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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단단 May 26. 2024

미치고 팔짝 뛸 영하 17도

 야, 너두 할 수 있어_02

나의 소확성 (소소하지만 확실한 성공) 은 겨울에 따뜻한 나라에서 지내고, 여름에 시원한 나라에서 지내는 것이다.

나혼자 살고 쓸데 없이 비수기가 많은 커리어의 특성 상, 비교적 '기동성' 이 좋은 편이라 성공은 님보다 먼 곳에 있더라도 소확성 흉내를 종종 낼 수 있다.

특히나 추위에 약한 나는 겨울엔 가능하면 남쪽 나라로 피신하는 걸 좋아하는데 쇠질을 시작한 그 해 겨울에도 약 2주간 태국에서 지내기로 하였다. 

하지만 이제 막 운동에 재미를 느끼며 열정을 태울 즈음이라 한 가지 걸리는 것이 바로 운동이었다. 

하여 여행의 초유의 관심사는 '어디를 갈까, 어디서 묵을까, 무엇을 할까, 무엇을 먹을까' 가 아닌 어떻게 쇠질을 멈추지 않을 수 있을까? 였다.  

숙소 선택의 기주 역시 짐(gym)의 유무와 시설 상태였고 그마저도 불안해 여행 가방에 운동화와 각종 밴드 등을 챙겼다.

방콕이야 호텔 내 시설 말고도 서울을 능가하는 고급 피트니스와 짐들이 즐비했지만 나의 첫 목적지는 태국 남쪽 끝에 있는 작은 섬, 꼬 리빼였다.

그곳은 스타*스도 없고 맥*날드도 없으며 각종 수상 액티비티는 있지만 체육시설 딸린 호텔이나 리조트는 없는, 그런 작고 외딴 섬이다. 

하루 이틀은 밴드를 이용해 스퀏과 팔운동을 깨작대며 불안초조를 달래봤지만 골격근에 기별도 가지 않았다. 이렇게 과연 일주일을 버틸 수 있을 지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무려 6개월 동안, 하루 한 시간 반씩 주5일을,  상체/하체/상하체로 분할 해 키워오고 지켜왔던 근육인데!!!

이렇게 잃을 수는 없어!!! 

삼시세끼 생선구이와 닭꼬치로 단백질을 풀 충전하고 맥주 대신 프로틴 음료를 마셔봐도 불안감은 지울 수가 없었다. 

마치 수입은 없고 지출만 있는 백수의 통장처럼...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택한 것이 달리기였다.

그래, 아주 오래 전 노래방 기계에서 본 적이 있다. 

비키니를 입고 해변을 달리던 여자... 

언제 또 내가 브라탑만 입고 해변을 달려보겠나!

사실 처음에는 이런 로망 혹은 허세로 시작했다. 

달리기에 대한 지식도 정보도 없었고 러닝화도 아닌 기능성 제로인 패션 운동화 밖에 없었지만 동이 틀 무렵, 무작정 해변으로 뛰어나갔다.

일출은 미친 듯이 아름다웠지만 나는 숨이 차서 미칠 것 같았다.

고등학교 때, 체력장 오래 달리기의 악몽이 떠오르며 '트레드밀 (일명 런닝머신)' 이 왜 고문기계였던가를 뼈속까지 알 수 있는 순간이었다.

‘유산소 하면 근손실 난다’ 라는 낭설을 애써 팩트로 밀어붙이며 달리기, 멈춰! 를 갈등하기도 했다. 

하지만 윈도우 배경화면 같은 아름다운 그곳에서 하나의 아이콘이 되고 싶었던 허세도 만만치는 않았다. 

그러한 내적 갈등 속에서 뛰다 걷다를 반복하며 처음에는 겨우 십 분 그러다 십 오 분, 이십 분을 채워갔고 그렇게 일주일 도장을 찍었다. 

꼬 리빼의 일출
셀프 가스라이팅: 나는야, 존멋!


그리고 방콕으로 돌아와 남은 일주일도 매일 아침 룸피니 공원을 비롯, 숙소 근처의 공원을 달렸다.

세상엔 생각보다 달리기를 하는 사람들이 많았고 이 힘든 걸, 굳이, 이 아침부터  당췌 왜??? 하는 그들이 멋져 보였고 그 중 백발의 노인들이나 슬리퍼를 신고 달리는 이들은 더욱 멋져 보였다. 

그래서 나도 매일 아침 달리기로 다짐했다.


그러나 귀국 다음 날 아침 서울은 연중 최저 기온, 영하 17도...

역시 신은 너네 편이었다. 

아침에 눈은 떴는데 쉽게 문밖을 나설 용기, 아니 '똘기'가 없었다.

미치지 않고서야 영하 17도에 달릴 일이야???

내일부터 나갈까? 아니, 아예 날 좀 풀리면 나갈까? 괜히 감기 걸리면 손해인데... 

꼬리에 꼬리를 무는 고민은 모두 핑계란 걸 깨달을 즈음, 문득 이런 예감이 들었다. 

오늘 달리지 않으면 영원히 달리지 않을 것 같다.

이런 날, 달릴 때는 어떤 옷을 입어야 하는지, 워밍업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듣보도 없이 무방비 상태로 일단 나가 무작정 달리기 시작했다. 

길에는 달리는 사람은커녕 인적 자체가 거의 없었고 영하 17도의 냉기는 옷 속을 뚫고 진피층을 침투해 뼈 속까지 공격해버렸다.

장갑 낀 손끝이 아려왔고 무릎은 시리고 발은 얼얼했으며 얼굴은 이미 내 것이 아니었다. 

내가 제 명에 못 죽으면 사인은 동사나 심장마비일 것이란 생각도 얼핏 스쳤다.

그러나 그렇게 십 분 여를 달리자 등에서 후끈 열이 나기 시작했고 죽지는 않겠구나 싶은 사이, 어느새 목표한 이십 분을 채웠다. 

칼바람에 얼굴은 붉게 성이 나고 무릎은 감각이 없고 눈썹엔 살얼음이 앉았지만 에베레스트를 정복한 기분이었고 남극을 횡단한 기분이었다. 

해냈어! 달리길 잘했어!

그 성취감으로 일년이 훨씬 지난 오늘까지도 나는 달리고 있다.


만약 그해 겨울, 꼬 리빼를 가지 않았더라면... 

만약 영하 17도의 그 날 아침, 운동화 끈을 묶지 않았더라면...

나는 지금 달리고 있을까? 평생 달릴 일이 있었을까? 이 재미와 행복을 알 수 있었을까? 

운명은 사랑에만 있는 게 아니라 운동에도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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