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람스 교향곡 1번으로 엿보는 그의 작곡 방법
'뛰어난 음악'이란 무엇인가요? 그런 음악은 무엇이 다른가요?'
우리는 종종 음악을 들으며 감동하거나 경외감을 느낍니다. 그러나 그 차이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단순히 좋은 멜로디 때문일까요, 아니면 감각적인 악기의 조화 때문일까요?
브람스의 교향곡 1번을 통해 위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보려 합니다. 브람스가 21년간 심혈을 기울여 완성한 작품에는 그의 고뇌와 노력, 그리고 베토벤이라는 위대한 음악가와의 치열한 대화가 담겨 있습니다. 아래 두 가지 이야기를 통해 과연 대가가 만든 음악은 어떻게 다른 것인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 브람스 교향곡 1번에 담긴 역사적, 개인적 의미
2. 음악적 천재성이 돋보이는 ‘동기’의 활용 방식
작곡가에게 첫 번째 교향곡이란 아주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교향곡은 기악곡 중 가장 큰 규모의 곡으로 수많은 악기가 쓰이는 곡인 만큼 각 악기의 특성은 무엇이며, 어떻게 배합할 것인지, 어디에 쓸 것인지 등 충분한 공부가 되어있어야 합니다. 따라서 교향곡을 보면 작곡가의 실력이 얼마나 무르익었는지 느낄 수도 있습니다. 모든 작곡가에게 첫 번째 교향곡은 큰 의미를 가지지만, 특히 브람스에게는 더욱 특별했습니다. 무려 21년 동안 고민할 만큼요.
브람스는 1854년 21살에 작곡을 시작해서 1876년 11월, 약 21년 만에 작품을 완성했습니다. 아무리 브람스가 엄격한 완벽주의 성향을 갖고 있다고 하지만 하나의 곡을 작곡하는데 이렇게 오래 걸리는 경우는 드문 일입니다. 브람스가 이토록 오랫동안 곡을 다듬은 것은 바로 '베토벤' 때문이었죠.
브람스는 작곡을 시작하며 끊임없이 베토벤이라는 이름의 무게에 짓눌렸습니다. 베토벤이 교향곡 9번 '합창'으로 세계를 뒤집어놓고 세상을 떠났거든요. 많은 작곡가들이 교향곡 9번을 듣고 '교향곡의 발전은 여기서 끝났다. 더 이상 우리는 이보다 뛰어난 교향곡을 만들 수 없다.'라고 생각했어요. 오죽하면 '9번째 교향곡의 저주'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베토벤 이후의 작곡가들은 9번째 교향곡을 완성하지 못하고 생을 마감한다는 것이었지요.
브람스의 부담은 이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스무 살 무렵, 음악 평론가였던 슈만이 브람스를 '독일 음악이 가야 할 새로운 길'이라는 거창한 찬사로 그를 소개했거든요. 사람들은 그를 '베토벤의 후계자'로 생각했습니다. 이는 브람스를 단숨에 유명 인사로 날아오르게 했지만, 동시에 극심한 부담감을 안겼죠.
난 이 곡(교향곡 1번)을 완성하지 못할 거야.
위대한 거인(베토벤)이 내 뒤에서 뚜벅뚜벅 쫓아오는 발자국 소리가 들려.
그 소리를 들으며 작곡을 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아무도 모를 거야.
브람스는 1870년 동료에게 쓴 편지에서 이렇게 토로했습니다. 브람스 교향곡 1번 원본 악보에는 ‘거인의 발자국 소리를 등 뒤에서 들으며…’라는 글귀가 쓰여있습니다.
브람스는 각고의 노력 끝에 교향곡 1번을 완성했고, 그 작품은 '베토벤의 10번째 교향곡'이라는 찬사를 받았습니다. 베토벤이 더 오래 살았다면, 아마도 이런 음악을 만들었을 것이라는 뜻이었죠. 브람스는 베토벤의 음악적 유산을 이어가고자 했고, 동시에 자신만의 음악을 탄생시키려고 했습니다. 그 모든 노력이 교향곡 1번에 담겨있지요.
베토벤과 브람스는 '동기'를 활용한 작곡에 천재적인 모습을 보여줍니다. '동기'란 음악의 가장 작은 단위인데요. 단 몇 개의 특정한 음이 교향곡 전체에 걸쳐 반복적으로 변형하며 거대한 음악적 구조를 만들어냅니다. 아주 유명한 예로 베토벤의 '운명교향곡'을 들 수 있죠. 베토벤은 단 4개의 음(그것도 3개의 음은 같은 높이의 음입니다.)으로 몇 백 년을 호령했습니다.
베토벤의 동기 활용에 대한 간단한 해설은 아래 영상에서 볼 수 있어요.
https://www.youtube.com/shorts/7vV7fQcQ_jk
브람스는 이 동기를 극적으로 활용합니다.
브람스 교향곡 1번에는 '서주'가 등장하는데요. 서주란 오페라가 시작될 때 아직 웅성대는 관객에게 이제 극이 시작할 것이고, 어떤 극을 보여줄지 알려주는 예고편과 같은 역할을 하는 장치입니다. 브람스는 매우 느린 서주를 통해 음악의 시작과 동시에 끝없이 고동치는 파워로 관객을 압도합니다. 바이올린은 점차 상승하고, 목관악기는 하강하는 모습으로 관객이 가슴을 쓸어내리게 만들죠.
서주는 이 영상의 앞부분입니다.
유튜브에 있는 영상을 잘라서 가지고 왔는데요. 각각의 색마다 같은 동기를 활용한 것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확인해 보시면 작곡가가 이 작은 음형을 어떻게 거대한 음악으로 만들어가는지 어렴풋이나마 느낄 수 있습니다. 심지어 모차르트 교향곡 41번 '주피터'의 메인 선율과 베토벤 '운명 교향곡'에서 따온 동기도 있습니다.
(서주에서 따온 동기들과 그것이 이후 곡에 어떻게 활용되는지를 보여주는 영상입니다.)
0:00 - 0:29 첫 번째 동기 조각과 그 활용 모습입니다. (보라색)
0:18 - 0:37 첫 동기는 모차르트 교향곡 41번 '주피터'의 메인 선율을 활용하여 만든 조각이죠.
0:37 - 1:03 두 번째 동기 조각과 그 활용 모습입니다. (녹색)
01:04 - 01:31 세 번째 동기 조각과 그 활용 모습입니다. (주황색)
01:32 - 01:45 위에서 보여드렸던 베토벤 운명 교향곡의 동기를 활용한 모습입니다. (청록색)
이렇게 만들어진 동기들은 음악이 전개되면서 아래 영상과 같이 복잡한 양상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분석 전체가 담긴 원본 영상은 이 링크에서 볼 수 있습니다.)
어느 칼럼에서 아주 적절한 표현을 해주셨는데요.
아주 작은 문양들이 모여 하나의 그림을 완성하는 아라베스크처럼 아주 작은 음악 조각들이 모여 거대한 음악 디자인이 완성됩니다.
저는 이런 요소들을 악곡분석에서 볼 때마다 소름이 돋습니다.
종종 '예술을 어떻게 평가하냐'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AI가 만든 음악, 취미로 만든 음악이 대가들의 음악과 얼마나 다른지 모르겠다고요. 물론 예술은 분명 객관적인 평가요소로 측정하기는 힘들지요. 그러나 하나의 곡에 담긴 21년의 고뇌, 음악적 연구, 작곡 과정을 이해한다면, 몇 시간 만에 만들어진 음악과 이를 동일선상에 놓을 수는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