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연출 6년 중 거의 4년을 사극 혹은 시대극에 참여했다. 처음에는 나쁘지 않았다. 다년간의 엑스트라 경험을 통해 쌓은 노하우도 있었고, 여러 시대를 경험하는 것도 재밌으니까. 하지만 충분히 했음에도 불구하고 회사는 계속 내게 사극을 시켰다.
나도 현대극 한 번 해보고 싶은데...
샤방샤방한 20대 남녀가 카페에서 달달한 라떼 시켜놓고 입술에 크림 묻혀가며 꽁냥꽁냥 거리는 거 나도 엄청 좋아하는데...
내 외모가 주막에서 막걸리 잘 먹게 생겼나? 아니면 사극의 명맥을 이어나갈 연출로 날 생각하는 건가?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나 혼자 독점하다시피 한 가장 큰 이유는 다른 조연출들 그 누구도 사극을 맡지 않으려 했다는 점이다. 배정 시기가 올 때마다 다들 눈치를 보면서 말도 안 되는 변명을 늘어놓았다. 도대체 왜 다들 그렇게 하기 싫어하냐고?
사극 특성상 지방 촬영을 갈 수밖에 없는데 그러면 화려한(?) 도시 생활과 멀어지게 된다. 5박 6일, 8박 9일 그런 식으로 1년 가까이 전국을 떠돌며 촬영하다 보면 온 몸에는 흙냄새와 말똥 냄새가 가득했다. 게다가 사극 특징상 산 깊숙한 곳에서 촬영하는 경우가 많은데 겨울 영하 20~30도 되는 곳에서 하루 종일 촬영하다 보면 정말 말 그대로 온몸이 꽁꽁 얼어버린다. 조연출은 관습상(?) 촬영 내내 무조건 서있어야 하는데 그러다 보면 촬영 끝나고 신발을 제대로 벗을 수 없다. 왜냐? 발가락이 동상 걸려버려서.
게다가 유일한 휴식시간인 식사시간에 밥차에 가보면 맹추위에 밥과 국이 꽝꽝 얼어있다. 딱딱한 얼음밥을 혀로 녹이고 있노라면 내가 지금 밥을 먹는 건지! 아님 북극곰 간식을 먹고 있는 건지! 헷갈릴 때가 많다.
현장에서 찍은 사진
그래도 사극을 하다 보면 별 희한한 일을 겪을 때가 많다.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서 그런가! 아니면 과거 일을 그대로 재현해서 그런가! 남들이 평생에 한 번 겪을까 말까 한 일을 매주 겪게 된다. 오늘은 그때 겪었던 희한한 경험에 대해 한 번 썰을 풀어볼까 한다.
예전에 <대왕의 꿈>이라는 대하드라마 조연출을 했다. 그때 연출 선배는 동물을 너무너무 사랑하시는 분이었다. 한 번은 벽란도 시장 장면을 찍기 위해서 우리는 비단뱀, 낙타, 원숭이, 말과 소 등을 한꺼번에 불렀다. 대본에는 그저 수많은 외국인들이 북적거린다고 되어있는데 선배는 이국적이면서도 이색적인 모습을 연출하고 싶다 하셔서 그렇게 수많은 동물들을 부르게 된 것이다. 목에 비단뱀을 칭칭 감고 춤추는 무희를 촬영하며 선배는 어린아이처럼 손뼉을 치며 너무나도 즐거워하셨다. 정작 옆에 있는 나는 엄청난 몸값을(?) 자랑하는 동물들이 혹여나 다칠까 봐 조마조마했지만 말이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대본을 보던 나는 턱이 빠질 정도로 깜짝 놀랐다. 분명 활자로 <우리에 갇힌 호랑이가 포효하자 신라 병사가 깜짝 놀라며 뒤로 자빠진다.>라는 지문이 있었으니까. 작가가 무슨 생각으로 이런 걸 썼을까?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나는 선배를 찾아갔다.
“선배!! 이거 어.. 떻게 찍으실 거예요?”
“오잉.. 오잉... 어떻게 찍긴 있는 그대로 찍어야지. 오잉 오잉.”
안 그래도 큰 눈을 깜빡이며 선배는 순진무구한 표정을 지으셨다.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였다. 도대체 어디서 호랑이를 데리고 오지? 연출부랑 나는 한숨을 쉬면서 이곳저곳 연락을 돌렸다. 예상대로 쉽지 않았다. 동물원에도 서커스단에도 힘들다는 연락을 받았다. 돈을 올려봐도 마찬가지였다. 솔직히 걱정도 되었다. 이러다 행여 호랑이가 우리를 탈출해서 스태프나 연기자를 깨물면 진짜 큰일이니까. 그래서 상황을 설명드리며 “혹시 CG로 하면 어떨까요?”라고 조심스레 여쭤봤지만 선배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으셨다.
맞는 말씀이었다. 턱없이 부족한 제작비에 영화만큼 좋은 CG 퀄리티를 기대하기란 힘든 노릇이었다.
‘그럼 당최 호랑이를 어디서 구해온단 말인가!’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백두산에 올라가서 매복하고 있을까? 떡 하나 들고 과거시험 보는 척할까? 그것도 아니면 차라리 내가 호랑이 탈 쓰고 포효하면 안 될까? 그런 말도 안 되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그러다가 우여곡절 끝에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촬영용 호랑이 한 마리 데려올 수 있었다. 단 하루 3시간 촬영 조건으로 무려 500만 원의 거금을 내야 했다. 서둘러 배편을 마련하고 정부와 검역당국에 신고하고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서 수의사와 앰뷸런스까지 불렀다.
그리고 드디어 몸값 비싼 우리의 호랑이 배우님은 산 넘고 물 건너 촬영장까지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다. 케이지가 달린 특수차가 오자 모든 스태프와 연기자들은 초긴장 상태로 변했다. 하지만 상상했던 포효 소리는 들을 수 없었다. 전문 수의사가 마취총으로 호랑이를 미리 기절시켰단다. 문이 열리고 거의 300KG에 육박하는 호랑이가 우리 눈앞에 그 모습을드러냈다.
‘세상에나... 살아생전에 살아있는 호랑이를 이렇게 코앞에서 보게 되다니.’
두려움 때문인가! 아니면 위압감 때문인가! 우리는 다들 입을 벌리고 감탄사를 내뱉었다.
“진.. 짜 기절한 거 맞죠?”
“네. 맞아요. 독한 걸로 두 방 쐈어요.”
긴가민가했지만 우리 스태프들은 기절한 호랑이를 다 같이 들고 신라시대 컨셉의 우리에 넣어야 했다. 수의사가 먼저 솔선수범을 보였고 내가 뒤를 이었으며 나머지 스태프들도 다가왔다. 호랑이는 장정 10명이 들어야 겨우 들 수 있을 정도로 아주 육중한 녀석이었다. 하필 내가 호랑이 앞발을 들고 있는지라 바들바들 온몸이 떨렸다. 내 덩치의 3배 정도 되는 녀석이 갑자기 깨어나서 어깨를 깨물기라도 하면 어떡하지? 나는 금세라도 까무러칠 준비가 되어있었다. 다행히 혼절할 필요 없이(?) 잘 옮겨놓았다.
내가 연출하는 모습
하지만 문제는 그다음부터였다. 너무 마취를 세게 했나? 20분이 지나고 30분이 지났지만 호랑이는 좀처럼 일어날 생각이 없었다. 딱 3시간만 빌리기로 했는데... 수의사 말로는 이제 일어날 때 되었다는데... 어떻게 된 거지?
동물의 왕 호랑이가 뭐 저렇게 약하대? 문득 진짜 호랑이가 맞나 의심되기도 했다. 운동 열심히 해서 벌크업된 고양이 아니야? 얼굴에 있는 검은 왕자 무늬, 껌칼로 한번 사악 긁으면 떼어질 것 같기도 했고. (하지만 차마 그럴 용기는 없었기에) 우리는 하릴 수 없이 뙤약볕에서 한참 동안 기다렸고 그렇게 한 시간이 지나자 연출 선배는 안달이 났다.
“오잉.. 빨리 호랑이 좀 깨워봐라. 이러다 해 지겠다!! 오잉 오잉.”
오후 2시에 해가 질리는 없지만 나 역시 초조하긴 마찬가지였다. 오늘 못 찍으면 피 같은 돈 500만 원이 날아가 버리니까.
‘가죽만 빌려줘 호랑이야. 내가 어흥! 하고 금방 다시 돌려줄게.’
그렇게 애원했지만 애석하게도 호랑이는 자느라 내 말을 들을 수 없었다.
“빨리 뭐하냐? 깨워보라고. 오잉 오잉.”
다시 한번 연출 선배가 재촉하자 나는 어쩔 수 없이 호랑이 우리로 다가갔다. 어떻게 깨울까 고민하다가... 옆에 놓인 소품용 창을 들었다. (아내 깨우듯 손으로 어깨 두드릴 수 없으므로) 그리고 우리 사이로 뭉특한 창끝을 조금씩 밀어 넣었다. 두려움에 이가 사시나무처럼 달달 떨렸지만 어쩔 수 없었다. 갑자기 벌떡 일어나 날카로운 발톱 휘두르면 어쩌지? 이러다가 호랑이에게 물리면 보험 적용이 될까? 이건 대인인가? 아니면 대물인가? 산재인가? 호재인가? 어디 한방병원에 입원하면 좋으려나? 수많은 가정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부질없는 생각이었다. 앞발 한 방이면 내 얼굴은 호빵맨처럼 통째로 사라질 게 분명했으니까.
침을 꿀꺽 삼키며 멀리서 호랑이 꼬리를 창으로 톡톡 찔렀다. 하지만 너무 소심하게 찔렀나! 호랑이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반응이 없기에 나는 점점 과감해져서 몸통 쪽으로 창끝을 옮겼다. 7번 갈비뼈, 소고기로 따진다면 횡격막 근처 안창살 쪽이었다. 하지만 둔감한 건지 아니면 가소로운 건지 이번에도 녀석은 별 반응이 없었다. 그저 축 쳐진 채 코만 드르렁 골고 있을 뿐이었다.
‘어쩌지? 호랑이 기운이 솟아나게 콘푸로스트라도 사서 먹여야 하나?’
시계를 보니 이제 40분밖에 안 남았다. 어떻게 데려온 건데... 그 생고생을 다시 하고 싶지 않았다. 안 되겠다 싶은 나는 서둘러 FD(진행요원)들을 불렀다. 그리고 우리는 원을 그리며 우리에 창을 넣고 호랑이를 톡톡 찔렀다. 그렇게 집단 다구리(?)를 하고 있는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이러고 있는 걸 엄마도 알까?’
아들 방송국에 들어갔다고 엄청 좋아하셨는데... 가죽재킷 휘날리며 드라마 현장을 진두지휘할 거라고 생각하실 텐데...
“아들 요즘 뭐해?”
“창으로 호랑이 찌르고 있어요.”
“또? 저번에는 올무로 멧돼지 잡았다면서.
“네. 잠 안 자고 열심히 공부했더니 이렇게 동물들과 적극적으로 교감하게 되네요.”
“장하다! 우리 아들. 백일잔치 때 펜 말고 창 잡더니 역시 이렇게 될 줄 알았어.”
깔깔깔 웃으며 장난치는 엄마 목소리가 귓가에서 들리자 나는 이를 악물며 호랑이의 앞발을 강하게 내리쳤다. 그제야 호랑이가 번쩍 눈을 떴다. 허걱! 도깨비불 같은 안광이 코끝에 걸려있었다. 그 엄청난 위압감에 나는 깜짝 놀라서 뒤로 물러났다. 호랑이는 천천히 일어나더니 우리를 향해 조금씩 다가왔다.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아! 호랑이 아니 호 선생님! 죄송합니다. 일부러 그러려고 그런 건 아니고요. 저렇게 추운 데서 자시면 입 돌아갈 것 같아서...’
말도 안 되는 변명을 해봤지만 호랑이는 그저 으르르르렁 거리며 날 노려볼 뿐이었다. 심기가 불편하신 게 분명했다. 뒷걸음질 치며 뒤를 바라보니 다른 스태프 모두 겁을 먹고 저 멀리 도망간 상태였다. 옆에 있던 FD들도 그새 다 어디로 튀었는지 보이지 않았다. 그때 알 수 있었다. 불법 비디오가 호환마마보다 더 무섭다던 어른들의 말이 얼마나 새빨간 거짓말인지.
“그래! 좋아!! 좋아.. 오잉 오잉!”
하지만 단 한 명 신난 사람이 있었으니 그는 바로 연출 선배였다. 그는 호랑이가 일어나자 격양된 목소리로 촬영감독에게 빨리 찍으라고 소리쳤다. 촬영감독은 얼어붙은 채 빨간 버튼을 눌렀고 나는 재빨리 그의 뒤로 숨었다. (카메라에 나오면 안 되니까)
하지만 막상 촬영이 시작되자 호랑이는 우리 주위를 어슬렁거릴 뿐 포효하지 않았다. MBTI가 I로 시작하는가? 멍석 깔아주니 못하네. 그러자 선배는 다시 안달이 났다.
“윤석아! 안 되겠다. 더 찔러. 더 찌르라고... 꼬리를 잡고 휘감고 돌려!!”
마치 권투 중계 시합을 하듯 선배는 흥분해서 내게 소리치셨다. 무서워서 오줌 쌀 것 같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다가가서 계속 호랑이를 창끝으로 쿡쿡 찔렀다. 이번에는 늑간살 제비추리 쪽이었다. 호랑이는 ‘또 너야?’라는 식으로 나를 노려보았고 나는 ‘아까 그 사람은 저랑 많이 닮은 사람입니다!’라는 표정으로 그에게 읍소했다. 결국 약이 오른 호랑이가 내게 달려들었다. 당장이라도 우리를 깨부수고 나올 것 같은 포스였다. 으르르르릉!! 사나운 포효 소리가 귓가를 진동했다.
“근데 조연출이 비켜야지 촬영할 수 있잖아?”
촬영감독이 그렇게 말하자 연출 선배는 잠시 고민하더니 나보고 빨리 신라병사 옷으로 갈아입으라 하셨다.
“여... 기서요?”
“그래. 빨리빨리.. 오잉 오잉!!”
의상팀이 내게 옷을 가져다주었고 나는 거기서 주섬주섬 신라병사 옷으로 환복 했다. 호랑이 앞에서 스트립쇼 하기 싫었는데... 호랑이는 주위를 어슬렁 거리며 이런 날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쳐다보았다.어흥! 소리가 왠지 캣콜링 처럼 느켜졌다.
이제 촬영 종료까지 20분 정도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하나 둘 셋 하이 큐!! 큐!!!”
선배는 큐를 외쳤고 나는 모르겠다! 눈을 질끈 감고 창으로 호랑이를 제대로 찔렀다. 호랑이는 포효하며 날 향해 앞발을 들었고 이에 놀란 나는 혼비백산하며 뒤로 꽈당! 넘어졌다. 이렇게 리얼한 연기는 명배우 '다니엘 데이 루이스'조차 할 수 없는 메소드 그 자체였다.
“지금 딱 좋아!! 그래!! 오케이 좋아... 오잉 오잉!!”
선배 역시 포효하며 오케이 싸인을 보냈고, 나와 호랑이는 잘했다며 서로의 어깨를 토닥... 일 수 없으니 나는 카메라 밖으로 서둘러 뛰쳐나갔다. 정말 너무 너무 무서웠지만 그래도 무사히 끝났다는 개운함이 더 컸다. 그 단사이 이슬이 떨어졌는지 바지가 축축했지만 걷는 데는 지장이 없었다.
그리고 그때 그 장면은 고스란히 전파를 타고 전국으로 방송되었다. 불과 2달 전만 해도 신라의 제25대 군주 진지왕으로 멋있게 등장했는데, 이렇게 신라 병졸이 되어서 초라하게 퇴장하다니... 이보다 더 극적인 사극 인생은 없겠다! 싶었다.
진지왕으로 출연한 나
며칠 전 내 에세이 책 <당신이 있어 참 좋다>를 읽으신 선배는 “오잉오잉~ 넘 잘 읽었다. 윤석아!” 이러면서 5권이나 사주셨다. 배우들이 들고 있는 인증샷도 찍어서 보내주셨다.
“감사해요. 선배. 그리고 넷플릭스 기사 봤어요. 너무너무 축하드려요^^”라고 나도 당신에게 답문을 드렸다. 넷플릭스에서 <신사와 아가씨>라는 작품이 글로벌 순위 3위를 기록하고 있었으니까. 다른 선후배들 작품이 잘 되면 축하하면서 동시에 배 아플 때가 있는데 (나도 인간인지라) 존경하는 선배가 이렇게 잘 되는 것을 보니 순도 100퍼센트로 너무너무 기뻤다.
하지만 그때의 충격 때문일까? 아직도 선배 얼굴을 보면 우리에서 포효하던 호랑이 얼굴이 겹쳐져서 나도 모르게 침이 질질 새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