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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걍귤 Sep 04. 2021

미니멀리스트가 자가격리로 깨달은 9가지

2주간의 자가격리 일지


 참 타이밍 좋게도 연차 전날 밤이었다. K-직장인이라면 아시다시피 숨만 쉬어도 행복한 그 시간. 거기에 이제 좋아하는 안주에 맥주를 곁들인. 그렇게 한껏 여유를 만끽하고 있는데 동료에게 카톡이 왔다. ‘공지 보셨어요...?’ 이 밤중에 웬 공지? 마지막에 찍혀있는 '점점점'은 그 공지가 절대 좋은 내용이 아님을 내포하고 있었다. 불길 그 자체!

얼른 확인해보니.. 그랬다. 동료 한 분이 코로나 확진을 받아 내일 출근 대신 검사를 받으라는 긴급공지였다. 가족들과 같이 살고 있기 때문에 입맛이 싹 달아나서 젓가락을 내려놓고 재빨리 방문을 닫았다. 그렇게 동료들과 멘붕의 카톡 좀 주고받다 보니 몇 분 안돼서 접시를 다 비웠다. 회복탄력성이 좋은 걸까, 연어와 닭강정에 맥주가 위기를 뛰어넘을 정도로 맛있는 조합인 걸까. 어쨌든 최후의 만찬을 끝내고 그렇게 갑작스럽게 자가 격리자가 되었다.


집으로 날아온 자가격리 통지서와 물품들






1. 코로나 검사를 받을 때 피해야 할 것, 9시와 햇빛


 피 같은 연차 날 아침. 검사 시작이 9시니까 대충 일찍 8시 40분쯤 도착한 보건소에서 역시 우리는 한 민족임을 느꼈다. 줄이 대형 천막을 넘어서까지 길게 늘어져 있었다. 그래.. 우리는 맛집이든 코로나 검사든 웨이팅은 못 참는 한국인이지. 요즘 같은 때에 애매하게 일찍 검사소에 도착하면 나와 같은 생각을 한 사람을 30명 정도는 만날 수 있다. 아예 일찍 가거나 늦게 가자.

9시도 나름 아침인데, 한여름 9시의 햇빛은 그야말로 무자비했다. 꼼짝없이 땡볕 아래 서서 애매하게 부지런했던 죗값을 치러야 했다. 한 5분 정도 지났을까? 코로나고 나발이고 이러다가 타 죽을 거 같아서 주차장에 있던 아빠에게 차에 있는 우산을 갖다 달라고 부탁했다. 타 죽진 않게 되었지만 사이즈가 관종같이 컸다. 바로 앞 여자분도 땀을 한 바가지 흘리시는데 같이 쓰자고 할 수 없는 상황이 안타까웠다. 관종 우산의 그림자를 이용해 다리라도 가려드렸다. 드디어 내 차례가 되고, 왕면봉이 거침없이 코를 쑤셔왔지만 생각보다 참을 만했다. 본격적으로 시작될 자가격리가 더 무서웠다.



2. 집순이와 맥시멀 라이프의 상관관계


 강제 집순이(도 아니고 방순이) 체험 3일째, 지금까지 만났던 집순이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신기하게도 대부분이 버릴 수 없는 물건들과 인테리어용 오브제로 방을 가득 채운 맥시멀 리스트다. 그에 반해 방에서 책상, 침대, 옷장을 빼면 남는 게 없으며 '방을 꾸민다'라는 건 앞서 말한 세 가구의 배치를 바꾸는 정도인 나는 이번 자가격리를 통해 그들을 어렴풋이 이해하게 됐다.

밖에 전혀 나가지 못하니 집이 곧 세상이었다. 자가격리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방을 최상의 컨디션으로 꾸며놓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살아생전 처음으로. 그렇다고 마구 사재끼진 않았고, 계속해서 주문을 미뤄왔던 2가지를 구매했다. 링이 없어서 교체하지 못하고 있었던 여름 커튼으로 기분을 환기시키기 위해 커튼 링, 그리고 문을 닫고 격리해야 하기 때문에 자주 틀어놓을 수밖에 없었던 에어컨으로부터 몸을 촥 감싸주는 모달 와플 이불. 2주간 방에서만 지내야 하는 이 상황을 조금이라도 즐겨보자 하는 마음에 한 소비였다. 집순이들, 그래서 맨날 뭔가를 사던 거였어..?




3. 심심하다면 소소하고 귀찮은 집안일을!


 자가격리라는 위기를 맞은 사람들에게, 그중 특히 미니멀리스트들에게 강력 추천하고 싶은 것. 바로 집안일이다. 그동안 미뤄왔던 소소하고 귀찮은 집안일들을 해보자. 풀린 바지 밑단 바느질하기, 셔츠 전부 꺼내 스팀다리미로 주름 펴기 등.

솔직히 말해 방 안에만 갇혀있는 시간을 좀 재밌게 보내고 싶어서 비즈 반지나 피포 페인팅 등등에 관심이 가긴 했다. 하지만 금방 질려서 남은 재료들과 처치 곤란한 결과물이 방구석에 처박혀있는 모습을 떠올리며 참았다. 어차피 자가격리 기간 동안 생기는 모든 쓰레기들은 바로바로 배출할 수 없기 때문에 최소 2주 동안 갖고 있어야 한다. 재료를 구입해서 나중에는 결국 버릴 무언가를 만드는 대신 주름 없이 단정한 셔츠를 만드는 쪽이 나에겐 더 좋은 선택지였다.



4. 운동은 선택이 아닌 필수


 그 와중에도 낙은 있었으니, 영혼이 반쯤 빠질 때까지 운동해 기진맥진한 상태에서 하는 찬물 샤워였다. 어떻게든 활동량을 유지하기 위한 생존 운동이었다. 원래 공간지각 능력이 우수한 편은 아니어서 가끔 발이 아직 다 빠져나오지 않았는데 문을 닫는다던가 하는 불상사가 일어나곤 했는데, 생활 반경이 극심하게 좁아지니 더 심해진 게 느껴졌다. 자가격리 기간 동안 하루도 안 빼놓고 강도 높은 운동을 했는데도 확실히 밖에서 돌아다니는 것과는 달랐다.

2주 동안 물건이 많지도 않은 방 안에서 간간히 어딘가에 부딪히며 지내다 결국은 화장실에서 삐끗했다. 이상하게도 순발력은 좋아서 살아남았는데, 온몸을 지탱하느라 팔뚝 전체에 멍이 들었다. 나중에 자가격리가 해제되고 만난 동료들이 보고 경악할 정도로 새파랬다. 그나마 운동이라도 해서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코뼈가 부러졌을지도 모른다고 위안해본다.




5. 피할 수 없다면 뻔하지만 즐기자


 자가격리는 예상했던 대로였다. 처음 며칠은 그저 심심하고 지루했다. 엄마와 하루에 전화를 6통 넘게 했고 카톡은 시도 때도 없이 해서 손이 피로할 정도였다. 평소 출근하는 날에는 카톡 답장을 못해 쌓이다가 퇴근길에 겨우 답장하기 일쑤였는데, 2주 동안은 말 그대로 ‘칼답’을 할 수 있었다. 6시 반에 일어나 22시에 곯아떨어지거나, 아예 새벽까지 재택근무용 모니터로 영화를 보기도 했다. (원래는 쓰지 않았는데 이 경험 후로 계속 두고 쓰는 중이다) 그렇게 우선순위에서 밀리는 바람에 하지 못했던 것들을 하게 해주어 어떻게 보면 소중한 시간이었다. 누군가와 하루 종일 연락을 하거나, 저녁 10시에 꿀잠을 자기엔 하루는 너무 짧았으니까.



6. 할 일 미루다가 피 본다


 백신 2차 접종 후 2주가 지난 동료들은 자가격리를 면제받았다. 난 잔여백신 잡는 것을 계속 미루다가 연차 날 처음으로 시도해볼 참이었다. 진작 할걸! 덕분에 부모님의 백신 예약에 200% 진심이었다. 무조건 가장 빠른 날짜에 가장 가까운 병원을 잡겠다는 굳은 의지로 온갖 꿀팁을 검색하고 서버 시간까지 확인해서 결국 백신 효도에 성공했다. 직접 해보니까 자가격리 경험은 인생에 한 번 경험이면 매우 충분하다. 자유를 되찾자마자 잔여백신을 맞기 위해 계속 시도했고, 드디어 오늘 2차 접종까지 완료했다. 할 일은 퍼뜩 하자. 후회의 맛이 너무 쓰다.




7. 엄마한테 잘하자


 자가격리 첫날에 받은 검사 결과를 설마 하는 마음으로 기다렸다. 결과는 다행히 음성이었다. 문자를 받자마자 전화로 알렸더니 우리 엄마와 아빠도 그랬는지, 둘이 기뻐하는 웃음소리가 핸드폰에서도 방 밖에서도 들렸다. 별거하지도 않아도 칭찬받던 꼬마 시절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엄마가 방문 앞에 두고 가는 점심을 받아 들 때는 나도 낄낄 웃지 않을 수 없었다. 격리된 상태로 스테이크랑 연어를 먹는 사람은 아마 나밖에 없지 않았을까? 엄마는 가끔 방 앞 베란다로 와서 내가 뭘 하고 있는지 들여다보곤 댄스공연을 해주기도 했다. 간식과 꽃도 종종 배달되었다. 맨날천날 밖을 싸돌아다니다 방에 갇혀있는 딸이 신경 쓰였나 보다. 항상 그렇듯이 고마웠다.

엄마가 그렇게 매일 쓸고 닦았던 이유도 알게 되었다. 집에 있는 시간이 많으니 남들 눈엔 안 보이는 것들이 보이더라. 더럽지도 않은데 뭘 그렇게 청소를 자주 하냐던 나는 방에서 생활하는 2주간 매일 3번 이상 청소기를 돌렸고 1번의 걸레질을 했다. 어차피 밤 되면 잘 건데 왜 자꾸 해주는 건지 몰랐던 이불 정리는 흐트러질 때마다 했다. 엄마한테 잘하자.



8. 내가 가진 것들은 행복을 주지 않는다


 물론 개인차는 있겠지만, 나의 행복은 소유함에 있지 않다. 자유가 제한되니 사실 아무것도 필요 없었다. 그저 바람 냄새를 맡으며 어딘가를 걷고 있을 누군가들 중 하나가 되고 싶을 뿐. 차라리 실눈을 뜨고 겨우 일어나 왕복 2시간 반의 지하철 출퇴근길과 눈이 팽팽 돌아가는 업무량을 소화하던 일상이 훨씬 나았다. (지금은 역시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라더니) 내가 갖고 싶어서 사둔 것들이 손만 뻗으면 닿을 곳에 있고 제때제때 맛있는 음식도 나오고 눕고 싶으면 눕고 자고 싶으면 자는 상황인데도, 내 것 하나 없는 곳을 갈망하고 거기서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더 큰 행복을 느낀다니 이거 참 아이러니하다.




9. 가끔은 아-무것도 하지 말아 보자


 침대에 누운 채로 작게나마 보는 하늘은 그야말로 예술이었다. 구름들은 유난히 더 폭신해 보이고 더 평화롭게 흘러가고 있었다. 언제 마지막으로 구름이 지나가는 모습을 쳐다보고 있었을까? 시국이 시국이기도 하고 마음에 여유공간 하나 없었는데 이렇게 강제적으로 여유시간이 생길 줄이야. 핸드폰도 쳐다보지 않은 채 말 그대로 아무것도 안 하는 낯선 시간이 싫지 않아 하루 한 번 실천했다.

그렇게 2주간의 자가격리는 항상 재미와 자극을 찾는 나에게 <지루한 행복>도 있음을 알려주었다. 심심하고 여유롭고 재미없고 즐거웠고 외로웠고 사랑받던 2주였다. 하루빨리 자가격리가 현실이 아닌 추억이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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