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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신호 Feb 18. 2024

오직 할 뿐

『바가바드기타』 제2장. 지혜의 길

 요즘 아침에 일어나 약부터 먹는다. 식도염과 혈압 조절을 위해서다. 오랜 세월 동안 커피와 자극적인 음식을 즐겼던 대가를 치르는 중이다. 그러니 누굴 탓하라. 그저 "내 탓이요"일뿐이다.


 감각을 탐닉하면 중독이 문을 두드린. 삶을 무너뜨린다는 중독. 어디 마약뿐이랴.  도박, 카페인, 음란물, 음주, 흡연 등 마구니들은 주변에 가득하다. 쾌감이 쌓이다 보면 결국 몸이 균형을 잃게 된다. 저급한 에너지가 영혼의 주인이 되는 것이다. 결국 감각의 다스림이 삶의 지혜다.

   


 『바가바드기타』 2장은 이러한 지혜를 일러주는  장이다. 1장에서 비탄에 젖었던 이르주나를 꾸짖는 크리슈나의 음성으로 시작한다.

     

 “아르주나여. 이런 급박한 상황에 어찌 이리 낙담을 한단 말인가?…아르주나여, 나약함에서 빠져나오라. 이것은 그대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용감하게 일어나서 적을 물리쳐라.”     


 간디가 말하길 아르주나의 번민은 비폭력과는 거리가 멀다고 했다. 한마디로 잘못된 태도라는 다. 상대가  혈육이 아닌 외부인이라면 아르주나는 거침없이 칼을 뽑았을 거란 지적이다. 비폭력의 스승다운 시선이다.     

 크리슈나는 낙담해 있는 이르주나를 보고는 빙그시 웃으면 말한다.


 “그대가 하는 말은 그럴듯하다. 하지만 그대는 슬퍼할 이유가 없다. 지혜로운 사람은 산 자를 위해서도 슬퍼하지 않고 죽은 자를 위해서도 슬퍼하지 않는다.”     


 이어서 크리슈나는 ‘영원한 실재는 어떤 힘으로도 없애 버릴 수 없다. 육체는 없지만 측량할 수 없는 이 실재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며 염려 말고 나가 싸우라고 독려한다. ‘영원한 실재’는 지혜의 키워드다. 인도에서는 이를 ‘아트만’이라 부른다. 아트만은 참나, 참자아, 기독교 말하면 그리스도 의식이다. 반면 브라만은 우주적 신성한 힘을 다. 하느님이 브라만이.     


 아트만과 브라만은 인도 철학의 정수다. 크리슈나는 육체가 사망에 이르더라도 아트만은 사라질 수 없다고 가르치고 있다. 문득 선가의 화두 ‘이 뭣꼬?’가 떠오른다.  우리의 생을 주관하는 그것이 무엇이냐는 물음이다. 이때 ‘이뭣꼬?'에 대한 답이 아트만이다.

  신성한 아트만을 의식하기란 어렵다. 물론 방법이 없는 것 아니다. 크리슈나는 말한다. “고통과 즐거움, 얻음과 잃음, 승리와 패배한 것을 동일한 것으로 보고 이 위대한 전투에 뛰어들어라. 그러면 악에서 벗어날 것이다.” 달리말해 ‘백척간두진일보’말이니, 집착덩어리 에고를 뿌리치고 한 발 더 내딛으라는 뜻이다. 


 이때 에고는 못한다고 난리를 칠 것이다. 한 끼만 굶어도 심각해지는  나 같은 하근기로서는 넘볼 수 없는 말씀이다. 하지만 이를 건너지 않고는 삼매(三昧)에 들 수 없으니 그리스도 의식을 맛볼 수 없다. 삼매, 곧 사마디는 경계에 끄달림이 없는 여여한 본성인 것이다.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은 금강경에 나오는 유명한 말이다.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라’는 의미다. 무엇을 하든 결과에 연연 말고 행하라는 것이다.


 집착 없는 행위가 요가(yoga)다. 크리슈나는 “행위의 결과에 대한 집착을 포기하는 지혜를 피난처로 삼아라.”고 일러준다. 집착으로부터의 해방. 당연히 감각의 제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나는 담배를 피우는 목사님 한 분을 알고 있다. 과거 흡연력이 있는 나로서 그흡연법신기하다. 목사님은 필요 때담배를 태운다. 흡연할 할 때는 남의 시선 아랑곳없이 담담하게 피우신다. 경계에 끄달리지 않고 자유롭게 행동할 뿐이다. 감각을 의식하면서  하는 행동은 선악의 분별마저 초연한다.


  아르주나는 크리슈나에게 묻는다. “오 크리슈나여, 사마디에 안주하여 참자아에 대한 깨달음이 흐트러지지 않는 사람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그들은 어떻게 말하고, 어떻게 앉으며, 어떻게 걷습니까? "

   

  물음이 디테일 하다. 아르주나는 깨달음이 생활에서 드러나는 면모를 알고 싶은 것이다. 제아무리 얼굴 좋고 구슬이 굴러가듯 멋진 감동의 말을 하더라고 말과 이 다르면 꽝이니, 삶의 구현은 중요하다. 지금 세상에는 거짓 영성가들이 선지자 행세를 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기독교, 불교 할 것이 없이 자본에 오염된 탓이다. 아무튼 언행일치(言行一致)가 안되는 것은 모두 가짜다.



  어느 문인은 금강경 첫 장인 법회인유품(法會因由品)에 매료되었노라 했다. 이 장은 세존의 설법이 아닌 오직 움직임만보여준다. 집착 없이 행하는 진정한 요가 상태다.  

 ”이와 같이 내가 들었다. 한때 부처님이 사위국 기원정사에서 제자 천이오백오십 인과 함께 계셨다. 이때 세존이 진지 드실 때가 되어 가사를 입고 바리때를 들고 '사위' 성에 들어가서 집집마다 차례로 걸식하시고 자리에 다시 돌아와서 진지를 드시고 가사를 고쳐 입으시고 발을 씻으시고 위엄을 갖추고 앉으셨다.”    

 

  다시 한번 천천히 어보시길. 세존은 감각을 의식하면서 그저 행하고 있을 뿐이다. 세존은 내면의 알아차림을 놓치지 않는다. “오직 할 뿐”이라던 숭산대사의 가르침도 이것이다.


 『바가바드기타』 2장은 '결과에 연연치 말고 감각을 알아차리면서 행하라.'는 것이다. 크리슈나가 우리에게 일러주는 참지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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