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기운이 완연하여 덩달아 마음도 포근해진다. 봄바람을 타고 오후 조금 늦은 시간에 집에서 가까운 강둑길을 따라 걸어보았다. 이 둑길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반년 넘게 인근에 살면서 아직 한 번도 걸어본 적이 없어 초행이었다.
지리산 준령 끝자락에 백운산이 자리하고, 그 동생들처럼 고만고만 앉아 있는 바랑산, 계족산, 병풍산 등에서 발원하여 흘러내려온 하천이 합류하는 지점이 동천의 시작이다. 굽이굽이 흐르던 강줄기가 시내권으로 들어오면 비슷한 높이의 산봉우리세 개가 나란히 서 있는 삼산(三山)과 어깨동무를 하며 흐른다. 합류 지점을 삼산이 내려다보고 서 있는 형국이다. 삼각형 모양의 이 산을 옆에서 보면 우리나라 H그룹의 로고와 많이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강가의 고롱나무에 마른 멀구슬 열매가 매달려 있다
동천의 폭은 40~50m 정도 되는데 물이 깨끗하여 수많은 생물이 살아 숨 쉰다. 철새들의 모습도 눈에 많이 띈다. 청둥오리, 원앙새 등이 곳곳에 무리를 지어 먹이 활동으로 분주하다. 이 강은 시내를 관통한 후에는 순천만 갈대숲을 적시고 여자만(汝自灣)에 도달한다.
수변 길을 따라 유유히 걷는 사람, 부지런히 달리는 사람과 자전거를 탄 사람들이 제법 지나간다. 나는 하류를 향하여 왼쪽 둑길을 따라 걸었다. 그렇게 30여 분쯤 걷다가 그만 되돌아갈 생각을 하며 이번에는 강 건너편 길을 걸어보고 싶어졌다. 마침 다리가 나타나자, 그 다리를 건너기 위하여 언덕 쪽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그런데 눈앞에서 때 이른 하루살이들이 무리를 지어 비행하며 이리저리 이동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참으로 부지런하다.날씨가 풀렸다고는 하나 아직 밤 기온이 쌀쌀한데 벌써 활동할 수 있는가 하는 소박한 의구심이 들면서 조창환 시인의 시 「하루살이 」가 떠올랐다.
숫컷 무리 속에 암컷들이 들어가 짝을 만나 어디론가 결혼비행한다.
잠시 멈춰 서서 결혼비행 중인 하루살이들을 바라보았다. 하루살이는 수생곤충으로 살아가는 유충의 경우, 산소가 많고 물살이 빠른 곳에서 1~2년 정도 산다. 성충의 크기는 종류에 따라 다르지만 꼬리를 포함하여 약 1.5cm이고 수명은 보통 1~2일 정도이다. 불과 몇 시간에서 1~2주일 정도인 경우도 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하루살이는 성충의 수명이 짧아서 인생의 덧없음을 이야기할 때나 문학 속에 심심찮게 등장하는 주인공이다.
하루살이가 우화(羽化)하여 날아다니는 시기는 보통 봄·가을이지만 3월 중순은 좀 빠른 시기이다. 성충이 될 즈음에는 소화기관이 퇴화하여 먹이 활동은 전혀 하지 못하고 결혼비행 후에는 알을 낳고 그대로 생을 마감하는 존재이다.
노을 속으로 뭉쳐져 사라지는 하루살이 떼를 만난 현장 사진
하루살이 / 조창환
여기까지 오느라 날 저물었구나.
한 생애의 중노동이 생피 같은 노을 속으로 뭉쳐져 사라진다
잉잉거리며, 우글거리며
하루살이 떼는 채송화 꽃씨처럼 잘게 흩어진다
꽃씨? 그래, 꽃씨지!
끝 무렵에는 총 맞은 꽃씨 되자
꽃씨처럼 터지는 화약을 안고
생피 같은 노을 속으로 뭉쳐져 사라진다, 하루살이 떼
이 시는 현대시학사에서 2020년 발간한 시집 『저 눈빛, 헛것을 만난』에 실려 있다. 이 시집에는 동물을 대상으로 쓴 시들로 구성되어 있다. 오소리, 나비, 흙 벌레, 반디, 우렁이, 가자미, 코뿔소 등 크고 작은 동물들이 시인이 바라본 통찰력의 깊이로 통쾌하게 분해된다.
하루살이들은 저렇게 짧은 우화 된 시간을 보내지만 상대적으로 긴 유충의 시간을 보낸다. 그리고 작디작은 채송화 씨앗으로 비유되는 생의 마지막은 새로운 세대를 이어주는 역할에 충실한 몸부림임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하루살이의 생은 어쩌면 씨앗을 통한 새로운 삶의 시작이기에 결코 슬퍼할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조창환 시인은 1945년 서울에서 출생하여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대학원 졸업, 1973년 『현대시학』에서 등단하였고, 시집은『허공으로의 도약』을 비롯하여 『빈집을 지키며』,『라자로 마을의 새벽』, 『그때도 그랬을 거다』, 『마네킹과 천사』와 동물 시집『저 눈빛, 헛것을 만난』 및 시선집 『신의 날』,『황금빛 재』 등을 펴냈다.
강 언저리에는 버들강아지가 새싹 틔울 막바지 준비로 바쁘고, 걸음걸이를 따라 매화꽃이 만발하여 화사하다. 만물은 상큼한 봄을 힘껏 자기 속으로 끌어들인 후 다시 자신들만의 색으로 혹은 향기와 느낌으로 재해석하여 세상과 소통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
마침 강변에서 백로 한 마리를 만났다. 어디에서 날아왔는지 강에 내려앉자마자 물고기 한 마리를 가볍게 낚아채더니 그대 꿀꺽. 물고기는 제대로 파닥거릴 겨를도 없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저녁노을이 붉게 물들어가는 시간이다. 생피 같은 노을 속으로사라지는 것은 하루살이 떼뿐만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