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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민호 Apr 09. 2021

잔잔한 호수에 파도가 이는 일처럼 흔치 않은 일

[아침 8시 39분], 2장

<2>


  직장인은 오전이든 오후든 하고 싶은 것이 있다. '퇴근' 말이다. 5시 55분부터는 주섬주섬 옷을 입고 매일 속이나 썩이는 회사 ERP를 켜 놓은 채로 퇴근 버튼을 최대한 빠르게 누르기 위해 1초 1초 가는 시계를 바라본다. 아날로그시계라면 초침 돌아가는 것에 가만히 지켜보는 맛이 있었을 텐데, 요즘은 컴퓨터 디지털시계를 보니 그저 1분 1분 지나가는 그 숫자의 변화를 기다리다 목이 빠질 것만 같다. 미션이라도 있는 듯, 칼퇴 후에 전철역까지 빠른 걸음으로 가게 되면 정확히 오후 6시 9분에 도착하는 가장 빠른 퇴근길에 몸을 실을 수 있다. 마치 이 차를 타느냐 안 타느냐에 따라 퇴근 후의 내 시간이 보장되느냐 안 되느냐의 느낌이기에 나는 꽤나 이 9분 차에 목숨을 거는 편이다.

  아무튼 오늘도 여느 때처럼 그 시간 그 차를 탔다. 퇴근길 루틴은 블루투스 이어폰을 귀에 꽂고 유튜브 알고리즘을 한번 훑는 것으로 족하다. 트렌드를 행동으로 실천하는 얼리어답터는 되지 못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정도는 머릿속에 심어 두어야 한다는 나만의 고집이 있다. 유튜브는 그런 일에 꽤나 도움이 되는 수단이다. 모두들 그렇듯 유튜브를 틀어 두고선 내가 내려야 할 곳을 지나칠까 두려워 문득 어느 역까지 왔는지 둘러본다. 그리고 그런 지하철 안내 방송 소리를 놓치지 않겠노라며, 이어폰은 항상 한쪽만 껴둔 채로 콘텐츠를 소비한다. 뭐 얼마나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만은.


  그러다 아침에 그 단발머리 여자를 본 것이다. 아, 나랑 같은 곳에서 탔었던가. 끈질기네. 아마 그 여자는 나를 보지는 못했을 것이다. 아, 물론 추측이다. 그 여자는 뒤를 돌아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 웃고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스쳐 지나가듯 본 얼굴이라 그 여자가 맞는지 맞지 않는지도 명확히 알 수는 없었다. 오른쪽 귀로는 계속 유튜브가 무엇이라 떠들어 대고 있었지만, 내 왼쪽 귀로는 그 여자가 누구랑 통화하는지, 어떤 내용을 말하는지, 왜 저렇게 웃고 있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지 쫑긋 세우고 듣고 있었다.


  '같은 전철역에서 내린다. 같은 계단을 오른다. 같은 출구로 향한다. 같은 계단을 오른다. 같은 길을 걷는다.'


  사실 그 여자 뒤를 내가 따라 걷고 있지만, 마치 그 여자가 나를 따라오는 듯한 느낌이다. 그러다 여자가 나를 슬쩍 돌아봤다. 그리고 빠르게 걷기 시작한다. 왠지 오해를 사고 있는 것 같아 기분이 나쁘다. 왜 인지는 모르겠지만, 더 빠른 걸음으로 저 여자를 지나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편이 내가 조금 덜 오해받는 길이라고, 아니, 내가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반증할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빠르게 그 여자를 지나쳤다. 그리고 그 여자는 사라졌다. 나보다 먼저 빠지는 아파트 단지 후문으로 쓱 들어가 버린 것이다. 내가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그 여자는 느꼈을까. 아니면 나에게서 벗어났다며 안도하고 있을까. 괜히 해명하고 싶잖아.


  '아니, 나 되게 이상한 사람 된 것 같은데, 진짜 저 여자 무슨 도끼병 같은 거 아니야? 왜 내가 자길 따라 가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지? 아님 무서웠던 건가? 음.. 내가? 그 사람 내가 무서웠나? 나.. 그 사람 따라가고 있었나?'

  그러다 문득 나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니, 왜 내가 지금 이러고 있지.'


  지금 짚고 넘어 갈 사실은 이런 것들이다. 오늘 아침과 저녁에 누군가가 내 잔잔했던 감정의 영역에 침범했다. 누군지 알지도 못하는 그 여자가 왜 나를 이렇게 불편하게 하는 것인가. 그리고 곧이어 다시는 그 여자와 마주치지 않기를 바란다. 하지만 출퇴근 시간이 겹친다는 것은, 그 여자 또한 회사원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고, 그리고 그 여자를 또다시 마주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이런 불편한 가능성을 내 머릿속에 두는 것만으로도 벌써 지치고 귀찮은 일이 되어 버린다. 고요하던 마음속을 파도가 치듯 태풍이 치듯 마구 흔들어대고 있다.

  그리고는 괜한 화풀이를 고막에 해대고 있다. 이어폰의 볼륨을 최대로 해두곤 마치 나만의 세상에 갇혀있고 싶다고 생각한다. 사실 내 손의 물건들은 잘못이 없다. 그저 내 마음만이 잘못된 것 같다. 스트리밍을 성실히 해내고 있는 애꿎은 내 스마트폰 화면을 툭툭 쳐가며 쓸데없는 화풀이를 한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터치가 안 먹는 건지 원, 마음에 드는 구석이 하나도 없다는 말을 속으로 툴툴 뱉으면서 말이다.

  누군가는 이런 내가 찌질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그중에 하나는 아마 그 여자일지도 모르겠다. 그 여자도 지금 나를 떠올리고 있을까. 나를 신경 쓰고 있을까. 내가 이렇게 신경이 쓰여 괜한 내 물건들에 화풀이를 하고 있는 모습을 떠올리고 있을까. 그렇지 않다면 나는 꽤나 민망하기도 억울하기도 손해 보는 느낌이기도 할 것이다. 글쎄. 왜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나와 그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데.'

  '그저 오전 8시 39분에 전철을 같이 타고 오후 6시 9분 차를 같이 탔을 뿐인데.'


  그러다 노래가 멈추고 요란한 벨소리가 울린다. 어머니가 벌써 집에 도착하신 모양이다.


  “나 거의 다 왔어요. 우리 아파트 동 보인다. 우유 하나 사다 달라고? 알겠어.”


  아 참 그러고 보니 오늘 아침에 어머니가 맛있는 저녁을 먹자고 했던 것이 이제야 떠올랐다. 전화 끊기 전에 물어봤어야 했는데, 괜히 궁금하다. 점심에 매운 음식을 먹어 속이 좀 쓰리니 매운 종류만 아니었으면 한다.


  “다녀왔습니다. 저녁 메뉴 뭐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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