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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쉐프로듀서 Nov 20. 2019

조리법을 지켜주세요

기아 캐피탈-진정한 맛은 숨겨져 있다.

난세에 탄생한 호걸

군사정권 시절 '자동차산업 합리화 조치'라는 악법으로 트럭과 소형버스밖에 만들지 못했던 최악의 상황에서 '봉고'를 만들어내며 한국 자동차 역사에 '봉고신화'라는 거대한 획을 그었던 기아.

1986년, 대한민국의 자동차산업발전을 가로막던 악법이 폐지될 조짐이 보이자, 기아는 마침내 그동안 갈아왔던 칼을 꺼내 든다.

기아를 이끈 쌍두마차 프라이드(좌)와 콩코드(우)

마쯔다, 포드, 기아 3사 합작으로 만들어진 기아 프라이드와 '마쯔다 카펠라'를 베이스로 만들어진 콩코드.

프라이드는 한국의 국민차가 되었고 콩코드는 고속도로의 제왕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그동안 힘을 숨겨왔던 기아 기술진의 저력을 한눈에 잘 보여줬다.


하지만, 소형차와 중형차만으로는 시장점유율을 올리긴 힘들었기 때문에

기아에게는 새로운 무기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마침 80년대 한국에는 차의 크기를 계급으로 여기면서 큰 차를 선호하는 문화가 생겨나면서

소형차이면서 중형차에 준하는 '준중형차'라는 괴이한 장르가 싹트고 있었는데,

준중형차는 저렴한 가격에 조금이나마 큰 차를 원했던 대한민국의 소비자들의 마음을 완벽하게 파고들었고

현대는 '스텔라' 대우는 '로열 XQ'를 출시하면서, 지금도 40년째 지겹게 이어지는 준중형차 전쟁이 시작된다.

1989년 출시된 기아의 준중형차 캐피탈

기아는 1989년 '캐피탈'을 출시하면서 치열한 준중형차 전선에 참전한다.


캐피탈의 디자인은 깍두기나 두부처럼 자대고 잘라놓은 듯 생긴 모습이다.

마치 정장을 단정하게 차려입으신 교장선생님처럼 당시에나 지금이나 굉장히 점잖은 디자인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런 디자인과는 다르게, 캐피탈의 심장은 당시 그 누구도 따라잡을 수 없던 강력함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준중형차라는 포지션은 말 그대로 '소형차인데 중형차에 준하는 차'였다.


엔진은 소형차 출력 그대로인데, 몸집만 키웠으니 힘이 당연히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현대 스텔라는 늘 길 한복판에서 과열된 엔진을 식히고 있었고, 거대한 몸집의 대우 로열 XQ는 에어컨을 켜거나 언덕만 만나면 빌빌대며 기어가는 모습을 보이며 '절음발이'라는 별명이 생길 정도였다.

'국산차는 힘이 부족하다'라는 인식도 바로 이 시기에 생겨난다.


이러한 상황을 본 기아는 '기술의 기아'라는 별명처럼 고성능을 중점으로 둔 준중형차가 필요하다 생각했고

95마력의 출력을 내는 마쯔다의 B5-ME 엔진을 캐피탈에 장착하는데, 이는 85마력인 대우 로열 XQ나 92마력인 스텔라보다 높은 출력이었다.

'다이나믹 세단'이라는 표어로 고성능을 내세웠다 

허우대만 좋고 힘은 없었던 스텔라와 로열 XQ에 질려버린 한국인들에게 캐피탈은 그야말로 난세의 영웅이었다.

캐피탈은 출시 3개월 만에 누적 판매대수가 1만 대를 돌파하는 저력을 보여주며 

준중형 시장을 '크기 경쟁'에서 '성능 경쟁'으로 바꾸어놓는다.


1년 뒤 1990년, 기아는 마쯔다에서 캐피탈의 새로운 심장인 마쯔다의 B5-DE엔진을 도입한다.

마쯔다의 B5-DE엔진

B5-DE엔진 DOHC 엔진은 흡기와 배기의 효율을 높여 높은 출력을 얻을 수 있는 방식으로, 이전의 캐피탈에 장착된 SOHC 방식인 B5-ME엔진과는 다른 엔진이었다.


한층 더 강력해진 캐피탈의 창창한 앞날을 예상한 기아와 달리, 한국시장의 현실은 참으로 애석했다.


먹는 방법을 모르니 맛을 즐길 수가 있나

캐피탈과 짜짜로니는 어디가 닮은 걸까

PC통신 시절 독자들의 몸을 슈퍼마켓으로 향하게 만들 정도로 신들린 필력을 볼 수 있었던 짜짜로니에 관련된 유머 연재 글을 기억하는가.


어째서 평소에 우리가 먹던 짜짜로니가 짜파게티보다 맛이 없는지에 대하여 마치 거대한 논문을 쓰듯 풀어놓은 글은 그동안 우리가 짜짜로니에 대해 놓치고 있던 중요한 포인트를 잘 보여준다.


짜짜로니는 짜파게티와 다르게 액상스프가 동봉되어있다.

적당량 남아있는 물에 분말스프를 잘 풀어서 섞어먹기만 하면 되는 짜파게티와는 달리

짜짜로니는 '액상스프를 넣고 센 불에서 1분 30초간 볶는다'라는 과정이 하나 더 있다.


설명서의 조리법대로 짜짜로니의 액상스프를 볶아주는 순간, 짜짜로니의 숨겨져 있던 풍미가 튀어나온다.

짜파게티의 조리법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이 부분을 쉽게 놓친다.


캐피탈의 새로운 B5-DE엔진은 마치 짜짜로니같았다.

그 당시 준중형차는 패밀리카였다

캐피탈의 주요 구매층은 중, 장년층이었다.

지금이야 준중형차는 경쾌한 성능을 뽐내며 힘차게 내달리는 젊은 층을 상징하는 자동차지만,

8090 시절 준중형차는 가족을 위한 세단, 말 그대로 '패밀리카'였다.


B5-DE엔진은 3000 RPM이 넘어가야 제 성능이 나오는 고회전 엔진인데, 그 누가 가족이 타는 차를 3000 RPM 이상으로 밟겠는가.


캐피탈의 새로운 엔진은 저 PRM을 주로 쓰는 중장년층의 운전 스타일과는 정반대 되는 스타일의 엔진이었고, 이는 고성능을 내세운 캐피탈의 이미지와는 정반대로 '힘없는 차'라는 이미지가 생기는 역효과가 생겨버렸다.


여기에 오히려 중장년층의 운전 스타일에 어울리는 SOHC 방식의 B5-ME엔진이 달린 '캐피탈SOHC'는 '다이나믹 세단'이라 말하며 고성능 세단이라고 홍보하고, 오히려 고성능의 B5-DE엔진이 달린 '캐피탈DOHC'는 '가족의 사랑이 있는 중형 세단'이라는 슬로건으로 정반대로 홍보하는 이해할 수 없는 마케팅까지,

캐피탈이라는 이름의 호걸은, 점잖은 디자인의 철판 속에서 칼 한번 제대로 휘둘러보지 못하고 으스러져갔다.

고성능을 강하게 어필한 현대 엘란트라(좌)와 대우 에스페로(우)

여기에 미쯔비시의 시리우스 1.6 DOHC 엔진으로 무장한 '현대 엘란트라'와 초기 중형차로 계획되었다가 준중형으로 노선을 바꿔 저 RPM에서 강한 한국형 DOHC를 내세운  '대우 에스페로'의 등장으로

국내 최초 DOHC 방식의 엔진이었지만 그 힘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한 캐피탈은 몰락의 길을 걷는다.


언제쯤 한국은 자동차를 맛있게 먹을 수 있을까

국민을 바보 취급했던 현대의 엘란트라 광고

예나 지금도 현대 엘란트라의 광고는 국민을 바보 취급한 광고로 유명하다.

엘란트라가 아우토반에서 포르셰를 앞지르는 광고는 당시에나 지금이나 황당하기 짝이 없다.

랠리에서 활약한 엘란트라

물론 엘란트라는 91~93 오스트레일리아 랠리(비개조부문)에서 꾸준히 1위를 차지하며 뛰어난 퍼포먼스를 보여주는 등 말로만 고성능을 주장하는 차는 아니었다. 하지만 아직도 많은 사람들에게는 엘란트라는 '랠리 우승'이라는 기록보다는 '포르셰를 이긴 차'라는 기억으로 더 많이 남아있다.


이런 황당한(?) 광고와 이후 뉴 엘란트라의 등장과 함께 성능에서도 밀려나게 된 캐피탈이 결국 전장에서 물러나게 되었지만, 캐피탈 덕분에 한국은 사치나 과시를 위해 크기를 중시하기만 하던 자동차 문화에서 '자동차의 성능'에 조금씩 관심을 가지게 되는 변화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드디어 정상의 자리에 선 현대자동차

2019년 11월, 드디어 현대자동차가 WRC에서 제조사 부분 우승을 차지했다.

1991년 비개조 부분에서 일본의 엔진으로 우승한 현대 엘란트라 이후 28년 만이다.

과거 '가격만 싼 자동차', '철판에 바퀴만 달린 자동차'라고 해외에서 놀림이나 당하던 한국의 자동차.

캐피탈이 남긴 작은 '성능 전쟁'이라는 나비효과가 한국의 자동차를 여기까지 끌어올리지 않았을까.


수많은 자동차 메이커들이 역사를 남긴 WRC에서의 우승은

현대는 물론 한국의 자동차 마니아들에게도 굉장한 감동을 남기는 사건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마냥 기쁘지는 않다.

마니아를 제외하면, 현대가 WRC라는 랠리에서 우승했다는 사실을, 아니 그전에 WRC가 무엇인지는 알까.

고성능 스포츠 세단으로 출시한 제네시스 G70

필자는 아직까지는 한국은 고성능차의 무덤이라 생각한다.

주행성능을 중점으로 두고 만들어진 제네시스 G70에 대해 생각해보자.

여성 구매자도 꽤나 많은 G70

G70은 '강남 소나타'의 계보를 이어가고 있다.


특히 40대에서는 여성 구매층이 남성 구매층보다 높을 정도로 독특한 그래프를 보여주는데

현대 로고가 아닌 제네시스라는 자체 브랜드 로고 덕분에 국산차라는 이미지가 적다는 점과 젊고 럭셔리한 이미지가 돋보인다는 점이 주요 판매 요인으로 손꼽힌다.


여성운전자를 비하하는 것이 아니다.


필자도 지금까지 수많은 여성 베스트 드라이버를 봐왔기 때문에, G70의 주요 고객인 40대 여성층이 모두 '김여사'라고 말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성차별 발언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칭찬하는 G70의 고성능을 정말로 맛있게 먹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어째서 스포츠 세단을 타는데 '좁은 뒷자리'를 불평하는가.

G70은 '오너 드리븐'이지 뒷자리 상석에 앉아서 운전기사에게 운전을 맡기는 '쇼퍼 드리븐'이 아니다.


'모터스포츠의 불모지'라는 불명예를 벗기 위해서는, 아직도 자동차를 그저 사치품이나 운송수단으로 여기는

우리의 자동차 문화가 어서 변화해야 하지 않을까.

언젠간 대한민국도 유럽처럼 진정한 고성능의 참맛을 느끼는 자동차 문화강국이 되기를 빌며


황무지와도 같은 땅에서 고성능이라는 길을 닦은 난세의 호걸, 캐피탈을 기억하며

오늘도 짜짜로니 한 봉지를 볶아먹는다.


-FIN-

글쓴이-쉐프로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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