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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인 Jan 28. 2022

살만한 사람은 산다는 말을 잊고 지낸다

박완서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를 읽고

한 달 만에 고등학교 친구 선과 통화를 했다. 선은 내가 고향을 떠나 타지로 직장을 옮긴 이후 자주 만나지는 못하고 틈틈이 전화로 안부를 묻는 사이였다. 보통 하루나 이틀에 한 번꼴로 전화해서 한 시간을 훌쩍 넘길 만큼 길고 길었던 통화는 작년 겨울부터 점점 길이와 횟수가 줄었다. 그건 몸이 멀어서 마음이 멀어졌기 때문은 아니었다. 고향에서 시답잖은 이유들로 만날 때보다 오히려 못 만나는 지금 선을 생각하는 마음이 더 커졌으니까. 선은 마흔이 되든 쉰이 되든 영원히 내게 놓치고 싶지 않은 친구였다.


그런 선과 서서히 통화를 줄였던 건 내가 지금 선에게 줄 수 있는 나름의 배려였다. 언제부터 사람과 대화조차 버거워진 선에게 친구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시도이자 노력. 선은 작년 여름부터 불안장애를 심하게 앓고 있었다. 대학 졸업 후 줄곧 사회복지사로 일하고 있던 선은 대부분의 매일을 화가 잔뜩 난 민원인을 대해야 했다. 6년째 잘 버텨오고 있다가 7년 되는 해는 그만두고 싶다는 말을 거듭했었다. 선은 위태로웠지만 자리를 박차고 나간 들 생계는 코 앞에 닥치고 있었기에 몇 푼이 아쉬워 하루만 하루만 하고 퇴사를 미뤘다.


결국 깜박거리던 스위치같았던 선은 흰 수염이 까슬했던 민원인을 만난 이후 무너지고 말았다. 이유모를 분노가 가득했던 그는 선이 가진 볼펜과 서류를 바닥에 던졌고 그것도 모자랐는지 매일 5시에 회사로 찾아와 고래고래 선을 불러재꼈기 때문이다. 선은 그날 이후 스위치가 자주 길게 꺼졌고 빈번하게 울었고 벌벌 떨며 대화를 거부했고 정신과를 찾아 약을 먹기 시작했다. 작년 12월에는 선이 핸드폰도 꺼놓고 살았던 탓에 겨우 선의 남편과의 통화로 선의 생존 여부를 알 수 있었다. 우리 선이 살아 있나요. 남편의 말로는 선은 매일 퇴근 이후 아무 소리도 듣고 싶지 않다고 두 시간 넘게 화장실에 머무른다고 했다. 쥐 죽은 듯이 조용히, 없는 것처럼. 그즈음부터 선은 안부를 묻던 내게 뜨문뜨문 문자를 남겼다. 사람들은 왜 살까. 난 지금 완전한 죽음을 상상하진 않지만 왜 사는지는 모르는 상태에 있는 것 같아.


완전한 죽음을 바라지는 않는다는 선의 말에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는 내게 선은 더한 농담까지 했다. 이렇게까지 최선을 다해 살아야 하나. 그냥 살고 싶지 않아. 가끔 약빨이 떨어져 머릿속에 백명의 사람들이 손가락질하는 것 같을 때는 저 지저귀는 사람들을 죽일까, 안되면 내가 죽어버릴까 생각한다니까. 그냥 산다는 말은 선에게 사치스러웠다. 겨우 살아낸다, 살아간다, 살아보려고 한다 등. 선에겐 산다는 것의 변주로 겨우 스스로를 지탱하고 있는 것 같았다. 선에게는 사는 것이 의문 투성이가 되어버렸다.


"그래 우리 집안은 빨갱이다. 우리 둘째 작은아버지도 빨갱이로 몰려 사형까지 당했다. 국민들을 인민군 치하에다 팽개쳐주고 즈네들만 도망갔다 와 가지고 인민군 밥해준 것도 죄라고 사형시키는 이딴 나라에서 나도 살고 싶지 않아. 죽여라, 죽여. (...) 사설은 무한히 복받치는데 시간과 목청은 모자라 눈앞이 아뜩하면서 현기증이 왔다. 살고 싶지 않다는 말은 조금도 거짓이 아니었고, 내가 한 말 중 가장 가슴을 저미는 듯하여 눈물이 핑 돌았다."(148-149쪽)


책에서 '나'는 끌려가는 길 한복판에서 최소한의 생존방식에 대해서도 이데올로기로 판단하려는 형사들에게 악다구니를 쓴다. 그러곤 의문이 든다. 이렇게 까지 살아야 하는 걸까. 그깟 이데올로기 때문에 '먹어야 산다는 만고의 진리'도 부정당하는 곳에서 산다는 건 뭘까. 살만한 사람은 산다는 말을 잊고 지낸다. 산다는 말을 본격적으로 생각해야만 겨우 숨을 쉴 수 있는 '나'를 보며 선의 얼굴을 떠올렸다. 이들에게 '산다'는 말은 밑바닥에서 길어 올린 걸까. 아님 스스로 침전되어 본격적으로 '산다'는 말과 붙어버린 걸까.


"올케가 푹 하고 웃으면서 내 등 위로 자신의 상체를 꺾었다. 그녀의 젖가슴이 내 등을 짓눌렀다. 처음에 나는 그녀가 터져 나오는 폭소를 참느라 가슴이 그렇게 간헐적으로 경련하는 줄 알았다. 안심이 되어선지 나도 웃음이 나려고 했다. (...) 그러나 이윽고 나는 내 목덜미가 흥건히 젖어오는 걸 느꼈다. 그녀는 울고 있었다. 소리가 없어서 더욱 태산 같은 울음이었다.(46쪽)"


'나'는 매 순간 심각하게 사는 것에 대해 생각하진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아주 가끔 찰나의 순간, 먹을 걸 구하기 위해 빈집 담을 함께 넘다 다친 올케의 다리를 주무르면서, 강제로 동원된 방소 예술단 공연에서 환멸을 느꼈을 때, 가만 멈춰서 고민했을 것이다. 그저 목숨을 연명하기 위함이 아니라 최소한의 나로 사는 것에 대해서. 전쟁통에서도 가족을 지켜야 했던 '나'에게는 생존이 시급한 문제였지만 생존만이 사는 것의 본질 일리는 없다. 왜 사는지, 어떻게 사는지, 그럼에도 살아야 하는지. 그저 살아내느라 한동안 엉킨 줄도 모르고 있었던 고리를 풀어내야만 겨우 숨 쉴 수 있다. 산다는 건 '배고픈 것만이 진실'인 것처럼 명징해 보여도 폐허 사이 목련나무를 보며 '경악의 소리'가 곳곳에서 깨어 나오는, 그렇게 간단치만은 않은 것이다.


아득바득 산 자의 분노를 외치던 '나'에게서 조곤조곤 삶의 의미를 말하던 선이 보였던 건 우연이 아니다. 살고 싶지 않다고 말하기까지 수백 번 자신의 삶을 되돌려봤을 이들의 지난하고 고된 노동을 상상했다. 그리고 숨어있는 이야기들을 생각했다. 나로 살아가는 건 뭘까. 최선을 다해 생을 이어가야 할 이유는 뭘까. 산다는 근원적인 물음은 한 번 떠오르기 시작하면 멈추거나 끝낼 수 없다. 이미 시작해버렸다면 가끔 산다는 생각을 잊어버릴 순 있어도 영원히 생의 고민을 쫓아버리는 건 어려울지도 모른다. 이들 곁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이란 조용히 이야기를 듣고 함께 기억하는 것이다. 그저 이들이 산다는 말에 지나치게 몰두해서 생을 저버리지 않도록. '나'가 남편을 만나 처음으로 평범한 일상을 말했을 때, 선이 자주 가던 카페에 함께 가자고 말했던 날 함께했던 내내 곤두세웠던 긴장이 풀렸다. 무료할 만큼 나른한 일상이 오랫동안 이어지길 바랐다.


박완서,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웅진 지식하우스,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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