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 교실에 오세요 04
한 걸음, 딱 한 걸음. 누군가보다 한 걸음 앞서라고 하는 것은 부담일 때가 많다. 그것이 글이라면 더욱 한 걸음은 지나치고 반보 정도였으면 한다. 독자보다 먼저 어떤 문제에 대해 생각하고 고민했기 때문에 앞서 있는 건 맞지만, 독자를 배려하며 자신의 생각과 표현 속으로 데려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내게 반보로 다가온다. 글감의 감(?)을 어느 정도 잡아가는 아이들에게 반걸음 고민의 문을 열어주기 위해 나는 색이 다른 형광펜 두 자루를 선물한다.
“샘, 형광펜 언제 써요?”
“절대 비밀이야.”
언제나 답은 궁금증이 최대가 되는 최후에 알려준다. 아이들 입장에서 하고 싶은 것은 못 하고 하기 싫은 것만 잔뜩인 현실에서 무엇인가 궁금하게 하고 알고 싶게 만들고 싶어서일 뿐이지만, 아이들은 선생의 주문대로 노트 옆에 형광펜 두 자루 가지런히 놓고 글을 쓰기 시작한다. 사각사각.
주사의 힘, 3학년
요즘 수두가 돈다. 벌써 우리 반에 3명이나 수두 때문에 결석했다. 나도 수두에 걸릴까 봐 걱정되기도 한다. 11월 초부터 돈 수두는 많은 친구들을 아프게 만들었다. 나는 속상했다. 드디어 전교에 10명이 수두에 걸리자, 나머지 아이들도 옮고 옮아가는 몸 밖과 몸속 두 공간에서의 전쟁이 시작됐다. 애들이 계속계속 옮아갔다. 결국 학원에도 수두에 걸리는 친구들이 생겨났다. 그런데 이상한 점은 애들은 그렇게 심해지고 있는데 나는 안 걸리는 것이었다. 나는 생각했다.
‘내가 에너지를 아끼고 있어서 그럴 거야.’
하지만 내 생각의 전구가 그만 잠시 꺼져버렸다. 왜냐하면 엄마께서 예방주사를 두 방 맞아서 그런 거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그걸 알고 수두에 걸려본 애들에게 질문을 했더니 엄마 말씀대로 한 방만 맞았다고 대답했다. 반면 수두에 안 걸린 애들은 다 두 방 이상 맞았다고 대답했다. 수두에 안 걸린 애들은 이렇게 외치고 다녔다.
‘주사 만세!’
결국 수두의 적은 주사였던 것이었다. ‘이게 바로 주사의 힘이다.’ 나는 생각했다.
방학 시작!, 3학년
어제 나는 학교에서 방학식을 했다. 나는 방학을 하면 집에서 TV도 보고 친구랑도 놀고 숙제는 일주일에 1번만 하려고 했다. 그런데 우리 반 선생님이 들어오시고 방학 때 할 일을 말해주셨다. 나는 할 숙제를 말할 때 약간 실망했었다. 왜냐하면 내가 할 숙제는 일기 12편에 독서록 6편이었다. 게다가 저번 여름방학 때 못한 숙제가 있으면 풀어오라고 하셨다. 내가 생각한 것들은 다 날아간 것이다. ㅠㅠ 나는 그래도 방학이 빨리하고 늦게 끝나는 것에 만족한다. 어찌 됐든 일기는 일주일에 2편씩 써야겠다. ㅠㅠ 숙제만 늘어나고 방학을 해도 다른 게 없는 것 같다. 나의 방학 계획은 망한 것 같다. 그래도 방학 동안 할 일은 두둑이 쌓인 것 같다. 지금 생각하니 담임선생님도 너무나 얄밉고 나쁜 것 같다.
유유(ㅠㅠ)가 두 개인 글이다. 글 속에 이모티콘은 사용하지 않기로 한다. 이모티콘으로 표현하고 싶은 것을 단어로, 문장으로 표현해야 하기에 그렇다. 그렇지만 방학 동안 숙제는 일주일에 한 번만 하려고 한 야무진 계획이 다 날아갔고 유유, 일기는 일주일에 두 편씩 써야 하니 유유, 절묘하다. 방학을 해도 다른 게 없다는 아이 말이 정답이다. 이 글을 통해서 하고 싶은 말이 나왔다. 드디어 형광펜을 쓸 때가 되었다. 이 한마디에 긴장감이 감돌고,
“자, 먼저 마음에 드는 한 가지 색깔을 정하세요.”
뽑아 당첨되는 일도 아닌데 신중함이 더해진다. 두근두근. 그날 수업 가운데 한 번쯤은 심장 소리가 들리는 시간이 되게 해주고 싶다. 그것이 내가 전하고 싶은 글쓰기의 재미고 수업의 선물이다. 오늘은 중간에서 Tip 두 자루 형광펜의 비밀이란.
먼저 고른 형광펜으로 이 글을 통해 하고 싶었던 말, 이 말 때문에 이 글을 쓰고 싶었구나 하는 말을 찾아 밑줄을 친다. 말 그대로 핵심 문장 찾기다. 할 말이 없다면 글을 쓰지도 않았겠지만, 툭 터져 나온 할 말은 글쓴이에게 다시 글을 쓸 동기를, 독자에게 생각할 기회를 준다. 그래서 핵심을 찾는 것은 중요하다. 연습을 통해 글은 숙제하기 위해 쓰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하려고 쓴다는 글쓰기 의미를 새긴다. 어린아이의 할 말은 커서 어른의 할 말이 되고 자기 목소리를 내는 것은 어릴 때부터 중요하게 해야 할 일이다. 그것이 글쓰기를 통해서라면 가장 정직할 수 있다.
두 번째 형광펜 내가 썼지만 잘된 표현을 고른다. 잘되었다는 말은 나만 쓸 수 있는 내 표현으로 쓰였다는 것이다. 내가 썼지만 참 잘 썼어, 칭찬하고 싶은 문장을 찾게 한다. 몇 개 찾아요? 질문에 하나는 안 돼, 왜냐 자세히 보면 잘 쓴 문장이 두세 개쯤은 숨어있거든, 라고 답한다. 글을 쓰는 어린이는 스스로 칭찬해도 된다. 잘 쓴다고 믿으면 잘 쓰려고 노력하게 되어 있다. 그때의 상황에 꼭 맞는 나만의 표현을 찾아 쓰려고 하면 표현력은 절로 길러진다.
두 가지 색 형광펜을 차례대로 사용하자면 글을 두 번 읽게 된다. 자신의 글을 두 번씩 읽어가며 핵심을 찾고 좋은 문장을 찾게 되는 것이다. 〈주사의 힘〉을 쓴 친구는 요즘 수두가 돈다는 것이, 〈방학 시작!〉을 쓴 친구는 내가 할 숙제가 일기 12편에 독서록 6편이었고 방학을 해도 다른 게 없다는 것이 이 글을 통해서 하고 싶은 말이라고 했다. 정확하다.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찾았다. 〈주사의 힘〉에서는 수두가 유행하는 것을 옮고 옮아가는 몸 밖과 몸속 두 공간에서의 전쟁이라고 표현했다. 자신은 에너지를 아끼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주사 덕분에 그렇다는 엄마 말을 듣고 헐! 이라고 하지 않고 생각의 전구가 꺼졌다고 했다. 〈방학 시작!〉에서 내 방학 계획을 망하게 하고 할 일만을 두둑이 쌓아준 담임선생님이 너무나 얄밉고 나쁘다. 아이답고 귀여워서 크게 웃었다. 토닥토닥 두드려 주었다.
글 한 편 더 듣는다.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이었을까. 잘 쓴 표현으로 고른 문장은 어떤 것이었을까. 직접 찾아보자. 아이의 글을 보려면 글을 쓴 아이의 시각으로 다가가면 된다.
친구가 정말 이딴 거니?, 4학년
우리는 정말 친구인지 아닌지. 싸울 땐 서로에게 가시가 된다. 그런데 내가 잘못했든 친구가 잘못했든 항상 내가 먼저 사과했었다. 그런데 이번 주 목요일은 뭔가 달랐다. 그럼 이번 주 목요일로 잠시 가보자.
우리는 편을 갈라서 게임을 하고 있었다. 나랑 지은이가 팀, 민지와 지윤이가 팀이었다. 그 게임에서 이기려면 서로를 속이고 연기해야만 했다. 그래서 나는 지은이를 위해서 표정과 입 모양으로 연기했다. 근데 갑자기 민지가 다가와 “왜 지은이가 싫어?” 하고 묻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지은이를 싫어하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그랬더니 “너가 입 모양으로 지은이 또라이라고 했잖아.”라고 말하는 것이다!“
나는 입 모양으로 그냥 뻥긋뻥긋했을 뿐인데. 결국 우린 그것 때문에 서로에게 가시가 되고 말았다. 그렇지만 이번엔 내가 절대로 먼저 사과하지 않았다. 왜냐면 다른 건 몰라도 “나 안 그랬다고! 왜 나한테 자꾸 그러는데!” 하고 소리쳤을 때 민지가 “그럼 연기를 하지 말던가!”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연기를 하는 게임이고 자기도 해놓고 나한테만 그러다니!
정말 그날은 도무지 친구가 이해가 안 됐다. 아니라는데 자꾸 맞다고 하고 연기하지 말라 하고. 그래서 이번엔 꼭!! 내가 먼저 진심을 담은 사과를 듣고 싶었다. 지금까지 친구는 입 밖으로 “미안해.”란 말은 단 한 번도 그 어느 때에도 날 위해 나오지 않았으니까!
민지는 나와 다른 친구에게 유난히 그런다. 다른 친구에겐 싸우면 메시지로 욕까지 보낸다고 한다. 그런데도 민지는 인기가 많은 편이다. 그래서 나 이외에 다른 아이들은 민지를 부러워한다. 왜 난 민지를 부러워하지 않냐면 인기 많다는 건 맨 밑바닥에서 제일 힘든 생활을 하기 때문이다. 인기가 많으면 그만큼 뒷담과 질투가 뒤따를 것이고 자기에 대한 뒷담을 들어도 모른 척 해야 하고 티 안 내기 위해 힘들 것이다. 그래서 난 굳이 민지를 부러워하지 않는다. 어쩌면 평범하게 사는 게 더 행복한 걸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이 글은 사실 그 누구에게도 공개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그만큼 내가 용기를 내서인지 모르게 마음이 더 후련하고 다시 그 친구와 친해질 수 있을 것 같다.
용기 내어서 하고 싶은 말을 쓴 아이는 후련하다고 적고 있다. 다시 그 친구와 친해질 수도 있을 것 같다니 대단하다. 형광펜 두 자루의 비밀은 여기에 있다. 하고 싶은 말을 찾아서, 내 말로 표현하겠다는 수고를 기꺼이 해보겠다는 것. 그런데 결과는 하고 싶은 말을 솔직히 쓰는 일로 이어진다.
글쓰기는 내가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스스로 찾아가는 일이다.
그다음엔 내가 쓴 문장 중 가장 나다운 표현을 발견하는 일이다.
자신의 글을 읽는 순간부터 글다듬기가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