세하게 다뤄왔던 두 원리의 균형감각에 균열이 생기는 것만 같았다. 2년 전이나 지금이나 우린 공정에 민감했지만 여전히 균형은 어려운 숙제였다.
"공정한가요?"
여전히 유효한 질문에 난 어떤 대답을 해야 할까?
우린 어떤 해답을 줄 수 있을까?
고민은 끝난 게 아니었다.
*참고기사(천관율 기자, 문재인 정부를 흔든 '공정의 역습')
우연처럼 찾아와 지금까지도 '공정'을 이야기해주는 고마운 기사
https://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313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