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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신호 Dec 16. 2024

한기(寒氣)

   몸이 으슬으슬 추워진다. 텔레비전 화면에 계엄령 선포라는 굵은 고딕체 글씨가 붉은 바탕 위에 적혀있다. 합법적으로 선출된 자의 불법적 행위라니. 이런 빌어먹을.     


 국회의사당의 불빛이 보인다. 출입을 막고 있는 경찰 사이로 카메라와 휴대폰 불빛이 반짝인다. 여기저기서 소리 지르는 고함도 들린다. 포고령을 읽어본다. “~처단이란 글씨가 눈에 들어온다. 한기가 피부를 파고든다. 아내는 청소 삼매에 빠져있고, 아들은 영화 서울의 봄을 말하면서 처음 겪는 사태에 어안이 벙벙해한다. 전주에 사는 딸이 카톡을 보내왔다. 제 마누라 때문에 저런 모양이라고 한다. 


 진눈깨비가 허공에서 내려온다. 국회의사당에는 인파가 늘어난. 기자, 보좌진, 유투버, 시민들이 뒤엉켜있다. 현장으로 달려간 그들의 정신과 용기에 탄복한. 카메라가 국회 상공으로 다가오는 헬기를 비춘다. 입술을 질끈 문다. 그나마 불법 쿠데타를 막겠다는 여당 대표의 말이 위로된다. 굵은 검정 테를 쓰고 다니는 그의 말에 기뻐할 때가 있다니 웃음이 나온다. 야당 대표가 의사당 담을 넘고 있다. 국회의장도 담을 넘었다고 한. 필요한 국회의원은 150명 이상. 하늘에서는 헬기가 내려온다.  


 중학생 시절 계엄령이 떠오른다. 새벽녘 라디오에서 나오던 대통령 박정희의 유고를 알리던 아나운서의 목소리는 다급했다. 잠들었던 친구들도 화들짝 깨어났다. 18년을 통치했던 대통령의 죽음은 우리에겐 전하의 승하였다. 이러다 북한군이 내려오면 어쩌지, 어린 마음에 염려되었다. 1979년 10월 26일 새벽 4시. 월말고사가 다가오고 있던 가을이었다.    


 80년 5월. 정확한 날짜까지는 모르겠다. 늦은 밤, 흑백 TV에는 비상계엄령 전국 확대라는 자막이 떴다. 중동 갔던 대통령도 돌아오고 있단다. 무서운 일이 벌어졌다는 생각을 했다. 아버지는 담배를 태우고 어머니는 손님의 부름에 달려간다.


 거실에서 tv를 지켜보다가 서재로 들어간다. 유튜버가 운영하는 현장 라이브를 연결한다. 의 숨소리가 고르지 못하다. 미친, 정신병자, 광기, 어이없는, 불법, 위헌... 같은 단어가 막 튀어나온다. 헬기에서 내린 계엄군이 국회 본관으로 진입하고 있다. 모여든 시민들이 고성을 지른다. 멈칫거리는 군인들이 보인다. 마스크와 야간투시경을 착용하고 있다. 그들도 이리저리 떠밀리며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다.   

   

 카메라가 국회 본회의장으로 향한다. 국회의장이 단상에 있다. 띄엄띄엄 자리에 앉은 의원들도 보인다. 기자는 아직 150명이 안 된다고 전한다. 밖에는 계엄군과 시민들이 실랑이 중이다. 시간 싸움이다. 저들이 곤봉을 휘두르고 최루탄, 공포탄을 쏘면 흩어질 군중들이다.      


계엄군이 정문으로 진입한다. 이들과 몸싸움하는 시민들.  여성의 목소리가 날카롭다. 미쳤냐고, 이게 뭐냐고 비명을 지른다. 계엄군이 주춤한다. 이상하다. 군인들 몸이 무거워 보인다. 공격적으로 진압할 태세가 보이지 않는다. 희망이 생긴다. 얼마 전 입대한 조카가 생각난다. 용맹한 공수부대원이 아닌 것이 다행이다.


 저녁무렵 광주에서 내려온 작은아버지가 놀란 눈으로 찾아왔다. 전두환이가 전라도 사람 절반 죽일 거라고 했다. 외삼촌이 염려된 어머니가 광주로 연락했다. 삼촌은 방금 방송국이 불탔다고 시민들이 무장하기 시작한다고 했다. 반란, 내란, 전쟁, 뭐라 불러야 할지 모르겠다. 뉴스에서는 검은 연기가 오르는 금남로를 보여주었다. 폭도들의 짓이라고 아나운서를 말했다.    


  학교 선생님들이 정문에 서 있다. 국사 선생님이 집으로 가라고 손짓한다. 시험이 연기되었다고 한다. 어린 중학생이지만 나라의 변고에 마음에 무거워진다. 가는 길에 보니 군청 옆 흥수네 팥죽집도 문 닫혀있다. 집에 가방을 던져놓고 TV를 본다. 종일 비상 방송이다.  

    

 오늘 밤에 계엄군이 완도까지 도망친 대학생을 잡으러 온다고 한다. 무서웠다. 어머니가 재우 집에 다녀오란다. 나는 양손에 무언가를 들고 거리를 걸었다. 시내는 텅 비어 있다. 아무도 없다. 번화했던 읍내가 조용하다. 오직 나 홀로 걷고 있다. 5월의 하늘은 푸른데 인기척이 없다. 기괴한 거리였다. 

 

 따뜻한 물을 마신다.  다시 국회 본회장이다. 현장에 있는 기자가 국회의원 150명 성원이 된 것 같다고 전한다. 계엄군이 회의장에 난입하기 전 계엄 해제를 가결해야 한다. TV는 회의장을, 유튜브에서는 몸싸움 중인 복도와 로비를 비춘다. 두 화면을 동시에 본다. 계엄군이 창을 깨고 있다. 주변에서 비명과 고함이 퍼진다. 창을 깬 군인은 자칫 제물이 될 수 있다. 스스로의 운명을 돌보길 바란다.   


 계엄군이 복도를 진입했다. 한데 그냥 맥없이 무리 지어 달리는 것처럼 보인다. 표정이 굳어있던 아들이 말한다. “아빠 함평 군청에서는 내일 집에서 대기하고 있으라고 했데”. 얼마 전 공무원이 된 아들은 근무가 염려되는 모양이다. 아내는 이 와중에도 여전히 청소 중이다.      


 국회의장의 꿈 뜬 모습에 속이 타들어 간다. 여러 의원이 개회를 독촉하고 있다. 회의장 복도에 다가섰을 계엄군이다. 이럴수록 절차를 지켜야 한다는 의장의 음성이 들린다. 유튜버는 거의 사색이 되어있. 그는 눈시울을 젖히며 시민의 힘을 말한다. 국회에 뒤엉킨 시민들도 무서울 텐데, 공포를 이기는 힘을 생각한다.     



 국회의장이 재적과반수가 넘어 안건을 상정한다. 간단하게 내용을 읽고는 표결한다. 가결 찬성을 뜻하는 푸른 불빛이 켜진다. 의장은 190명 참석에 190명 찬성이라며 계엄은 해제되었노라고 의사봉을 두드린다. 숨넘어갈 듯 긴장된다. 화면에는 시민들이 계엄군들에게 계엄 해제되었다며 돌아가라고 손짓한다. 그 소리에 군인들이 주춤한다.   


 매일 술에 취해있다는 그를 생긱한다. 과연 순순히 받아들일까. 그의 치켜 올라간 눈썹, 일그러지던 고집스러운 입술이 생각난다. 어쩌면 이 순간에도 격노하고 있을 것이다. 성숙한 인격이 부족한 통치자다. 새벽 230분이다. 아들은 일단은 해제된 것이 맞다며 제 방으로 들어가고, 이제는 아내가 화면을 바라본다.     


 대학생들을 잡겠다는 계엄군이 내려온다던 밤이 되었다. 아버지는 택시를 건너편 초등학교에 숨겨놓았다. 어둠은 내렸지만 전기를 켜지 않았. 계엄군이 오면 학생을 생포하기 위해 어떤 짓을 할지 모른다고 했다. 11시쯤 느닷없이 쿵꽝쿵꽝 소리가 하늘에 진동했다. 이윽고 군청 스피커가 켜졌다.    

  

 완도 군민 여러분, 우리는 광주에서 온 시민군입니다. 지금 군청 광장으로 모여 주십시오.”     


 절규하는 소리가 밤하늘을 가른다. 집마다 불이 켜진다. 사람들이 몰려 나간다. 나도 아버지와 함께 따라간다. 군청 앞에는 창문이 부서진 버스 두, 세 대가 었다. 안에서 수건을 머리에 두른 청년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전두환은 물러가라 좋다 좋다.” 언뜻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얼마 전 학교에 부임한 수학 선생님이다. 선생님은 그들과 손을 흔들며 노래하고 있었다. 차 안으로 동네 어른들이 음료수와 빵을 넣어준다. 아버지는 내 손을 잡더니 집으로 발을 돌렸다.     


 유튜버가 불법 계업이 종료되었다며 숨을 돌린. 글쎄... 씩씩거릴 용산 술꾼이 이 상황을 받아들일까. 이불을 덮어도 잠이 오지 않다. 여전히 한기가 맴돈다. 한동안 꿈과 현실을 넘나들다 자리에서 일어선다. 스마트 폰을 켠다. 어느새 새벽 4시다. 그가 거부권을 행사할 거란 소식도 있단다. 그렇다며 파국이다. 아침에 맞이할 일상이 두렵다. 기자가 미국 반응 전한다. 백악관이 몹시 불쾌하단다.      


 서재에 들어가 저녁 성무일도를 바친다. 기도에 마음이 닿지 않다. 신의 도움이 절실한데 신경은 세상으로만 향한다. 모든 것을 하늘에 맡길 수밖에 없다. 다시 거실에 나와 텔레비전 리모컨 버튼을 누른다. 기자가 용산 대통령실에서 계엄 해제를 받아들이는 담화를 발표할 거라 한다.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다. 

  

 한기가 스르르 빠진다. 눈꺼풀이 무거워진다. 중학 시절 맞았던 계엄령이 사십 년 뒤에 현실로 나타날 중이야... 악몽 같은 밤이다. 무서운 시대가 또다시 내 곁을 스쳐 간다. 가히 천우신조(天佑神助)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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