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 교실에 오세요 11
싱싱샘은 동네 문구점 단골이다. 복사할 일이 많아 자주 가지만, 사실 자주 가는 이유가 또 있다. 이번 주 눈길을 사로잡을 문구계의 뉴페이스를 만나러. 어른에겐 ‘그게 그거’인 그래서 ‘아무거나 얼른 골라’의 물건일지 모른다. 하지만 아이들은 다르다. 싱싱샘에게도 그렇다. 문구점엔 언제나 새 옷 갈아입은 다크호스들이 출격을 기다린다. 싱싱샘 서랍은 곧 터질 것 같다. 어느 날 줄어들었나 싶은데 자꾸 새 친구를 데려와 차곡차곡 쌓는다. 종류별로 고무줄에 묶인 샤프, 카트리지 연필, 형광펜, 색 볼펜. 지우개, 작은 수첩, 연필깎이… 대충 보이는 것만 해도 이 정도인데 대체 그걸 다 어디에 다 쓰려고.
한 달에 한 번, 열심히 출석하고, 열심히 수업하고, 열심히 숙제하고, 열심히 말하고, 열심히 쓰고, 열심히 들어준 친구들에게 작은 선물을 준다. 해당하지 않는 아이들이 없도록 세심히 만든, 진입장벽 제로의 기준이다. ‘열심히’는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어떤 일에 온 정성을 다하여 골똘하게’라는 뜻이다. 유의어는 ‘성심껏’, ‘부지런히’. 잘 쓰지 못했더라도 부지런히 말했(떠들기라도 했)을 테니까, 언젠가 그 말은 문장이 될 테니까, 미리 칭찬하기. 적어도 글쓰기에 있어서 칭찬 좀 미리 들었다고 잘못될 일은 없다.
싱싱샘은 어쩌다 이렇게 문구점에 마음을 두게 되었을까. 미니멀을 좋아하고 하나 사면 하나 버리는 타입인데 말이다. 그건 함께 글 쓰는 아이들 영향이다. 어른들이 ‘뭐 하러 그런 걸!’ 하며 지나치는 작고 사소한 것이 아이들에게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지우개 빨기, 5학년
금요일은 미술이 있는 날이다. 요즘은 미술 시간에 데생을 하고 있다. 이번 주 금요일은 삼각뿔과 원기둥 데생을 했다.
선생님이 종이를 나누어주고 막 시작할 때쯤이었다. 내 자리의 바로 앞자리였던 ○○이 미술 할 동안만 지우개를 빌려달라고 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고개만 끄덕거렸다. ○○이 계속 “나 이거 빌려 갈게.” 하면서 말을 시켰기 때문이다. 삼각뿔을 다 완성했을 때 지우개의 앞부분이 까만색으로 변해 있었다. 이 정도는 원래 데생을 하면 지우개가 조금 까맣게 되니까 상관이 없었다.
원기둥을 반 정도 완성해 갈 때였다. ○○이가 갑자기 안절부절못한 표정으로 말했다.
“미안해. 내가 한 것 다 지우다가 지우개가 까맣게 변했어. 다시는 너의 지우개를 빌리지 않을게.”
말을 마치고 지우개를 슬쩍 보는데 너무 깜짝 놀랐다. 이게 지우개인지 아닌지 혼동이 왔다. 기분이 상해서 다시는 지우개를 빌려주지 않아야겠다는 생각도 좀 들었다. 내 짝꿍은 웃는 것인지 화를 내는 것인지
“푸하하! 쟤는 왜 남의 지우개를 자기 것처럼 쓰고 자기가 더 호들갑을 떠는 거야.”라고 얘기하였다.
(중략)
“정말 마지막으로 딱 한 번만 쓸게. 제발. 제발. 제발.”
말은 이렇게 얘기했지만 미술이 끝날 때까지 쓰고 있었다.
미술이 끝나고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머릿속에는 오직 이 지우개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지우개가 거의 다 쓴 지우개라면 모를까 하필이면 사용한 지 한 달도 안 된 지우개였기 때문이다. 실내화를 갈아 신으면서 같은 반 친구에게 이 얘기를 털어놓았다. 그러자 친구는 “한번 집에 가서 지우개를 빨아 봐.”라고 했다. 괜찮다는 생각이 들어 대답했다.
“좋아. 그럼 꼭 지우개를 원래처럼 만들어야지.”
“정말로 할 거야? 나는 그냥 재미 삼아 한 말인데… 어쨌든 잘해 봐.”
(중략) 숙제를 다 하고 지우개 빨기 계획을 세웠다.
1. 물티슈로 지우개 닦기 2. 물에 씻기 3. 비누로 씻기
내가 세운 계획을 모두 다 했는데도 약간의 변화만 있을 뿐 생각했던 것처럼 되지 않았다. 오히려 힘만 더 들 뿐이었다. 데생을 4B 연필로 해서 그런 것 같다. 어떻게 생각해 보면 지우개를 빠는 내 모습이 웃기기도 하다. 하지만 이 지우개가 원래 모습을 되찾지 못해서 기분은 안 좋다. 나중에는 한 번 지우개를 염색해서 상처를 덮을까 하는 계획도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일이 있고 나서 앞으로 지우개를 빌려줄 때는 적당히 빌려주어야겠다.
한 달이나 된 지우개가 뭐 그리 소중할까. 대체 어떻게 생긴 지우개이기에 닦고 씻기를 자처했을까. 글 속에 없지만 안 봐도 훤하다. 스스로 골랐다면 마음에 쏙 들었을 거고 한 달이나 곱게 쓰고 있었다는 건 애지중지했다는 거다. 이 글을 읽으며 누구도 ‘에이, 지우개 하나 가지고 뭘요.’ 하지 않았다. 같이 글 쓰는 중학교 1학년 아이가 지우개는 지우개로 지워야 깨끗해지는데, 속삭이며 돌아갔을 뿐. 나는 아이들이 서로 마음을 읽었다고 본다. 네겐 지우개가 그렇구나. 난 다른 게 그래. 작고 사소한 것이 소중할 수 있다는 걸 공감하는 시간이었다. 아니, 지우개가 작고 사소한 거라고 누가 그랬지. 또 배웠다. 나는 서랍 속에 지우개를 추가했다.
왜 이렇게 끈적끈적거려!, 2학년
지난주 화요일 내가 6살 때 약국에서 산 팽이를 찾았다. 6살 때 산 팽이를 보니 팽이의 추억이 생각난다. 팽이를 사달라고 해서 5천 원 주고 산 건데 10분만 놀고 안 논 추억이다. 그래서 한 번 끼워서 돌려봤더니 엄청 잘 되었다. ‘이거 오랜만에 해서 그런지 은근 잘 돌아가고 재밌는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엄마한테 말했더니 그때 괜히 사줬다는 생각으로 날 혼냈다. 괜히 말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손잡이 부분에 스티커가 붙어 있어서 떼 봤더니 아니 너무 끈적끈적거리잖아! 헐레벌떡 화장실로 뛰어갔다. 손잡이를 비누와 물로 열심히 씻었다. 첫 번째로 그렇게 해봤는데 결과는 끈적끈적거린다. 난 계속해서 반복했다. 반복한 결과 끈적끈적하다. “아니,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해.”라고 말했다. 한번 엄마한테 말해보기로 했다. 엄마는 관심이 없다. 그럼 난 뭘 해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 그때 어떤 생각이 들었다. ‘난 천재야.’ 하면서 “우하하하” 크게 말했다. 우리 누나는 크게 말하지 말라고 했다. 근데 내가 왜 천재라고 했느냐면 테이프를 봐서 그랬다. 바로 테이프로 손잡이를 둘러싸는 거다. ‘그러면 손잡이가 끈적끈적하지 않겠지.’ 하며 또 “우하하하” 크게 말했다. 나는 테이프를 잡고 돌돌 감쌌다. 다시 손잡이를 만졌더니 끈적끈적거리지 않았다. 드디어 해냈다는 생각으로 또 천재라고 “우하하하” 했더니 누나가 나한테 다가오더니 막 때렸다. 해결을 했지만, 해결을 했더니 누나한테 혼나서 속상했다. 해결해서 행복하게 끝날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우리는 이 글을 읽으며 정말 많이 웃었다. 본인은 진지하게 쓴 글이었다. 그런데 읽는 우리는 글쓴이의 상황과 모든 행동을 상상해버렸고, 누나의 제압으로 끝난 예상 밖의 결말에 박수를 쳤다. 고학년이 되었다고 이 글을 유치하다고 했을까. 전혀 아니다. 수업 끝나고 나가면서까지 ‘아, 진짜 웃겼어.’ 할 정도였다. 첫 문장은 부담 갖지 말고 툭 떨구라고 늘 이야기한다. 두세 가지로 바꾸어 연습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마지막 문장은 미리 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교훈을 기름기 빼듯 쪽 빼고 이렇게 바삭하게 끝내기 힘들다. 그 힘이 어디에 있었을까. 내게 있었던 일을 문장으로 끝까지 잘 밀고 나간 덕분이다. 누군가를 가르치거나 감동을 주겠다고 생각한 일이 애초에 없었다. 그래서 웃겼고, 사랑스러웠고, 오래 기억에 남았다.
일상은 크고 중요한 일의 연속이 아니다. 다음번 문구점에 가면 어떤 팽이가 있나 유심히 봐야겠다. 구슬을 좋아하는 아이가 있었다. 딸이 어릴 적 가지고 놀던 유리구슬을 주려고 했다. 그런데 그 아이가 이사하게 되며 더 만나지 못했다. 유리구슬은 여전히 서랍 안에 있다. 싱싱샘은 일상을 쓰라고 가르친다. 작고 사소할수록 최고라고 말해준다. 우리를 웃기고 울리는 글감은 거기에 있다. 신기하게, 작고 사소한 것들의 소중함을 아이들은 이미 알았다. 그러한 작고 사소한 것들을 꼭 붙들어 쓰는 글쓰기 교실의 아이들이 있어, 나는 말만 잘하는 어른을 대표해 그들의 이야기를 읽고 배운다. 그리고 문구점을 기웃하며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