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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사님, 손 편지 쓰는 건 반칙이에요

어린 상사에게 질문받은 날, 마음이 풀렸어요.

by 킴미맘

기획전이 끝났다.

이 말이 왜 이리 짜릿할까.

이번 기획은 제주 농촌 승마상품.

말을 타는 건 고객이고,

우린 말도 안 되게 바빴다.


나는 상세페이지 디자인 담당.

“이런 분위기로 부탁드려요~”

“요건 살짝만 더 따뜻하게~”

“폰트가 너무 제주스럽지 않은가요?”


이쯤 되면 디자이너가 아니라 점쟁이다.

감으로 디자인하고,

감정으로 수정하고,

감내로 견뎠다.


그리고 무사히 기획전 오픈!

드디어 끝났다! 싶었는데…

“수정 한 두 개만 더 해주실 수 있을까요…?”


어차피 예상한 루트였다.

그런데 그날,

정신줄을 부여잡으며 컴퓨터 앞에 앉아있는데,

내 책상 위에 뭔가가 살포시 올라와 있었다.


내 책상 위에 살짝 놓인 간식 한 꾸러미.

비타 500 한 병.

파란 포장지 사탕 몇 알.

그리고 정성 가득한 손글씨 메모지 한 장.


“담당님, 고생 많으셨어요 :)

고생해 주신 덕분에 무사히 기획전 오픈할 수 있었어요!

정말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괴롭힐게요? ㅎㅎ

이제 진짜 여름이 된 것 같네요!

더위 먹지 마시고, 같이 파이팅 해요 우리!”


그 메모지를 보고 웃음이 절로 났다.

그림은 토이스토리, 글씨체는 귀엽고 앙증맞고,

그런데 감동은 대형마트 박스 단위였다.


내 책상 위에 소확행을 살포시 두고 간...

그걸 건넨 사람은 컨텐츠과 과장님,

나보다 어린,

하지만 이번 기획전을 누구보다 진중하게 이끌어간 상사였다.


예전엔 내가 팀장이었고,

이런 메모는 내가 팀원들에게 전하던 사람이었는데

이제는 그 손 편지를 받는 입장이 되었다.


기분은 이상했다.

처음엔 어색했고,

살짝 자존심도 간질거렸고,

근데… 뭔가 따뜻했다.


‘나, 지금 응원받고 있구나.’


이 과장님, 자꾸 사람 마음을 툭툭 건드린다.

일할 땐 또렷하고,

말은 부드럽고,

마음은 따뜻하고,

거기에 손편지까지…?


그날 이후,

우린 예전보다 훨씬 자연스럽게 웃는다.

직급보다 마음의 거리, 그게 더 중요하다는 걸

비타 500 한 병이 알려줬달까?




며칠 뒤인 바로 오늘!

과장님과 점심을 함께 했다.

포켓도시락에 커피 한 잔.

심플한 메뉴였지만, 대화는 제법 깊고 다정했다.

먼저 내가 물었다.

“근데 과장님은 원래 제주에서 태어나셨어요?”

“아, 저요? 저 사천에서 쭉 살다가 제주로 내려온 지 10년 정도 됐어요.”

“어머, 진짜요? “

“여행 왔다가 우연한 기회에 오게 됐는데 지금까지 제주에 있게 됐네요 ㅎㅎ”


그리고 이번엔 과장님의 질문.

“담당님은… 매일 둥이들 등하원 직접 하는 건가요?”

“네~ 어쩔 땐 둥이 아빠가 하긴 해요 ㅎㅎ”

“힘들지 않으세요?”

“ㅎㅎ… 네. 늘 체력과의 전쟁이에요.”

“진짜 대단하세요…”


그렇게 자연스럽게

서로의 이야기들이 오가기 시작했다.


과장님은 이젠 제주가 편해져서 집순이 돼 가고 있다고 하고,

나는 내 하루하루가 여전히 변해간다고 말했다.


일 얘기만 하던 사이에서

서로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사람으로 바뀌는 그 짧은 시간.

마치 ‘서로를 이해해 볼 준비가 된 사람들’처럼

우린 천천히 친해졌다.


나보다 어린 상사지만,

그 사람의 질문엔 예의와 관심이 있었고,

내 대답엔 웃음과 약간의 존경심이 실렸다.


사람은 결국,

‘서로에게 어떤 질문을 던졌느냐’로 가까워진다.


그날 점심시간에 우린

서로에게 아주 좋은 질문을 던졌다.

하나는 “왜 이곳을 선택했나요?”

또 하나는 “엄마는 어떤 하루를 살고 있나요?”


나는 비타 500 한 병과 손 편지로 위로를 받았고,

점심 대화로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가 얼마든지 줄어들 수 있음을 다시 배웠다.


나는 한때 팀장이었고, 지금은 사원이다.

나는 한때 누군가에게 질문을 건네는 입장이었고,

지금은 그 질문을 받는다.

그게 조금 낯설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꽤 따뜻하고,

심지어 반가웠다.




오늘도 마음의 거리를 좁히는 중인 우리에게


회사라는 곳이

때로는 거리 두기를 강요하는 공간 같지만,

어떤 날은

조용히 다가와주는 사람 덕분에

그 거리마저 따뜻해진다.


나이보다 위아래,

직급보다 선후배,

그 사이에서

조금 더 서로를 이해해 보려는 노력.

그게 지금의 우리 팀을 만든 게 아닐까.


그리고,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

누군가의 마음에

살짝 간식 하나 올려줄 준비, 되셨나요?


오늘도 같이, 한 발짝 더.

파이팅 해요.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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