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만 개의 빛의 파편을 담은 찬란한 영화
흑백영화는 표면적으로는 컬러풀한 영화보다 다채롭지 않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지만 영화 ‘동주’에서는 컬러에 감춰져 보이지 않았던 것들을 발견할 수 있음에 찬란한 흑백영화가 무엇인가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흑과 백.
극과 극의 단순한 컬러이기에 단 하나로 정의될 수 있다고 여겨지지만 실은 그 흑백이 모두 같은 검은색 그리고 하얀색이 아님을 증명하며, 흑과 백 안에 수없이 많은 다양한 검은색과 흰색이 있음을 영화는 이야기한다. 빛의 세기, 그늘과 각도에 따라 수만 가지의 검은색과 백색을 만날 수 있고, 컬러영화보다 확연히 명확하게 느껴지는 명암은 그날의 공기의 무드, 햇빛의 일렁임을 체감할 수 있고, 떠돌아다니는 미세한 먼지입자는 카메라렌즈에 내려앉아 빛의 굴절을 통해 보케를 만들어낸다. 흑백의 극명한 대비를 통해 비로소 느껴지는 빛의 입자들은 한정적이게 보였던 흑백의 컬러들을 찬란하고 다채롭게 느껴지게 하는 것이다.
흑백영화에서 빛은 중요한 장치를 하는데, 영화의 이루는 것들 중 대사나 행동 이외에도 여러 요소로 표현될 수 있음을 영화 ‘동주’는 잘 알고 있다. 찬란한 경성의 거리를 비추던 빛이 점점 사라지며 어두운 감옥으로 장소가 바뀌고, 영화가 더해갈수록 점차 사라지는 채광은 찬란하게 빛나던 그들의 스러진 청춘을 단편적으로 나타내며, 영상의 조도를 통해 영화적 은유를 잘 보여주고 있는 예시라는 생각을 해본다.
심문을 받는 취조실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역광의 위치에 선 고등경찰과 상반되게, 초췌하지만 결연한 동주와 몽규의 얼굴과 등 뒤로는 빛무리가 일렁인다. 빛은 잠시 사라질 수 있지만, 영영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영화 속 장면에서 어둡지만 분명 빛은 그들에게 닿아있었다.
흑백의 배제된 컬러는 특히 빛과 물에서 유난히 반짝이는데, 역설적이지만 빛은 어둠 속에서 존재감을 발휘하며 좀 더 극명해진 비극적 명암대비를 보여준다. 어쩌면 식민지 청년의 분수에 맞지 않기에 버려야 할 희망인 펜촉의 반짝임과 그의 눈 끝에 살짝 맺힌 반짝임은 컬러영화라면 캐치 못했을 찰나의 흑백의 장면 속에서 유독 눈부셨다 그 눈부신 반짝임은 태양을 맨눈으로 본 것처럼 순간적으로, 눈가를 시큰하게 한다.
동주가 갇혀있던 작은 감옥의 철창에서 깜깜한 밤하늘 빼곡히 펼쳐져 있는 수많은 빛나는 별을 비추는 장면은 이 영화를 어떤 컬러영화보다도 찬란한 영화로 기억하게 만든다.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겠다는 다짐을 하는 어쩌면 모두가 알고 있는 유명한 시가 조금은 다르게 다가오는 까닭도 이와 같을 것이다 철창에서 반짝이는 별과 밤하늘을 비추던 앵글은 창틀 속 행복한 기억을 조명하며 그리움과 애틋함에 대한 공감을 가중시킨다.
영화 ‘동주’는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시인 윤동주와 사촌이자 친구인 독립운동가 송몽규의 청춘을 그리며, 흑백의 스크린 속 윤동주와 송몽규는 활활 타오르는 눈빛과 열망으로 젊음의 컬러풀함을 충분히 표현해 낸다. 너는 시를 써라 총은 내가 든다'라고 말하던 깊이를 알 수 없이 침전된 송몽규의 눈빛은 수많은 대사보다 압도적이게 다가온다.
시집과 교과서에 본 인물들은 텍스트가 아닌 스크린을 통해 생생히 재연되며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인물에 대해 조명하며 그들의 분노와 외침, 결연한 의지와 그것을 결심하기까지의 수많은 고민과 번뇌는 결코 한 줄의 글로 정의될 수 없는 것임을 영화는 담아냈다. 지식인 엘리트 청년은 부끄럽지 않은 때가 없었다
그의 글 밑바닥 깊게 깔린 자기반성과 참회, 죄책감.
그 절망감에 매몰되지 않기 위하여 그는 수없이 쓰러지고, 수없이 일어났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주와 몽규가 별을 꿈꾸고 계속 하늘을 올려다보는 이유는 땅과 주변의 현실을 직시해서는 미래와 이상을 꿈꿀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꿈을 꿀 수 없는 세상에 태어나서 맑은 물 같은 영혼을 가진 두 청년은 순순히 어두운 밤을 받아들이지 않으며 답을 찾기 위해 각자 다른 방식으로 하늘을 올려다보며 저항한다. 그렇기에 글은 동주의 희망이었다. 당장은 아무런 도움도 안 되는 듯 보이지만, 쓰지 않으면 본인이 견딜 수 없는 막연한 희망말이다. 어두운 시대 눈이 밝은 청년에게 희망의 무게는 녹록지 않으나, 영영 오지 않을 것 같은 조국의 독립. 몽규처럼 학생운동에 직접적으로 관여하지 않았지만, 많은 이들이 포기해 버린 그 희망을 동주는 놓을 수가 없다. 거대한 병원 같은 모두가 아프고 병든,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세계 속에서 깨질 것 같은 유리 같은 감수성을 가진 그는 쓰라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기 위해, 그리고 살아가고 싶은 이 땅의 누군가들을 위해 글을 적는다
영화는 단순히 어떤 인물의 행적과 스토리에만 집중하지 않는다. 다만 그의 희망이자 목숨이었던 글을 영화에서 들려준다. 글을 쓰기까지, 한 자 한 자를 종이에 옮겼을 심경은 감히 헤아릴 수가 없다. 어지러운 세상 속 남들보다 몇 배는 빨리 늙어버린 조숙한 어린 청년은 ’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써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 ’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를 이야기한다.
서로의 꿈을 지켜주고자 했지만 결국 그들은 죽음으로써 서로가 결코 이 이상한 세계에서 부끄럽지 않은 존재였음을 증명한다.
그렇기에 영화 ‘동주’는 서럽지만 나는 이 영화가 마냥 아프진 않았다.
결국 행위를 통해 자신이 스스로의 이상을 배반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야말로 이상주의자의 가장 완벽한 결말이 아닐까?
'부끄러움을 아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
글이 있어서 빛나고, 이상이 있어 아름답고, 젊음이 있어 찬란한 그들의 끝나지 않을 여름은 결코 부끄럽지 않았기에 수만 개의 빛처럼 찬란하게 기억될 아름다운 영화 동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