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정연 Oct 19. 2020

시험 잘 보는 사람이 인재일까


나는 입시공부에 대해서 그리 썩 좋게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그렇다고해서 그걸 전면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입시 공부를 통해 배운 것이 없다면 그것도 거짓말이다. 그리고 나도 중학교때 연합고사부터 시작해서 대입, 교사시험 등 굵직한 시험은 다 거치고 이 자리에 있다. 입시나 고시를 거치고 직업을 얻은 사람이 입시가 문제다라고만 말 하는 것도 모순이 있긴 마찬가지다.


그러나 생각해보자.  내가 대입을 치른지는 근 30년이 돼가고 교사자격시험을 치른지는 20년이 지났음에도 자격을 치르는 시험은 오히려 시대를 거스를 정도로 너무나 많은 시간과 돈, 에너지를 쏟게 한다. 학생들을 유치원때부터 긴 시간 질질 끌어가면서 바보로 만들고 있으면서 개혁하고 싶어도 어쩔 수 없는 현실이라고 말한다.  모두가 이게 지옥이라고 느끼면서 왜 해가 갈수록 지옥으로 달려드는 것일까? 이젠 꼬이고 꼬인 이 시스템은 혁명을 일으키지 않고는 변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난, 이 버블처럼 쌓인 이 모순도 언젠가는 터질 것으로 보고 있다.


첫째, 한국사회의 가치관의 확장에서 실패했다. 공교육 현장은 다양성을 중시하자, 서로 다름을 인정하자고 계획하고 주도하는데 사람들의 인식수준은 그저 하나다. 그저 시험봐서 자신의 인생을 결정하는 것에 암묵적으로 따르고 동의한다. 이런 사고를 가진 사람들이 지식인이고 학자고 선생이고 그렇다. 시험점수로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는 것에 익숙하고  그걸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문화가 있다.  그래서 결국 사람들이 가려는 길은 하나로 모아진다. 그리고 비교적 이른 시기에 결정된다. 한국은 유럽이나 미국처럼 장기학습 가능성이 열린 사회가 아니다. 공부하나로 단기에 인생을 결정하는  한 길 가치관을 가지고 자녀를 키우니까 강남으로 가고 8학군 찾는 것이다. 그걸로 가장 아이를 위해서 좋은 환경을 제공한다고 생각한다. 시험점수가 높을 동네에 가서 살면 옆, 뒷집 친구들을 보면서 영향을 받아 자녀의 시험점수를 높일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 문화가 저변에 널린 지역을 좋은 동네라고 규정한다.  들여다보면 인생의 가치관은 하나인데 말이다. 이게 지금 40대 이상 부모들의 지배적인 생각이다. 그들부터가 그런 단일화된 문화 속에서 자라왔기때문에 세상이 바뀌어도 자녀들에게 새로운 삶의 대안을 제시하거나 스스로 다양한 가치관에 젖어들거나 받아들이는 부모가 되긴 요원해 보인다. 차라리 바뀐 세상을 부모인 나부터 잘 모르겠다고 인정하면 될 일이다. 그런데 한국에선 자식 앞에서 부모의 한계를 쉽게 드러내지 않는 권위적인 문화가 아주 짙다. 그렇게 자기 한계를 인식하지 못하면 그들에게는 자녀들에게 하는 '억압'도 '교육'이 된다. 한국의 부모들이 잔소리가 많아지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인식의 확장은 경험과 자기파괴에서 먼저 비롯되는데 경험, 자기 파괴는 고사하고 자기 지키기, 또는 기득권 지키기에 바쁘면서 자녀들에겐 '독립' 과 '창의성'을 강조한다. 내놓는다는 대안이 결국 자기주도적 학습능력을 키워준다는 학원, 창의성을 길러준다는 학원을 찾는 수준에 머문다.


둘째, 이 나라에서 우수한 인재란 그래서 대부분은 어려운 문제를 잘푸는 학생을 일컫는다.  어려운 문제를 잘풀려면 고득점이 필요한 주요 교과에 대하여는 이미 출제된 문제 유형을 열심히 반복해서 풀어보고 답을 찾는 요령이나 잔꾀를 터득하며 속도를 높여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선행학습도 가열차게 해야한다. 호기심 있어서 그 다음을 알고자 하는 게 아니고 그저 남보다 빨리 풀려면 남보다 많이 알아야 하니까. 한국의 선행학습이 곧 영재교육이 되는데는 그런 이유가 있다. 남보다 빨리 푸는 것이 목적이다. 따라서 이 나라에서 우수한 인재는 비비꼬아놓은 어려운 문제를 빠른 속도로 풀어서 답을 찾는 훈련에 최적화된 사람을 일컫는다. 학원교육은 그 기술을 가르쳐주는 곳이다. 영어만 보더라도 그렇다. 생활에서 거의 쓰지 않는 문법이나 어휘를 알고 있다면 시험문제를 푸는데는 훨씬 도움이 되기 때문에 그런 걸 익히고 있는 학생들을 보면  영어를 잘한다고 생각한다. 시험문제 영어를 잘 푸는 것과 현실에서 쉬운 단어, 활용력이 높은 어휘로 의사소통기술을 익히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다. 전자의 방식에 최적화된 사람이 유학가서, 외국인들이 많은 자리에 가서 토의토론이나 발표를 잘할 수 있을까? 자기 의사표현을 리드미컬하게 잘해낼 수 있을까? 영어를 구사하면서 기회를 잡을 수 있을까? 대개는 듣고 남의 생각 받아들이는 것에서 끝날 가능성이 크다. 자기표현도 연습과 신체를 동반한 훈련이고 숱한 실패를 겪어야 나오는 것이다. 단순히 오답체크해서 다음에 안 틀리게 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문제다.  그럴 시간에 모국어로 더 충분히 생각하고 읽고 쓰고 말하는 연습을 더 늘리라고 하고 싶다. 현재 고등학교 입시영어나 내신등급 산출용 시험영어는 거의 패망수준이다. 외국어로 의사소통능력을 멋지게 발휘할 학생들의 잠재력까지 망치는 영어다.


셋째, 위의 두가지 이유로 대다수 청소년기의 아이들은 진로교육을 직업교육이나 입시교육으로 생각한다. 어릴때 시험 점수로 직업군을 점수에 맞춰서 결정하고 거기에 자아를 꿰어 맞춘다. 진정한 자아발견? 시험공부에 코가 꿰어서 남이 알려준대로 살았는데 자기 스스로의 관점을 가지고 세상탐험이 가능할까?  뭘 해본 게 있어야 탐험도 가능한 거고 뭘 해봤던들 누가 뒤에서 쫓아올 거 같은 불안함에 제대로나 해봤을까? 마음이 편하길 하나, 시간이 자유롭길 하나. 점수로 한 줄 세우기 해서 탑이면 의대가는 것이 대표적인 현상이다. 특목, 과학고입시가 의대로 가기 위한 전초전이라는 것은 초등학생도 알고 있을 정도다. 그렇게 뼈빠지게 코박고 공부해서 의대갔더니 시대와 환경이 바뀌어 지방에 의사가 부족해서 국가에서 더 뽑겠다고 하니까 반발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전교1등 의사 소리를 남발하는 것이다. 어려서부터 그런 교육을 받으며 의대를 갔으니 결국 의사도 노동자일 뿐인 것. 나는 의사뿐만 아니라 나와 같이 공공영역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그저 노동자 수준에서 인생을 바라본다면 행복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자신을 노동자 그 이상으로 생각하지 않는 것은 따지고 보면 자신의 가치를 돈과 직업적 안정성 수준에서만 바라보는 것이다. 이런 입시풍토에서 나온 것이다.


마지막으로 안타까운 건, 이런 시험만능주의 풍토를 진짜 재능있고 창의적이며 혁신적인 생각을 가진 학생들이 이길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 그런 학생들은 순한 양처럼 길들여지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다. 이걸 한국의 지식인이나 학자, 탄탄한 기초를 탑재하고 있는 필드 전문가들이 모르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대학도 마찬가지. 그런데도 수많은 혁신적인 청소년들이 좌절하고 방황하며 도전도 하기 전에 포기한다.  고루한 대다수의 기성세대 때문에. 시험공부머리가 필요한 것이 아니고 일머리가 필요한 시대다. 시험만 잘보는 사람이 인재가 될 수 없는 이유다.





작가의 이전글 학생중심 수업이란 것에 대하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