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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ra Aug 22. 2019

너와의 3년, 3일, 그리고 3주 (2)

(아직도) 비엔나


2014년 3월에 있었던 이야기 (2014년 7월 작성)

비엔나에 가기 전에는 독일어를 하나도 몰랐는데, 불과 며칠 사이에 거리 이름 읽기도 꽤 하고 간단한 장소 명사를 대충 알게 됐다. 기본 30cm의 거리를 띄고 걸었던 첫날 덕분이다.


발음도 철자도 힘든 헤렌가써 슈피겔가써 헤르만슈트라써 각종 가써들을 한참 지나, 그 친구가 예약해놓은 - 정확히 말하면 그 친구의 컨시어지가 예약한 - 레스토랑으로 어렵사리 갔다. 음식은 가격에 비해 아주 훌륭하지는 않았는데 코멘트가 장관이었다. 거만한 표정으로 하는 말이, 이런 건 컨시어지한테 물어보면 안 된단다. 그 이유인즉슨, 그런 사람들은 데이트를 안 해서 좋은 식당을 몰라서라나.... 너보다 낫지 않겠니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나왔지만 생각대로 말했다가는 밥값을 토해내라고 할 것 같아서 말을 꿀꺽 삼키고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비용처리된다고.) 아쉬웠던 음식만큼이나 엘리베이터도 어수선했는데, 병원 엘리베이터 마냥 양쪽으로 문이 나 있었다. 내가 서 있는 쪽이 내리는 쪽이 아니란다. 그러면 나는 또 어쩌겠는가, 내가 맞다고 우겨야지.


"틀리는 사람이 2차를 사는 거다?!"


그제야 내가 알던 사람이 생각났다. 일상이 모두 장난이고 위트고 정복할 수 있는 놀잇감이었던. 별의별 것이 다 논쟁의 대상이었고, 진짜 멍청해 보이는 일도 사실은 '해볼 법 한' 일이었고 하고 나면 '짜릿한 기억'인. 그래서 그걸 몰랐던 나의 지난날들이 약간은 빛바래 보이게 만드는 그런 사람이었다. 둘이 바에서 미친 듯이 술 먹다 말고, 다음날 직장 째고 마이애미 가자고 표를 막 예약하던 때도 있었고, 뉴욕이 답답하다며 스카이다이빙을 하자고 의기투합한 때도 있었다. 어떤 뻘짓을 해도 그 앞에서는 부끄럽지 않았다.


여하튼 뻘짓도 내공이 있는지, 이기는 놈만 이긴다.

내가 틀렸다.


3차로 갔던 바에서, 자기가 겪은 나름의 드라마를 막 풀어내던 그가 문득 나에게 물었다.

"그래서, 너는 3년 동안 어땠어?"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고민하지 않은 건 아니다. 그냥 나를 내려놓고 솔직하게 말하고 싶었는데, 한숨 가득 담아 늘어놓는 인생 푸념이 길거리 가로등만큼 흔한 나라에서 와서인지, 좋은 것은 당최 기억이 나지 않고 나쁜 것들만 생각이 났다. 하지만 또 푸념은 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스크래치 났다고 아프다고 보듬어달라고 하면 철 못 들어서 우는 소리 한다며 핀잔만 주는 사람들 사이에서 너무 오래 시달려왔다. 한국에서는 스크래치를 서로 내고, 그걸 안고 가는 게 정상이다. 아프다고 하면 다들 그런 거라며 조용하라는 소리를 하고, 신나고 좋다고 얘기하면 잘난척한다고 몰아세운다. 그러면 말을 하는 것이 즐겁지 않다. 언젠가부터 대충 말하는 습관이 생겼고 그런 습관은 비엔나 아니라 우주에 간다고 해도 없어질 리 만무했다. 이번에도 나는 안전한 노선을 택했다.

"매일 똑같아. 별로 행복하지는 않아"

지난 3년이 줄곧 내리막길은 아니었지만 실패도 몇 번 했고, 무엇보다 내가 장기적으로 원하는 삶에서는 점점 멀어지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 울적했다. 하지만 그냥 하는 인사말에서 내 울적함을 감지해내는 이는 별로 없었다. 좀 볼멘소리를 해도 회사 생활하면 다들 하게 마련인 불평이라고 생각했으리라. 그래서인지 더더욱 그의 반응에 놀랐다. 짧은 한 마디로도 3년 동안 폭삭 주저앉은 나를 그는 그대로 꿰뚫어 봤다.


"너 왜 이렇게 변했니. 자신감 좀 가져. 이젠 정신 차릴 때도 됐잖아"


너는 얼마나 잘났다고... 하는 치졸한 기분이 들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걔는 잘났다..). 자존심도 상하고, 벌거벗은 것 같아 창피하고, 무엇보다 지나간 세월에 대한 회한과 화가 밀려와 앞에 놓인 술을 급히 마시기 시작했다. 취하고 싶었다. 시간에 나를 묻어버리면 자신감 없는 스스로도, 약해진 스스로도, 내 앞에 앉아있는 사람과의 3년도 기억나지 않을 것 같았다. 밤은 제법 쌀쌀했고 우리는 길을 몰라 무척이나 헤맸다. 노란 가로등 불빛만 가득한 텅 빈 거리를 끝도 없이 걸었는데 지나가는 사람 하나 없었다. 광장, 계단, 분수, 다누브 강변, 다시 계단, 거리, 광장..


"추워......"

내가 말했다.


"이거 입을래?"

"응 내놔...."

"그거 얼마 짜린지 아냐 곱게 입어라~ "

"H&M 아니었어? 옷걸이가 구려서 싼 건 줄 알았..... (버버리였다, 말도 안 돼)"


더 비틀거리는 나를 보며 그가 말했다.


"팔을 줄까?"

"진짜냐? 근데 내가 널 어떻게 믿어?"

"그러다 쓰러지면 버리고 간다"

"팔도 내놔 그럼."


호텔 앞에서였던 것 같다. 옷을 벗어주고 바꿔 입으려던 차에 드러난 내 팔을 걔가 잡았던 건. 그리고 깍지손을 끼더라. 흑역사가 있으면 어떤가. 나는 술에 취해 있었고, 거긴 비엔나였다. 그리고 가로등 불빛은 그 모든 것이 현실이라고 믿기에는 너무 노랬다.




다음날, 6층에 있는 그의 방문을 열자 장관이 펼쳐졌다. 긴 창틀 사이로 그보다 더 긴 하얀 커튼이 안쪽으로 정신없이 나부끼고 있었다. 파리처럼 낮은 건물만 가득한 비엔나인지라 창문 너머로는 하늘과 교회 종탑만 간간이 보였다.


침대에 한참을 누워 옛날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나선 비엔나 거리는 이상하게 화창했다. 까페에 앉아 앞펠슈트루델을 놓고 우리 입에서 나온 첫마디는 Novelty wears out이었다. 지금은 이렇게 먹어대는 이 애플파이도 곧 질리겠지 하면서.

우리는 새로운 것을 끊임없이 열망하는 사람들이지만 새로움에서 오는 신선함이 금방 닳아버린다는 사실에 슬퍼하는 작은 존재였다. 더구나 이젠 삶에서 때때로 찾아오는 자극에조차 반응이 무뎌지고, 새로운 것에 대한 기대조차 희미해진다. 심장은 관성에 따라 계속 새로운 쿵쾅거림을 원하지만, 약아빠진 뇌는 novelty wears out을 되뇌며 쿵쾅거림이 아닌 건조함만 있는 곳으로 우리를 이끈다. 1800년대 텍사스 어딘가의 농장주로 태어났다면, 드넓은 평원에 만족하며 이런 고민 따위는 없이 살았겠지? 내가 물었다. 그의 대답은 간단했다. 이건 그냥 피 안에 있는 거야 우리가 세상 어디에서 어떤 모습으로 살든 이 기질은 피 안에 남아 우리를 괴롭힐 거야.


신선함이 다 닳아버렸다고 칭얼대는 이들에게 남은 여행 방식은 별로 없다. 그냥 무작정 걷고 지겨울 정도로 얘기를 하는 것 외에는. 막다른 골목이 나오면, 자 지금까진 북쪽으로 걸었으니 이번엔 동쪽으로 걸어보자. 아이스크림 먹고 싶으면 사 먹고, 우스꽝스럽게 하고 다니는 관광객 험담을 보러(?) 성당 종탑에도 올라가서 바람을 맞았다. 그리 로맨틱한 얘기는 성격상 못하고, 너 그딴 식으로 말하면 내가 널 잡아 북한에 버리고 올 거다, 넌 '남한 불손 사상에 물든 자본주의 허영아'로 동물원에 전시될 거다, 너인들 무사할 줄 아냐 멍청아. 뭐 이런 이야기.

낮은 아치로 건물이 연결된 다리에서는 아 인셉션 같아, 여기 널 밀어 떨어뜨리고 경찰에 신고 안 하고 도망가면 재밌겠다, 같은 거.


그렇게 시청(Rathaus)까지 걸었다. 쥐(rat)가 많은 집(haus)이어서 rathaus라는 이 멍청이의 설명과는 달리, 시청 주변엔 깨끗한 잔디밭이 펼쳐져있었고 쥐는 보이지 않았다. 드러눕자 바람이 조금씩 불었고, 눈을 감아도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살 얼룩이 보였다. 한심하다는 듯이 바라보면서 옆에 앉아있던 그가 갑자기 물었다.


"너 배 베고 누워도 돼?"


니 머리가 너무 무거워서 나 화장실 가고 싶어...라는 악성 농담을 던질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그의 오른손이 내 오른손을 찾아 꼭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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