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까지) 비엔나
2014년 3월의 이야기
셋째 날이었다.
일을 해야 한다고 해서 일찍 나왔다. 날씨가 좋지 않았는데 이상하게 밥까지 목으로 넘어가지 않았다.
나와서 걷다 말고, 보낸 이메일이 아웃박스에서 빠져나가지 않았다고 다시 들어가더니, 이메일이 전송된 후에는 보스가 문의하는 사항에 대해 대답하느라 블랙베리를 손에서 놓지 못했다. 나는 무관심한 척했으나, "나야말로 언제쯤 내 저작물에 저런 책임을 지고 (영어로) 신들린 듯 설명을 할 수 있을까" 싶어 속이 타들어갔다.
그때였다. 내리는 비를 뚫고 Belvedere를 향해 가는 길이었는데, "어지간히도 서둘렀네" 한마디에 빵 터지고 말았다. 2차 대전 종전을 기념해 세운 비석과 분수대의 건립일이 1945년 8월 12일이었던 것이다. 이런 차원의 농담이 가능한 사람이 주위에 별로 없었다. 세계대전에 대한 감각이 미국과 서유럽의 upbringing에서 더 강한 것이기 때문이기도 하고 (한국에서 해방을 인식하는 방식과는 조금 초점이 다른 것 같다) 나만큼 강박에 가깝게 디테일에 집중하는 사람을 찾기 힘들기 때문이기도 하다.
미술관에 도착하자 비는 더 세차게 오기 시작했지만 이제는 황량한 오스트리아 대공의 정원을 걷는 기분이 나쁘지만은 않았다. 오디오 가이드까지 빌려 열심히 두리번대는 나를 두고 그 인간의 빈정거림이 시작되었다.
"어릴 때 엄마가 너무 미술관에 많이 데리고 다녀서 진절머리가 날 정도였는데, 늘 미술관에 같이 가던 엄마 친구 가족이 있었어. 엄마랑 엄마 친구가 서성이는 동안 그 집 아버지와 딸과 나는 후딱 끝내고 늘 바깥 복도에 앉아있었지. 그 아저씨가 한 말이 아직도 잊히지가 않아--'미술관 다녀와서 그때 기억에 남는 그림 5점만 읊을 수 있으면 충분함' 이랬는데, 너 그렇게 보다가는 니가 좋아하는 5점이 뭔지 기억도 안 날 거다?" 미술관 관련해서는 꿈이 작은 이 아이에게 무슨 변명을 하리... 그리고 전시실 건너에서도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시선이 너무 부담스러워서 일부러 그림에 집중한 척한 것도 있어서 그냥 잠자코 있기로 했다.
클림트의 '키스'가 드라마틱한 조명을 받으며 걸려 있었다. 문득 그 그림 앞에서 입을 맞추고 싶었는데, 얘는 꼭 그럴 때는 눈에 보이지 않았다. 다리가 아플 정도로 돌아다니니 폐관 시간이 되어 쫓기듯 건물을 나섰다. 비는 유럽식으로 꾸준히 추적추적 내리는 바람에 손이 다 얼얼했다. 하지만 이 주말의 목적이 무엇인지 두 사람 모두 아는 바가 없는지라 손을 잡아 달라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클림트의 '키스'앞 '키스'도 내 상상이지 사실은 대낮에 PDA (public display of affection)라니 우리 사이엔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뭐야, 정말 별로군'하고 생각하던 중에 우산 밑으로 얼굴이 들어와 뺨에 입을 맞추고 다시 나갔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내 손은 줄곧 따뜻했다.
내 일기장을 물끄러미 보던 그가 물었다.
"Am I in it?"
"당연히 없지, 너랑 헤어지고 산 건데."
거짓말이었다. 사실은 있었다. 노르웨이의 어느 산자락에서 나는 He made me sick이라고 거기에 적었다.
그는 줄곧 나에게 sickening 한 사람이었고, 그 sickness는 무려 3년 동안 묵고 닳아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3일의 반짝 추억이 아무리 아름다워도 지울 수 없는 이야기였다. 헬싱키로 돌아가기 전날 밤, 동네에서 가장 맛있다는 슈니첼을 앞에 두고도 맛있게 먹지 못한 이유는 그것 때문이었다.
"진지하게 만나볼 생각 없느냐"라는 질문은 단숨에 나를 현기증 나는 3년 전 파리로 되돌려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