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몽스 Jun 14. 2021

짓지도 않은 이름으로 산다는 건

이소라-Track 9

코로나가 기승을 부리기 전에, 친한 동생과 노래방에 갔었다.  동생은 노래를 아주 잘하는 편이라서, 같이 가면 노래를 듣는 맛이 있었다.  동생이 자주 부르던 노래는 이소라의 노래였고, 그중에서도 [Track 9]이었다. 당시 나는 이소라의 목소리가 다소 청승맞다고 생각했었고, 곡의 분위기도 묘하게 처지는 느낌이 있어서 동생이  노래를 부를 때만큼은 집중을 하지 못했다. 아니, 하지 않았다는 표현이 맞겠다. 아무튼 시간이 흘러 그로부터 2년이 흐른 요즘, 나는  노래를 자주 찾아 듣는다. 다름 아닌 가사 때문이다.


어쩌면 제목부터 눈치챘어야 하는지도 모른다. 멋대로 곡에 제목을 붙이기보다는, 순서에 맞게 그저 track 9이라는 이름을 붙여놓다니. 처음에는 유행하는 방식인가, 그게 아니라면 너무 성의 없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했다만 그건 내 넢겨짚음 이었다. 아티스트가 멋대로 곡에 제목을 붙이지 않는다는 건, 이 곡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아끼며, 그렇기에 듣는 이가 스스로 곡의 제목을 붙이기를 바랐기 때문이었을 테다.




나는 알지도 못한 채 태어나 날 만났고

내가 짓지도 않은 이 이름으로 불렸네

걷고 말하고 배우고 난 후로 난 좀 변했고

나대로 가고 멈추고 울었네


세상은 어떻게든 나를 화나게 하고

당연한 고독 속에 살게 해


-이소라, [Track 9]




사는 게 가장 허무하다고 느낄 때가 언제였지. 내 이름 석자가 쓸모없게 느껴졌을 때다. 작게 쓰인 세 글자가 초라하게 느껴지는 날들은 의외로 자주 찾아왔다. 언젠가 아르바이트를 (내가 느끼기엔 부당하게) 그만두게 되면서 명찰 표에 끼워져 있던 내 이름 석자를 빼낼 때도 그랬고, 떨어진 시험장 앞에서 본인 확인을 위해 내손으로 썼던 이름표를 주머니에 넣을 때도 그랬다. 의미 없이 제출하는 서류들의 서명란에 이름을 휘갈겨 적을 때도 그랬다. 가끔은 카카오톡 첫 화면에 나오는 내 프로필을 보면서도 이름이 참 별 볼일 없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언뜻 보면 남자 이름 같기도 하고, 성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왠지 잘 풀리기에는 한참 모자라게, 투박한 이름 같아서 한때는 개명을 하고 싶다고 말하기도 했었다. 지나고 보면 터무니없는 연관 지음이지만, 어디라도 화풀이할 곳이 필요할 때 그 화살이 향하는 곳은 언제나 내 이름 석자, 그러니까 나 자신이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언제나 나대로 살고 싶었다. 그러나 실제로 그런 적은 없다. 온전히 내 행복만을 위해서,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을 찾아서, 나를 불편하고 힘들게 하는 것들로부터 도망쳐 본 적이 없다. 그럴 수 없고, 그래서는 안된다고 생각해왔다. 언젠가 나도 내 이름 석자를 사랑하게 될 날이 올까. 그래서 나 자신을 조금 더 사랑하게 될 날이 올까.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부디 와주기를 기다린다.


낮을 견디기가 힘든 요즘이다. 날이 너무 더워 몇 걸음 걷기만 해도 얼굴이 달아오른다. 마스크 속에서 숨을 쉬는 것도 답답하고, 휴대폰을 꼭 쥔 손에는 땀이 맺히기도 한다. 그러나 저녁이 되면 선선한 바람이 분다. 휘몰아치지 않고 아주 살살 분다. 헝클어진 머리칼을 이리저리 움직여 그 사이 맺힌 땀방울을 사라지게 해 준다. 그렇게 선선한 날들이 언젠가는 오니까, 그래서 우리는 버텨야 한다. 이소라의 음악이 가슴에 와닿았으니 그걸로도 이미 반은 성공이지 않을까.



매거진의 이전글 사라진 마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