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날 내 모습과 트리거
친구의 친구의 추천으로 이 시리즈를 보게 되었다. 잘 만든 드라마이지만 누구나 봐야 할 필요는 없고, 본 이들 중에도 일치하는 감상을 나누는 이가 별로 없을 것 같다.
그리고 이 드라마는 내게.... 과거 그 자체였다.
누군가에게 너무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데, 너무 사적인 이야기라 기타 플랫폼에는 떠들고 싶지 않았고, 한국 혹은 그 밖에 있는 누구를 붙잡아도 이걸 이해해줄 사람이 없었다. 더 나은 삶을 살고 있다는 낙관 속에서 잊고 있었던 과거, 그만큼 해가 묵어 기억도 희미해졌고 그 기억을 함께하던 인연도 떠나갔기 때문이다. 꾹꾹 눌러담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샤워를 해도 잠을 자도 이 답답함이 사라지지 않았다. 글을 쓰지 않으면 미칠 것 같을 때 올 곳이 여기밖에 없었다. (마침 브런치에 유저 차단 기능이 생겼다고 한다. 잘 된 일이다.)
‘너네는 모르는 우리만의 이야기’ 같은 서사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렇게 선 긋는 행위가 건강하게 이루어지는 걸 본 적이 별로 없고, 그렇게 나눈 구역이 별로 의미있어보였던 적은 더더욱 없다. 그런데... 남자주인공의 훈훈함과 개인적 서사에만 몰두하는 평면적 리뷰를 몇 개 읽고 보니 그냥 짜증이 확 났다. 저 드라마는 대졸 공채 신입들이 서로 경쟁하는 상황을 다루는 것도 아니고 (굳이 금융업까지 가지 않더라도, 대기업 조건공채는 각 부서별로 채용이 결정되므로 경쟁을 하는 경우가 드물다) 배우나 캐릭터 개인에 관한 이야기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저 드라마는, 어린 나이에 마주하는 비정상적인 스트레스를 어떤 식으로 다루는가에 대한 이야기다. 저 미친 상황을 직접 맞닥뜨려 본 사람이 아니라면 verbal abuse 나 각종 belittlement 에 자기를 합리화하는 방식을 끊임없이 고안해내야 되는 자기방어기제는, 안타깝지만 읽어내기 힘든 테마임이 분명하다.
드라마 인물 중 내가 누구에 이입하는지 생각해봤다. 처음에는, 너무도 익숙한 아이보리 블라우스에 검은색 펜슬 스커트를 입은 어떤 이라고 생각했다. 아니었다. 나는 매일 점심 배달을 하는 Yasmin이었고, 일이 없어서 졸림을 참기 위해 데스크에서 뉴스를 보는 (척 하던) Robert였고, 쓸데없이 나의 value를 증명하려다 쿠사리 먹은 Gus 였고, 소수자로서 뻣뻣함(센 척)과 과잉친절의 경계를 넘나들던 Harper였다. 때로는 새벽 3시까지 일하던 Hari이기도 했고, 마지막으로 젊음이 주는 호기심과 열기에 몸과 마음을 내맡겼던 그들 모두였다. 단지 내 이야기는 런던이 아니라 서울과 뉴욕에서 펼쳐졌을 뿐. 영어로 limbo라고 하는 극단적 상황에 내몰린 젊은 영혼들은 어떤 식으로든 돌파구를 찾으려고 한다. 그 돌파구가 건강한지, sustainable 한 지는 중요하지 않다. 나의 경우, 그냥 돌아봤을 때 멋진 기억으로 남을 추억거리가 있었으면 됐다고 생각했다. 드라마처럼 6개월은 아니지만, 정해진 시간동안만 이어질, 그 뒤로는 아무 baggage 가 남지 않을 사람들이기에 난생 처음으로 나를 놓아버리고 이야기하고, 듣고, 취했다.
나를 많이 성장시켰던 시기지만, 내가 그 기억을 놓아버린 이유는 분명했다. 시간이 지나 이 경험을 돌아보면서 내가 스스로의 행동을, 혹은 주변 인물들의 행동을 합리화하던 방식이 옳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고 그 참회는 언제나 고통스러운 과정이었다. 드라마에서는 이걸 어쩔 수 없는 야심적 선택으로 치부(置簿)하는 것 같지만 이미 그 길을 벗어난 사람에게는 그냥 치부(恥部) 였다, 영원히 생각하기 싫은 그런 지저분한 기억.
올바르지 않은 언행을 한 인물에 대해 주인공이 다른 주인공에게 묻는다. "Do you think he was a bad person?" 답변은 다음과 같다.
"I don't know. I just had to work with him"
질문자는 여자이고, 답변자는 사회 기득권층인 남자이다. 지저분한 사건과 이상한 인물에 대해 수없이 고민해야 하는 여자 (그에 더해 유색인종)와 그냥 동업자로서의 자질만 판단하면 되는 백인 남성의 차이가 너무도 극명했던 그 엔딩 컷을 본 그날 난 잠을 이루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