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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걍귤 Dec 23. 2021

가끔은 마음도 비워줘야 한다

템플스테이 체험기


최근 들어 마음이 힘들었다. 그걸 알아챌 수 있는 특정 행동들이 있는데, 대표적인 것이 어질러진 옷장이다. 일말의 변동 가능성도 없는 원칙 같은 건 딱 질색하지만 옷장만큼은 계절, 색상, 재질에 따라 철저한 내부 질서가 존재한다.


 미스터리 쇼퍼마냥 수시로 옷장 문을 열어 그 질서가 잘 유지되고 있는지 파악하곤 하는데, 각이 온데간데 없어진 옷들이 어느새 중구난방으로 쌓이면 옷장 주인의 스트레스가 극심하다는 뜻이다. 옷가지를 개어놓는 그 잠깐의 시간이 없을 리가 없으니.


 겨울이 오고 아침에 눈을 뜨는 게 하루 중 가장 힘든 일이 됐다. 옷장 상태도 자유분방해졌다. 주말에조차 근 5일 간 쌓인 무질서를 정리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르자 옷장보다 어질러져 있을 마음을 차곡차곡 개서 정리하기로 했다.






 가장 먼저 떠올린 것은 일 년이 넘도록 우선순위에 밀려났던 템플스테이 체험이었다. 예약 페이지에 들어가 보니 프로그램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었다. '나라는 존재를 돌아보며 비우고 가는 곳'.


 말 그대로 비우려고 갔지만 텅 빈 채로 돌아오지만은 않았다. 아침 식사 후 담당자님과 차담을 나누며 얻은 10가지 인사이트를 정리했다. 질서를 잃은 마음에 작은 가이드가 되기를 바라면서.





1. 아침에 일어나면 아무도 보지 않더라도 이부자리를 갠다. 방을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 건강한 사람은 서랍, 옷장, 벗어놓은 신발을 가지런히 정리한다.

 고개가 끄덕여졌던 대목이다. 앞으로도 옷장 상태를 통해 옷장 주인장이 건강한지 확인해야겠다.


2. 양이 아니라 진심으로 하는 것이 중요하다. 108배의 포인트는 108번의 절의 아니라 나는 누구이며 왜 108배를 하고 있는지를 아는 것이다. 무엇을 하든 나 자신을 타자화해야 한다.

 전날 소원지를 매달고 탑돌이를 하라길래 딱 1바퀴를 돌았는데, 뒤늦게 3번 돌으라는 가이드를 발견했다. 그래서 오늘 2번 더 돌 거예요, 하는 내 말에 해주신 말씀. 그럼 어제 진심으로 했으니 됐네! 마음이 가벼워졌다.


3. 어딜 가든 이상한 사람은 있다. 지금 내가 처한 상황만이 아니다. 그것을 인지하고 있을 것.

 안타깝지만 받아들여야겠다. 내가 더 멀쩡하고 좋은 사람이 되어 밸런스를 맞추는 수밖에.


4. 나와 다른 사람들을 인정하고 이해하고 포용하고 맞춰줄 것. 그것이 현명하게 사회생활하는 진짜 어른이다.

 요즘 마음을 힘들게 했던 가장 큰 요인이다. 그래서 진짜 어른이 되는 것은 반포기 상태였다. 나이만 어른인 어른. 가장 되기 싫은 모습이기도 하다. 주변에 훌륭한 어른들을 생각하며 부지런히 쫓아가 보자.


5. 상대를 어떻게 대해야 내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을지 파악하라. 먼저 1개를 주고 상대에게 3개를 받을 줄 알아야 지혜롭다.

 1개를 받아야 1개를 주거나 기대하지 않고 1개를 줘버리진 않았는지 되돌아보게 됐다. 인생사 기브 앤 테이크라지만 순간의 손해도 감수할 수 있어야겠다.


6. 행복한 삶이란 육체적+정신적 건강, 적당한 재력, 원만한 인간관계가 갖춰졌을 때 온다. 인생을 살면서 이 세 가지를 얻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주변 사람들이 점차 사회생활을 시작하며 대화 패턴이 거의 비슷해졌다. 우리의 멘탈이 건강하기를 진심으로 빈다.


7. 내 인생은 절대 남이 살아줄 수 없다. 나의 것을 사랑하며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길을 가자.

 이런 얘기를 들을 때도 무조건적으로 수용하지 말고 나의 생각과 합쳐서 온전한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하셨다. 이 글을 쓰는 이유에도 한몫했다.


8. 그저 바다에 가고 싶어 하지 말고 어느 바다에 가고 싶은지 말해라. 내가 가고자 하는 방향성과 정확한 목표를 가지고 살 것.

 그 바다에 갈 버스가 안 오면 걸어서라도 가는 확신과 배짱도 필요하다.


9. 나를 너무 힘들게 하는 일은 그만둘 것. 제일 중요한 것은 정신적 건강이다.

 지금 내가 괜찮은지 자주 들여다보고 중간에서 끊어주는 역할도 잘 해내야겠다. 나를 행복하게 해줘야 할 사람으로서 책임이 아-주 막중하다.



 대화를 마치고 방사로 돌아가기 위해 일어나자 담당자님은 본인이라고 하시며 액자 하나를 내미셨다. 젊은 스님의 모습이었다. 수행을 하며 어떠한 심경 변화가 있으셨을지 궁금해 살짝 여쭤봤더니 돌아온 답변이 기억에 남았다.


10. 내가 시작했으니 내가 끝을 낸 거지. 무엇이든 시작과 끝은 온전히 나의 몫이다.


이유가 어찌 됐든 다른 요소에서 찾지 않으신 모습이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마음이 어지럽혀진 원인을 당연스럽게 외부에서만 찾던 나를 되돌아보았다. 그때 ‘비움’을 조금 알 것 같았다. 애써 편해지려고 어딘가에 던져버리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주어진 상황과 그런 나 자체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닐까.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이전보다  신경 써서 옷장을 정리했고, 아직까지  유지되고 있다. 물건을 비우고 지속적인 삶을 지향하는 나를 위해, 마음도  비우고 있는지 자주 살펴주어야겠다. 온전한 나의 몫이니까.  글에 닿을 모든 분들이   마음을 미련 없이 비울  있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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