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화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를 읽고
2012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는 중국작가 모옌이 수상했다. 수상 소식을 접하면서 언젠가는 ‘위화’가 노벨 문학상을 수상할 거라는 생각을 자연스럽게 했다. 그 당시 내 손에는 위화의 산문집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가 들려있었고 국내 번역되어 출간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위화의 전작들에서 깊은 감명과 문학적 울림을 받았던 독자로서 그의 최근작에 대한 기대는 당연한 것이었다. 개인적 취향이 문학작품에 치중되다 보니 산문집이라는 형식이 낯설기는 했지만 위화가 쓴 글이기 때문에 무조건적 신뢰에 의한 독서가 가능했다.
이 책의 원제는 ‘열 개 단어 속의 중국’이다. 제목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듯이 열 개의 단어로 중국 사회의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위화가 소개한 중국을 대변하는 단어는 인민(人民), 영수(領袖), 독서, 글쓰기, 루쉰, 차이, 혁명, 풀뿌리, 산채(山寨), 홀유(忽悠)였다. 중국의 어제와 오늘을 이해하기 위한 열 개의 단어. 정작 나는 이 열 개의 단어가 품고 있는 내용이 아닌 다른 것에서 중국을 이해하게 되었다. 작품 말미에 쓰여있는 ‘후기’가 그것이다. 그 글에 매혹되었고 가슴이 아렸다.
나는 왜 아이들의 울음소리를 듣기 전에 노동자들의 고통을 생각하지 못했던 것일까? 내가 노동자들과 아이들에게 예방주사를 놓기 전에 먼저 구부러진 주삿바늘을 내 팔에 찔러보았더라면, 그리고 바늘에 달려 나온 나의 피와 살점을 보았더라면 어땠을까? 아이들이 고통으로 울부짖기 전에, 노동자들이 극심한 통증을 못 이기고 신음하기 전에, 그 고통이 어떤 것인지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런 느낌은 내 뼛속 깊이 새겨졌고, 그 뒤로 내 글쓰기에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타인의 고통이 나의 고통이 되었을 때, 나는 진정으로 인생이 무엇인지, 글쓰기가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나는 이 세상에 고통만큼 사람들로 하여금 서로 쉽게 소통하도록 해주는 것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고통이 소통을 향해 나아가는 길은 사람들의 마음속 아주 깊은 곳에서 뻗어 나오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나는 중국의 고통을 쓰는 동시에 나 자신의 고통을 함께 썼다. 중국의 고통은 나 개인의 고통이기도 하기 때문이다.(후기)
위화가 치과의사였을 당시는 마오쩌둥의 시대였고 가난했다. 치과의사였지만 인민에게 예방주사를 놓는 일도 겸했던 당시, 물자가 부족하여 사용한 주사기와 주삿바늘을 깨끗하게 씻어 만두 찌듯이 찜통에다 두 시간가량 찌고 재사용했다. 주사기를 반복 사용하다 보니 바늘 끝이 구부러져 주사를 놓을 때마다 팔뚝에 바늘을 꽂는 것도 힘들고, 주사기를 뺄 때는 작은 살점이 바늘을 따라 올라왔다. 팔을 걷고 줄을 선 노동자들의 살점이 주삿바늘에 달려 나왔고, 유치원 아이들의 연한 살점은 노동자들의 것보다 컸고 피도 더 많이 나왔다고 한다. 위화는 그때부터 숫돌에 구부러진 주삿바늘을 뾰족하게 갈기 시작했다. 그리고 또 사용하고 다시 갈고 바늘의 길이는 점점 짧아지는 그런 시절이었다.
위화의 글쓰기는 자신의 팔뚝에 주삿바늘을 먼저 찔러보는 행위와 같다. 격동의 시대에 받아들인 특별한 체험은 고스란히 문학작품에 반영되어 고통과 소통을 문학적 본류로 남다른 감동을 안겨준다. 그를 세계적인 작가의 반열에 오르게 한 『허삼관 매혈기』 역시 그 방식에서 벗어남이 없다. 허삼관의 아들인 일락이가 자신을 제외한 가족들이 승리반점에서 국수를 먹는 것을 지켜보고 자신의 친아버지를 찾아가 국수를 사달라고 하는 것에서, 친아버지에게 내침을 당한 일락이 만나는 사람마다 붙들고 국수를 사달라고 애원하는 장면에서 누가 가슴 에이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국수 하나를 가지고 중국의 격변하는 시대를 표현하고 민초들의 생활상과, 피를 팔아야 식구들에게 국수를 사줄 수 있는 가장을 통해 해학과 풍자를 담아내는 진중한 깊이는 바로 주삿바늘을 자신에게 먼저 찔러보는 행위가 우선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허삼관이 피를 팔고 난 후에 항상 먹었던 돼지 간볶음과 황주를, 백발노인이 되어 먹는 마지막 장면에서 왈칵 눈물이 났던 것은 중국의 고통을 쓰는 동시에 자신의 고통을 함께 쓴 위화의 가슴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한동안 위화의 주삿바늘에 달려온 살점들에 이끌려 허삼관이 즐겨 먹던 (사실 많은 양이 피를 팔았기 때문에 먹을 수밖에 없었던) 돼지 간볶음이 눈에 삼삼했던 기억이 있다. 사실 나는 돼지 간을 먹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화가 구축한 고통과 소통의 늪에 빠져 오랜 시간 허우적거렸었다. 그런 독서 경험이 있었던지라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의 비 허구적이며 실질적인 작가의 목소리를 통해서 위화의 문학적 뿌리와 중국 사회에 대한 그의 문제의식과 비판정신을 확인하는 과정이 소중했다.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는 미국을 비롯하여 유럽, 아시아, 남아메리카, 10여 개 국가에서 번역 출간되었다. 중국어판은 2011년 1월 타이완에서 출간되었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현재까지 출간이 불가능한 상태다. 타이완의 한 기자가 물었다.
“『형제』와 이 책 두 권 모두 상당한 비판정신을 담고 있는 작품인데 어째서 전자는 중국에서 출판이 가능하고 후자는 불가능한 건가요?”
위화가 대답하기를, 허구와 비 허구의 차이 때문이라고 했다. 주제가 둘 다 오늘날의 중국인긴 하지만 『형제』는 허구 작품이라 서술에서 우회적 표현이 가능하기 때문에 쉽게 출판할 수 있었지만, 이 책은 비 허구 작품이라 서술에서 단도직입적으로 표현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출판이 불가능하다고 했다.
중국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대목이다. 아울러 위화가 지식인으로서 침묵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 역시 멀지 않은 시기에 그런 시절이 있었기에 앞으로 중국의 행보와 중국 작가들, 특히 위화의 또 다른 작품이 어떻게 변모하는지 궁금하다. 작품의 형식적인 면이나 기법상의 변화는 가능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나는 위화를 믿는다. 그는 어떤 경우에라도 자신의 팔뚝에 주삿바늘을 먼저 찌를 거라는 것을. 하여, 나는 기다릴 수밖에 없다. 위화가 구부러진 주삿바늘에 자기 살점을 달고 피를 질질 흘리며 다가오는 순간을.
그 순간, 세계는 다시 한번 숨죽이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