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초이스 Feb 03. 2023

냉정과 열정 사이 하나 둘 셋 큐!!

         

    찬바람이 쌩쌩 불어오는 1월의 인천의 차이나타운, 막내 제작피디가 내게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차 한 잔 건넨다.

   “감독님! 여기 따뜻한 캐모마일이요.”

   “엉 고마워.”

   한 모금 마시려고 입에 갖다 대는데 내 앞 모니터 위로 빨간 REC 마크가 뜬다. 촬영이 시작되었다는 표시다. 본능적으로 나는 “하나 둘 셋 큐!” 소리 높여 외친다.


    모니터 속 프로파일러로 분한 배우는 안경 너머 냉철한 눈빛으로 범죄 현장의 증거를 면밀히 살펴본다. 바닥에 떨어진 담배꽁초를 핀셋으로 집은 그는 진중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한다.

   “발화지점은 여기서부터 시작된 게 분명합니다. 범인은 30대 초반의 남자로 보이며....”

   “컷컷!!”

   나는 무전기에 대고 컷을 외친다. 절대 연기가 이상하거나 대사가 틀려서 그런 게 아니다. 형님은 늘 그렇듯 연기를 맛깔나게 잘하신다. 문제는 입김이었다. 날씨가 어찌나 추운지 대사를 칠 때마다 입에서 입김이 사정없이 뿜어져 나오는 게 마치 용가리 같다. 혹시나 해서 두 번째 테이크를 가봤지만 역시나였다. 이번에는 마치 입김이 아수라 백작처럼 거의 얼굴 반을 가렸다. 안 되겠다 싶어 서둘러 형님에게 다가가니 얇은 코트 하나 입고 달달 떨고 있는 그의 볼이 마치 홍시마냥 벌겋게 익었다.


   “얼굴이 하나도 안 보여서요. 형님! 안에 들어가서 잠깐만 쉬고 계시겠어요?”

   그러나 형님은 기다렸다는 듯 주변 카페 안으로 들어간다. 일기예보에서 날씨가 춥다 했는데 이 정도로 추울 줄이야! 체감 온도 영하 23도라 한다. 그래서 그런지 주위에 행인 한 명 찾아볼 수 없다.

   어떻게 하면 입김을 줄일까 고민하다가 진행팀에게 따뜻한 물을 준비하라고 시켰다. 촬영 직전에 머금고 있으면 그래도 좀 나으니까. (조연출 때 배운 바로는 이럴 땐 얼음 물고 대사 치면 되지만 이 추위에 차마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


    촬영이 재개되자 형님은 다시 혼신의 힘을 다해서 연기를 했다. 하지만 문제는 처음에는 입김이 덜 나오지만 대사가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마치 옆에서 누가 취사버튼이라도 누른 듯 입김이 점점 강하게 뿜어져 나온다는 점이다. 드라마 설정 상 배경이 늦가을이었기에 입김은 허용되지 않았다. 어떻게 해야 하나 나는 고민에 잠겼다.


    다른 씬 같으면 세트로 돌리거나 혹은 배경을 카페로 바꿀 수 있는데 (갑작스레 비가 오면 상황을 수정해서 실내 씬으로 돌리곤 한다) 장르가 추리수사물이다 보니 그럴 수도 없었다.  이걸 어쩌지? 다른 날에 촬영해야 하나? 아니면 입김을 CG로 지울 수 있나? 특영팀을 불러서 물어보니 이거는 ‘반지의 제왕’ 팀도 못 한다고 한다. 그러면 어쩌지? 지근거리는 머리를 누르면서 옆에 놓인 차를 홀짝이는데... 어! 내 캐모마일에 살얼음이 동동 떠 있는 게 아닌가! 아까 분명 따뜻하다 못해 뜨거웠는데.

   “와!! 세상에....”

   이런 날씨에 촬영하는 건 정말 인권 유린 아닌가! 화가 났다.      


    그런데 웃긴 것은 오늘 여기서 촬영하자고 한 사람은 다름 아닌 바로 나다. 물론 섭외부장이 장소를 추천해 줬고, FD가 배우 일정을 잡아 촬영 스케줄을 잡았지만 최종 컨펌을 하는 것은 연출인 나다. 매번 이렇게 고생할 것을 알면서도 나는 좀 멀더라도 좀 더 고되더라도 배우와 배경이 잘 어울릴 수 있는 곳, 즉 속된 말로 ‘그림 좋은 곳’을 택한다. 이런 상황이 반복되다 보니 나는 마치 골룸처럼 연출인 자아와 일반인 최윤석으로 나뉘어 계속 싸우게 된다.


   “야! 인간적으로 이건 아니지? 이렇게 추운 데를 왜 잡았어?”

   “그럼 대충 아무 데서나 찍으려고? 이렇게 고생해야 그림이 좋다니까!!”

   “야! 그림이고 자시고 배우들 입김 봐봐! 누가 보면 성대에 가습기 틀어놓은 줄 알겠다!”

   “시청자들을 위해 최선을 다해야지? 그게 우리 역할 아니야?”

   “지금 저 스태프들을 보고서도 그런 말이 나와?”


   주변을 돌아보니 조명, 장비, 동시녹음, 분장, 미용, 의상 등등 50명이 넘는 스태프들의 시선이 느껴진다. 다들 몇 시간 동안 냉동고 같은 곳에서 촬영하다 보니 얼굴이 파랗게 질려있다. 기분 탓일까? 후드 아래 눈빛이 나를 째려보는 것 같다. 안 되겠다 싶어 조금 이른 점심을 먹자고 했다. 오후 되면 기온이 올라갈 거고 그러면 촬영이 조금 더 용이해지지 않을까 생각 끝에 내린 결정이다. 식당에 가서 두꺼운 외투를 벗는데 옆에 있던 촬영 감독이 이렇게 말한다.


   “어찌 보면 우리 입장에서는 통일 안 되는 게 천만다행이야!”

   “왜요?”

   “통일되면 이 추운 날씨에 개마고원 올라갔을 거 아니야!”

   맞는 말이다. 아마 우리뿐만 아니라 모든 촬영팀은 더 좋은 그림을 얻을 수만 있다면 개마고원 아니, 남극까지 가는데 주저하지 않았을 거다.      


    촬영하기 힘든 것은 비단 겨울뿐만 아니다. 여름도 마찬가지다. 7~8월 30도 넘는 뙤약볕에 반나절 내내 노출되어 있으면 온몸이 익다 못해 녹아내리는 느낌이다. 겨울은 뭐라도 껴입으면 되지만 여름에는 마냥 벗을 수도 없고 (속옷 입고 촬영할 수는 없으니까) 심지어는 동시녹음에 방해되기에 선풍기도 켤 수 없다.


    예전 대하 사극 조연출 할 때다. 35도에 육박하는 날씨에 우리는 그늘 한 점 찾을 수 없는 광활한 초원에서 대규모 전투신을 찍어야 했다. 스태프들은 가만히 있으니 그나마 살만 했다. 문제는 무거운 갑옷을 입고 수십 번 칼과 창을 휘두르는 연기자와 보조출연자였다. 일사병 걸릴까 봐 걱정된 우리는 생수와 소금사탕을 사서 일일이 나눠주었다. 하지만 촬영은 생각 이상으로 지연되었고 결국 스태프와 연기자들은 한두 명씩 픽픽 쓰러져 나갔다. 탈진한 그들을 업고 의료진에게 수차례 오가던 나도 결국 더위를 먹고 쓰러지고 말았다.


    혹자는 이렇게 물을 것이다. 왜 굳이 그런 날에 촬영을 하냐고? 물론 우리도 좋은 날씨에 맞춰 촬영하고 싶다. 하지만 비나 눈 오는 날을 제외하고 (그런 날 촬영하면 카메라와 조명기구가 고장 나고, 또 모든 컷을 시간 순서로 찍는 게 아니기에 화면이 튈 수 있다. 비 내리는 씬이나 눈 오는 씬은 강우기나 강설기를 통해서 인공적으로 만든다) 수많은 배우들 스케줄을 다 맞춘 상태에서 장소 대여 시간까지 정해져 있으니 우리도 ‘울며 겨자 먹기’로 찍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게다가 예전에는 방송 두 달 전에 촬영 들어가는 게 일반적이었기에 더 시간에 쫓기며 촬영했다.    

 

   이렇듯 우리나라에서 드라마 찍는 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너무 덥고 또 너무 추우니까. 최근에는 미세먼지도 너무 심해서 장시간 밖에 있으면 폐가 썩는 느낌이다. 10년 전 연속극 조연출 할 때는 이런 일도 있었다. 동물원에서 한 커플이 데이트하는 씬 찍는데 그날따라 날씨가 너무 좋았다. 덕분에 기린에게 먹이 주고, 원숭이 흉내 내며 알콩달콩 연애하는 씬까지 순조롭게 촬영을 마무리했다. 마지막에 둘이 솜사탕 나눠먹으며 거리를 걷는 씬 찍을 때였다. 풀샷을 찍고 남자 배우 쪽을 먼저 찍었다. (보통 여배우를 먼저 찍지만 바닥에 깔아 둔 레일 방향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마지막으로 여배우를 찍으려고 하는데 갑자기 천둥소리가 들리더니 예정에 없던 소나기가 마구 쏟아지기 시작했다.


     연기자와 스태프들 모두 건물이나 나무 아래로 뛰어 들어갔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비는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런... 큰일 났네!! 하필 그 씬은 오늘 방송될 씬이었다. 빨리 편집실에 보내야 저녁 8시 반 방송에 나갈 수 있었다. 다행히 비가 조금 잠잠해지자 우리는 서둘러 촬영 준비를 했다.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서 조명 반사판을 겹겹이 쌓아 올려 여배우 머리로 비 떨어지는 것을 막았다. 하나 둘 셋 큐!! 연출 선배가 소리쳤다.


    여배우는 남배우에게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솜사탕을 건넸다. 순조롭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 다시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했고, 반사판 사이로 샌 비가 여배우 얼굴 위로 뚝뚝 떨어졌다. 연출 선배는 당황했지만 ‘컷’을 외칠 수 없었다. 이제 진짜 방송 시간까지 얼마 안 남았으니까. 이러다 방송사고 나면 진짜 큰일이니까. 연출 선배가 컷을 외치지 않자 여배우는 살짝 당황했지만 자연스레 미소를 지으며 최선을 다해 연기를 했다. 이걸 방송에 내보내도 될까 싶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뒤늦게 방송을 보는데 정말 머리가 아프더라. 로맨틱한 장면에 여배우 혼자 머리 축축하게 젖은 채로 판다곰처럼 웃고 있었으니까. (뚝뚝 떨어진 빗물방울에 검정 마스카라가 점점 번지고 말았다) 언젠가 복수하고 말 테다! 의뭉스럽다 못해 한이 서린 미소였다. 누가 보면 솜사탕 안에 은장도라도 숨겨놓았을 거라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하필 남자 배우 쪽이 화사하게 나와서 (날씨 화창할 때 촬영했기에) 더 문제였다. 때마침 배경음악까지 톡톡 튀고 말랑말랑했기에 그 씬 자체가 굉장히 그로테스크하게 느껴졌다. 이렇듯 4계절이 너무나도 뚜렷하고 날씨가 자주 바뀌니 웃픈 상황이 많이 벌어진다.  

   

   이렇게 악조건 속에서도 한국 드라마가 세계적으로 뻗어나갈 수 있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촬영팀의 피땀 어린 열정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아무리 열악해도 아무리 힘들어도 좋은 작품을 만들겠다는 일념 하나로 고된 촬영을 묵묵히 버텨낸다. 연기자들도 마찬가지다. 모니터 속 배우들의 투지를 보고 감동받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80이 넘는 고령의 나이에도 맨발로 눈길 걷는 연기를 자처하시는 분도 있고 (심지어 연출인 가 말렸는데), 폭염인 날씨에도 한 번 더 찍을 수 있다며 프로의식을 보여주는 연기자들도 많다.


    물론 사람 갈아서 한다는 게 마냥 좋은 것은 아니다. 우리도 선진화된 시스템을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최근에 ‘사전 제작’이 자리를 잡고, 법적으로 촬영 시간이 줄어든 것도 고무적인 일이다. 하지만 하나 아쉬운 것은 드라마 보는 것을 좋아하는 시청자는 많지만 드라마 찍는 것을 너그럽게 봐주는 시민들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점이다. 차량 씬을 위해 도로를 통제하거나 아니면 비 씬을 위해 강우기를 틀려고 하면 (사전에 지자체와 주민들에게 허가를 받는다) 꼭 몇몇 분들이 나타나 욕 한 사발 내뱉고 가시거나 촬영을 방해하신다.


    시민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우리들도 최선을 다해 노력해야겠지만, 그래도 시민 분들도 우리를 조금만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봐주시면 좋겠다! 한 번 염원해 본다.    


(FIN)  





오랜만에 쓰는 글이네요^^

앞으로 틈나는 대로 방송 이야기를 여기에 올리겠습니다.

작가의 이전글 호랑이를 찔러본 적 있나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