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풍에 돛 단 듯’이라는 표현이 있다. 바람이 불어가는 방향과 내가 가는 방향이 일치하는 경우라면 바람이 배를 밀어서 움직인다는 것이 이해가 된다. 그런데… 반대 방향으로 가고 싶으면 어떻게 할까? 바람의 방향과 직각으로 가고 싶다면? 바람이 북쪽에서 불다가 갑자기 서쪽에서 불면? 제갈량이 도술을 부려 동남풍을 일으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딩기 교육 첫날, 뒤집힌 배를 복원하는 법만 배우고 바다로 던져진 나는 매우 당황했다. 자전거는 페달을 저으면 앞으로 나간다. 카약은 노를 저으면 앞으로 나간다. 그런데 이놈의 딩기는, 대체 어떻게 해야 앞으로 가는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아니, 앞으로 가는 것은 고사하고 한 자리에 머물러 있을 수도, 수면과 직각을 이루며 서 있기도 쉽지 않았다.
나중에 알았지만 세일(돛)을 이용해 항해를 하기 위해서는 Point of Sail이라는 다이어그램을 머릿속에 내장해야 했다. 시계를 닮아서인지 Wind clock이라고도 하는데, 시간이랑은 아무 상관이 없다. 핵심은 이것이다. 세일이 달린 배는 바람이 불어오는 바로 그 방향의 좌우 30~45도 정도씩(No Sailing Zone, 또는 No Go Zone이라고 한다)을 제외하고는, 어디로든 갈 수 있다!
바람이 불어오는 곳... 그곳으로 못 가는 것이 요트라네
만약 정북방에서 바람이 분다면, 우리는 북쪽으로 직진해서는 갈 수가 없다. 다만 북향에서 30도쯤 틀어진 왼쪽이나 오른쪽으로는 가능하다. 퀴즈. 북풍이 부는데 내가 갈 곳이 북쪽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답은 간단하다. 지그재그.
이것이 내가 문외한으로서 올림픽 요트 경기를 처음 봤을 때 매우 혼란스러웠던 지점이다. 대체 왜 저 배들은… 똑바로 가지 않고 술취한 사람처럼 갈팡질팡하는 것인가? 반환지점(마크라고 한다)을 돌면 그때부터는 왜 똑바로 가는 것인가? 요트 경기의 관전 포인트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이 배의 선장은 술에 취한 것이 아닙니다...
경기 얘기는 따로 날 잡아서 삼일 밤낮을 새면서 하겠지만, 아무튼 요트란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풍상)을 향해서 갈 때엔 지그재그, 바람과 직각을 이룰 때와 바람이 불어가는 방향(풍하)으로 갈 때에는 직선으로 갈 수 있다. 실제 항해 이론은 양력이니 베르누이의 원리니 헬름이니 하는 것들을 포함하면 수십배는 더 복잡하지만, 일단 기본은 이렇다.
문제는 우리가 이 사실을 전혀 모른 채 바다로 던져졌다는 것이다.
이렇게 믓찌게 타고 싶었건만 (by Charles Zusman)
실제로는 조난체험... (by Roger Jones)
상황이 이렇게 된 이유인즉슨, 딩기 교육을 받던 팀이 요트 면허시험을 대체하는 면제교육을 이미 받은 팀이었기 때문이다. 면제교육에서는 바람이 배를 움직이는 원리를 비롯하여 각종 줄을 당기고 놓는 법, 요트와 세일의 부분 부분을 가리키는 각종 명칭, 요트가 안 뒤집어지는 이유와 다시 복원될 수 있는 이유 등등을 두루 배우고 40피트짜리 대형 요트를 직접 몰아보는 과정까지 배우게 된다. 이 팀은 요트와 세일링의 기초 교육을 마친 후 딩기 교육을 받았던 것이다.
먼저 잡혀 있던 다른 팀의 딩기교육 일정에 끼어든 것은 우리였고, 그래서 딩기를 가르치던 강사들은 이 사실을 몰랐거나 혹은 알았지만 까먹은 채 바다 위에서 우리를 향해 우렁차게 외쳤다.
“지금! 시트를 당겨요!” ‘시트? 시트가 뭐지? 여기 무슨 침대 시트 같은 천이라도 있나?’
(시트sheet는 요트의 세일을 움직이기 위해 사용하는 일체의 줄을 말한다. 그렇다. 우리는 그것도 몰랐다)
“지금 러프가 울잖아요! 그러면 방향이 안 맞는 거니까 배를 돌려야죠!” ‘러프는 또 뭐야? 배를 돌리려면 뭘 해야 하는 거지?’
(러프luff는 세일에서 배 앞쪽을 향하고 있는 변을 말하는데… 당시엔 러프가 울건 웃건 중요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내 배는 그때 한 방향으로만 뱅글뱅글 돌고 있었기 때문이다)
“틸러를 밀어야지! 당기면 어떻게 해! 아니, 중립!!” ‘이 방향이 미는 건가? 당기는 건가? 중립은 어느 시점에 하는 거지?’
(딩기는 핸들이 아니라 틸러라는 막대기로 방향으로 조정한다. 한 손엔 틸러, 한 손엔 줄을 잡고 딩기를 움직이다가 방향이 바뀌면 이걸 반대 손으로 바꿔 잡아야 한다… 하다 보면 몸에 익게 되긴 하는데 지금도 나는 내가 어떻게 이걸 하는지 말로는 설명을 못하겠다)
선수들에게 어떻게 하냐고 물어보면 그냥 요래요래 하면 된다고 합니다
딩기를 제대로 움직이기 위해서는
1. 바람의 방향을 파악한 후
2. 내가 가고자 하는 목표지점을 확인하고
3. 틸러로는 방향을, 시트로는 속도(정확히 말하면 세일에 바람을 받는 정도)를 조절해서 가면 된다.
이토록 간단한 원리인데, 나는 일단 1번. 바람이 어디에서 부는지를 알 수가 없었다. 내 주변에 바람이 있긴 했다. 머리카락이 휘날리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무슨 풍향계가 있는 것도 아니고, 낙엽을 던져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깃발이 달려 있는 것도 아닌데 바람의 방향을 무슨 수로 안단 말인가.
나중에 배웠는데, 망망대해에서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을 아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었다.내 배의 세일에 달린 텔테일이라는 실을 봐도 알 수 있고, 옆에 가는 다른 배의 세일 모양을 봐도 알 수 있다. 부표 위에 달린 깃발을 보기도 하고, 파도가 치는 방향을 봐도 알 수 있고, 먼바다에서 수면 위의 잔물결이 생기며 색깔이 짙어지는 것을 봐도 알 수 있다. 그리고 익숙해지면 그냥, 얼굴을 스쳐가는 바람의 질감만으로도 '자연스럽게' 알 수가 있다. (딩기를 탄지 하루 만에 바람의 방향을 파악한 천재요트소녀 민진영 왈, "얼굴에바람이 와서 닿잖아요. 그 방향이 안 느껴지세요?")
민진영이 "30초 뒤에 바람!" 이라고 외치면 나는 "어디? 어디?"라고 말할 밖에...
하지만 그 당시에 나는 아무것도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앞으로 가지도 못하고 뒤로 가지도 못하고 멈추지도 못하고 잘못 바람을 탔다가 배가 전복되었다가 다시 세우기를 수 차례 반복해야 했다. 결국 바닷물에 옴팡 젖은채 요트 위로 몇 번이나 기어올라오느라 온몸의 근육에 힘이 다 빠진 나는, 망망대해 위에서 오도 가도 못한 채 딩기 위에 엎어져 분노와 좌절에 휩싸인 나머지 나도 모르게 이렇게 소리를 질렀다.
대체 바람이 어디서 부는 거야!!!
그날 나에겐 새로운 별명이 붙었다. ‘풍맹’. 바람을 읽을 줄 모른다는 뜻이다. 내가 풍맹 신세를 벗어나게 된 것은 그로부터 몇 달이 흐른 뒤, 5인승 킬보트를 타고 나서도 한참이 지난 후의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