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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안나 Nov 27. 2022

즉흥춤을 배우다

제한된 움직임 속 찾은 자유의 실마리

'인간은 움직이는 존재다'

'움직이지 않는 부분이 거의 없어야 한다'


  선생님은 몸으로 느껴야 비로소 이해되는 말들이 있다고 하셨다. 그날 나는 처음으로 몸으로 느꼈다. 그동안 나의 몸을 다뤄온 방식, 애를 쓰며 가로막고 있던 것들.


  난생처음 즉흥춤 수업을 들었다. 선생님은 바닥에 누워 움직임을 시작할 수 있도록 도와주셨다. 고개를 돌리는 작은 움직임으로부터 시작해 점점 움직임을 확장해 나가는 것이었다. 바닥에 의지해 움직일 수 있는 만큼만 움직여도 되었다. 모든 것이 낯선 내게 바닥은 마치 구명조끼 같았다. 서서히 일어나 앉으니 팔과 상체가 자유로워지며 움직일 수 있는 범위가 늘었다. 두 발을 디디고 섰을 땐 내게 허락된 공간이 더욱 넓어졌다. 하지만 바닥에서 멀어질수록 막연한 불안감을 느꼈다. 텅 빈 공간 속 덩그러니 서있는 내 몸이 어찌나 어색하던지. 그 공간을 어쩔 줄 몰라 다시 바닥에 드러눕고 싶었다.


  아무도 없는 공간에서 음악을 틀어놓고 마음대로 움직이는 경험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내가 기억하는 한, 나는 아주 어릴 때도 그런 일을 하지 않았다. 살면서 몸이 가려는 대로 그냥 내버려 둔 적이 있었던가? 나는 내 몸을 단속하는 방식으로만 써왔다. 몸은 자유로운 움직임과 표현의 주체가 아니라 제약의 대상이었다. '내 몸'인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머리와 몸이 따로인 것처럼 머리는 계속 몸을 단속하고, 경직시켰다. 그 결과는 결국 부상과 통증으로 나타났다.


  어쩔 줄 모르겠을 때마다 흘끔흘끔 선생님을 훔쳐보았다. 선생님은 자신만의 세계의 빠진 듯 바닥을 유영하고 있었다. 그만의 배려이기도 했다. 그 모습이 더없이 자유로워 보였다. 선생님이 내게 보여준 춤의 세계는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 그저 몸이 하도록 내버려 두는 것, 허용해 주는 것이었다. 몸은 그저 힘을 풀어주면 움직인다. 움직이는 것이 어색한 것이 아니라, 멈추는 것이 어색한 일이라는 것. 오히려 멈추기 위해 너무 많은 애를 쓰고 있었다는 것. 그 반대로만 믿고 있었다. 아무리 머리로 애를 써도 알 수 없었던 것들이 몸의 움직임을 통해 한꺼번에 다가왔다.


  몸은 애써 명령을 내리지 않아도 이미 갈 곳을 알고 있었다. 그저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 두면 되는 일이었다. 다만, 수많은 제약들을 마주해야 했다. 손바닥을 바닥에 대지 못한다던가, 손을 가슴 위로 올리지 못한다던가, 다리를 벌리지 못한다던가……· 부상으로 인한 두려움과 스스로를 동여매는 오래된 습관이 온몸에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팔은 가슴 위로 올라가고 싶다고 하는데 어쩐지 나는 그것을 계속 막고 있었다. 내가 알지 못하던 나의 제약들, 모두 내가 만든 것이었다. 손바닥에서, 가슴에서, 골반에서 움직임이 턱턱 막힐 때마다 마음속에 두려움이 피어났다. 동시에 어떤 욕망을 느꼈다. 모든 제약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욕망, 더 나를 내려놓고 싶다는 욕망, 더 자유롭고 싶다는 욕망. 자유를 원했다. 그것을 더 알고 싶었다. 더, 더 온몸으로 빠져들고 싶다는 욕망을 느꼈다.


  제한된 움직임 속에서 찾은 자유의 실마리. 선생님께 묻고 싶었다. '선생님은 음악이 들리시나요?' 어리석은 질문이지만 궁금했다. 내게는 그것이 들리지 않았다. 언제나처럼 나보다 나의 바깥을 더 많이 의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음악을 나도 느끼고 싶었다. 더 빠져들고 싶었다.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리사 오노의 목소리에 조금이나마 마음이 편해졌다. 음악을 느끼며 몸을 움직이는 일이 아득히 먼 일처럼 느껴졌다.


  첫 수업 후 새롭게 시작한 일이 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서너 곡 정도의 음악을 틀어놓고, 음악에 몸을 맡겨 서서히 몸을 일으키는 것이다. 자유롭게 음악을 느끼는 경험을 해보고 싶었다. 처음에는 몸이 어찌나 무거운지 바닥에 붙어 뒹굴고만 싶었다. 한 곡이 지날 때마다 억지로 조금씩 몸을 일으켜 세웠다. 마침내 두 발로 선 내가 여전히 어색했다. 며칠이 지나고서야 느낄 수 있었다. 선다는 것은 오히려 축복이었다. 몸을 일으키자 공간이 확장되고 팔 다리가 자유로웠다. 선다는 것은 자유로움이었다. 좋아하는 보사노바 음악이 나왔다. 흥겨운 리듬에 몸을 흔들었다. 한층 자유로워진 나를 느끼며 신이 났다. 콩콩 뛰었다. 자유로웠다!


  이토록 단시간에 내게 두려움과 희망, 강렬한 욕망을 동시에 느끼게 한 일이 있었던가? 아무리 애를 써도 이해할 수 없던 일들이 나의 피부를 통해 너무나도 쉽고 빠르게 다가온다. 내가 가진 문제들을 오로지 머리로 해결해보려 애쓰던 것이 얼마나 연약하고도 오만한 일이었는지. 머리에 모든 권한을 주고 몸을 등한시했던 것은 대단한 착오였다. 머리도 몸도 결국은 나라는 것, 왜 그것을 알지 못했을까? 몸을 통해 나는 겸손해지는 동시에, 더 큰 존재감을 가진다.

 

  나는 서툴렀다. 그러나 그래도 되었다. 춤은 나에게 과정을 허락해 주었다. 나는 요즘 희망을 느낀다. 내가 가지고 있던 신체적, 감정적 문제들이 몸의 움직임을 통해 조금씩 실마리를 찾고 있다. 닫혀 있던 몸이 조금씩 열림을 느낀다. 아픈 것이 줄어들고 편안해졌다. 가슴이 열리고 호흡이 쉬워졌다. 소화가 된다. 나를 둘러싼 일들이 조금이나마 이해되기 시작했다. 별개의 일이라 생각했던 일들이 하나의 맥락으로 연결되어 내게 다가온다.


  결국 중요한 것은 인정과 표현이다. 나의 두려움, 슬픔, 기쁨과 즐거움을 모두 인정하고 허용해 주는 것. 여전히 머리는 자꾸만 몸과 마음의 영역을 나누려 한다. 나의 이성과 감정, 신체가 조화를 이루길 원한다. 몸과 마음을 통합하여 자유를 얻을 수 있기를 원한다. 그 자체로서의 나와 함께 자유로움으로 나아가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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