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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쉐프로듀서 Nov 23. 2019

모두가 꿈꾸던 성공의 상징

현대 그랜저-짜장면을 실컷 먹는 것이 꿈이던 때가 있었다

새로운 그랜저가 나왔다

2019년 11월, 페이스리프트 된 6세대 그랜저

수수했던 신입사원이 이제 경력도 좀 생기고, 어디서 명함을 내밀어도 꿀리지 않는 중견사원이 된 느낌이랄까.

파격적인 디자인으로 페이스리프트 된 6세대 그랜져가 드디어 우리에게 모습을 드러냈다.


그런데, 어째 차보다 광고가 더 주목을 받으며, 호평과 혹평이 서로 유튜브 댓글창이 난타전을 벌이고 있다.


뭐, 그랜져 광고가 뜨거운 감자인 게 하루 이틀일은 아니다.

2009년 그랜저 TG광고는 아직도 기억에 선하다

2009년 "어떻게 지내냐는 친구의 말에 그랜저로 대답했습니다"라는 이 한 줄의 캐치프레이즈로 엄청난 논란이 되었던 그랜저 TG광고를 기억하는가.


그 당시 인터넷이나 신문에서는 이 광고에 대한 수많은 비판과 패러디가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가장 큰 논란은'성공을 차 한 대로 설명할 수 있느냐'였다.


90년대의 각 그랜저라면 몰라도, 당시 그랜저 TG는 제네시스와 에쿠스 아래에 있는 모델이었다.

'그랜저로 대답하는 친구보고 람보르기니로 대답했다'라는 농담이 있을 정도로, 그랜저 TG는 고급차와는 꽤나 거리가 멀어졌었다.


그런데, 이런 광고로 한 번의 홍역을 치른 현대가, 왜 다시 '성공'이라는 캐치프레이즈를 꺼낸 것일까.

과연, 그랜저로 '성공'을 표현하는 것은 외적으로 사람을 구분하는 속물스러운 짓일까.


이 혼돈의 도가니탕 같은 논란 속에서, 필자의 대답은 '글쎄올시다'이다.

어린 시절에도, 그리고 대학에서 마케팅을 전공한 지금도

필자는 '그랜저 광고는 마치 명치를 한 대 맞은 것 같은 느낌이다'라고 말한다.


이것이 진정한 자동차의 상징성을 살린 광고 아닐까.


33년이라는 길고 긴 그랜저의 역사를 알게 된다면,

독자 여러분은 이 광고가 더 이상 속물스럽게 보이지 않을 것이다


한국인의 입맛에 맞게 바뀐 타국의 요리

1986년 출시된 미쯔비시의 2세대 데보네어

8090년대를 살아온 한국인에게는 '부의 상징'과 '성공의 상징'이던 1세대 그랜저

그 당시 대우와 오펠, 기아와 마쯔다, 쌍용과 벤츠처럼 한국의 자동차들이 그러듯,

1세대 그랜저의 역시 현대라는 제자를 키우던 미쯔비시에서 태어났다.


어찌 보면 1세대 그랜저는 한일의 혼혈아였다.


1960년대부터 '달리는 실러캔스'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오랜 기간 디자인의 변화 없이 생산된

1세대 데보네어의 후속을 만들려던 미쯔비시와 서울 올림픽을 앞둔 상황에서 자사의 고급차를 가지고 싶던 현대의 이해관계가 맞물리며 2세대 데보네어, 바로 1세대 그랜저가 탄생하게 된다.

1992년 출시된 3세대 데보네어

새로운 데보네어가 6000대 정도의 판매량을 올리며 나름 선방하는 성적을 올리자,

미쯔비시는 다시 한번 현대와 손을 잡고 1992년 3세대 데보네어를 출시한다.

 

그리고 동시에 우리에게는 '형님차'로 익숙한 2세대 그랜저가 한국땅에서 전설을 써 내려가기 시작한다.


어찌 보면 그랜저는 '대한해협의 경영자'라고 불리던 신격호 회장과도 비슷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한일 양국에서 성공한 신격호 회장과 달리, 일본의 데보네어의 인생은 별로 아름답지 못했다.


IMF 직전 성공가도를 달리며 한강의 기적을 보여주던 한국과 달리 1990년대 일본은 버블경제의 붕괴로 인해 '잃어버린 10년'이라는 시기를 보내며 고급차에 대한 수요가 급격히 곤두박질치기 시작했다.

거기에 대우 로열 시리즈의 몰락으로 적수다운 적이 없던 그랜저와는 반대로, 데보네어는 도요타와 닛산이라는 거대한 라이벌을 상대해야 했고, 데보네어는 그들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그렇게 한국의 그랜저가 성공의 시대로 향하며 2000년대로 달려 나갈 때

미쯔비시의 데보네어는 1999년 쓸쓸하게 역사의 뒤편으로 퇴장한다.

짜장면의 본래 모습인 산동의 짜찌앙멘

여러모로 그랜저는 짜장면 같은 모습을 가진 자동차다.

산둥반도에서 인천으로 오면서 한국인의 입맛에 맞게 변화하며 한국인의 음식이 되어버린 짜장면.


본토 중국인들이 한국의 짜장면을 보고 난생처음 보는 음식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그랜저는 일본인들에겐 큰 차를 좋아하는 한국인을 상징하는 한국의 차가 되어버렸다.


한국이라는 땅에서 타국의 음식과 자동차는 점점 한국의 스타일로 변화되어가는 모습,

짜장면과 그랜저는 한국식 로컬라이징을 제대로 보여주는 교과서와도 같다.


'성공'이라는 꿈을 상징하는 단어

특별한날에 먹던 귀한음식인 짜장면과 높으신분의 상징이던 그랜저

지금처럼 중국집이 대중화되지 않은 시절, 중국집은 고급 요리의 상징이었고, 대표 메뉴인 짜장면은 졸업식 같은 특별한 날에만 먹을 수 있는 음식이었다.


월급이 30만 원이던 1980년대 500원이라는 가격의 짜장면은 입이 떡 벌어질 정도로 비싼 음식은 아니었지만

가난한 서민들에게는 이만한 특식이 없었다.

특별한 날에만 먹는 음식의 상징이었으니, 짜장면과 함께 여러 가지의 비싼 중국요리들을 한가득 시키는 것은

어려운 시절을 살아오던 서민들에게는 성공을 통해 이루고 싶은 꿈이었을 것이다.


그랜저는 어떨까. 물론 3세대 그랜저인 XG는 에쿠스의 아랫급이었던 '준대형차'였지만

1세대와 2세대가 쌓아온 그랜저의 '성공'이라는 단어는 조금도 바래지 않았다.

3세대 그랜저가 됐어야 할 미쯔비시의 프라우디아

사실, 그랜저라는 이름은 3세대 데보네어의 몰락과 함께 역사 속으로 사라질 예정이었다.

3세대 데보네어의 실패로 인해 새로운 대형차의 필요성을 느낀 미쯔비시는 다시 한번 현대와 손을 잡고

'미쯔비시 프라우디아'를 만들어내었고, 현대는 새로운 이 대형차를 '에쿠스'라 명명하며

그랜저의 자리를 에쿠스에게 물려주며 그랜저를 단종시킬 생각이었다.


하지만, 현대가 야심 차게 출시했던 준대형차 '마르샤'의 처참한 실패와 그랜저의 꾸준한 수요로

현대는 대형차의 자리를 에쿠스에게 물려주되, 그랜저에게 준대형차의 자리를 쥐어준다.

준대형차로서 성공을 거둔 그랜저 XG

비록 플래그쉽의 자리를 내주었다 하더라도 '성공'이라는 그랜저의 상징은 변하지 않았다


1998년, 처음으로 현대의 자체 기술력으로 만든 그랜저인 XG가 출시된다. 오히려 그랜저가 준대형이 된 것은 그동안 플래그쉽의 자리에 있으며 '쳐다볼 수도 없는 속물스러운 차'라는 이미지를 탈피하게 만들어준 최고의 선택이었고, '성공한 가장의 패밀리카'라는 이미지가 생기는 변환점이 된다.

4세대 그랜저인 TG

그리고 2005년, 그랜저 TG가 탄생한다.


사실 TG의 경우 오히려 XG보다 편의사항이 떨어지고 기업의 디자인 특성을 따라가는 '패밀리룩'으로 인해 소나타와 디자인의 유사성으로 고급스러움이 많이 줄어들었다는 아쉬움이 많았다.


하지만 여전히 '그랜저'라는 이름은 고급스러움과 성공의 상징이었고 막 30대에 들어선 사회인들의 드림카였다.


이 시기에 나온 '그랜저로 대답했습니다'라는 광고는 이 당시 그랜저의 위치를 완벽하게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그랜저로 대답하는 것은, '내가 이만큼 성공한 놈이다'라고 자동차로서 자신을 표현하는 속물이 아니다.

'사회인으로서 내가 이만큼 성장했고, 나는 더 앞으로 나아갈 준비가 되었다'라는 더 큰 성공을 위해 노력하는

30,40대들의 희망찬 미래를 보여주는 나름 뜻깊은 대답이라 볼 수 있다.


자동차로서 진정한 성공을 보여주는 광고를 만들고 싶었다면

그랜저보다 더 윗급인 제네시스나 에쿠스를 등장시키지 않았을까.


이젠 짜장면 정도야 먹을 만 하지

6세대 그랜저에게 성공의 의미란 무엇일까

길고 긴 33년이라는 시간을 거쳐, 6세대 페이스리프트까지 온 그랜저.

이제 그랜저는 '쳐다볼 수밖에 없던 차'에서 '마라톤처럼 앞만 보고 달려온 30대의 체크포인트'가 되었다.


이제 다시 한번 새 그랜저의 광고를 보면, 그랜저라는 이름의 색안경에 가려져있던 모습이 새롭게 보일 것이다.


'동창회에서 동창들의 부러움을 받는 30대'

'어린 아들을 뒷자리에 태우고 아들에게 승진했다고 말하는 30대'

'퇴사하고 창업으로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는 40대'

'운동으로 젊어지며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40대'

꿈만 같던 짜장면을 곱빼기로 시키고 탕수육까지 시킬 수 있는 나이인데,

짜장면으로 느끼는 성공의 행복이 사치라 부를 수 있을까.


그랜저는 더 이상 백발이 된 회장님들이 기사를 두고 뒷자리에 거만하게 앉아서 빌딩 숲을 달리는 차가 아니다.

8090년대와 달리 초고가의 독일제 수입차들이 쏟아져 나오고,

제네시스라는 현대의 프리미엄 브랜드가 팔리는 2019년에 과연 그랜저가 속물 같은 성공이라 할 수 있는가.


새 그랜저에게 성공의 의미는, 더 나은 성공을 위한 발판과도 같다.


아쉬움이 아예 없을 수는 없으니, 사족을 부려 마지막 한마디를 적어본다.

'유튜브로 성공해 그랜저를 끄는 20대'는 조금 무리수가 아녔을까.


배고픈 20대 글쟁이로서, 오늘은 마음 한편이 쓰라려온다.


-FIN-

글쓴이-쉐프로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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