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가 아닌 연애
세상이 베를린을 가난하지만 섹시한(arm aber sexy) 도시라고 지칭하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은 주거비용이 천정부지로 뛰어올라 더 이상 가난한 도시라고는 할 수 없지만 여전히 베를린에서는 유럽의 다른 대도시에 비해 자본주의와 소비문화의 존재감이 적다. 명품 매장이 적고, 명품을 자랑스럽게 착용하고 다니는 사람도 적을 뿐만 아니라 소비와 경제성장보다는 예술, 여유, 자연, 공존과 같은 가치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래서 성평등이나 LGBTQ 권리가 세상 어느 곳에서 보다도 뜨겁게 토론되고 다양한 관점을 반영하는 예술 전시와 각종 공연, 툭하면 거리로 나오는 데모 행렬 등이 세상을 바꾸자고 쉬지 않고 속삭인다. '열심히 일해서 돈 모아 집 사는 것'과 같은 한국식 인생 설계가 왠지 모르게 시시하게 느껴지게끔 만드는 이 도시의 에너지는 그래서 여전히 섹시하다.
초록이와 나는 둘 다 부모님으로부터 경제적 지원을 받지 않는 가난한 학생이다. 둘 다 파트타임으로 일을 하긴 하지만 벌어서 생활비 충당하기 바쁘다. 기념일 (n주년, 밸런타인데이) 같은 건 아예 챙기지 않고 생일과 크리스마스에만 작은 선물을 주고받는다. 둘이서 제대로 된 레스토랑에서 밥을 먹는 일도 한 달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하다. 그래서 우리 커플에게 베를린만큼 잘 어울리는 도시는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돈이 없어도 공원이나 운하 수변, 모퉁이마다 카페나 가게가 있는 한적한 거리를 산책하며 데이트를 할 수 있고 특히 노이쾰른같은 동네에 가면 여전히 4유로 이하의 가격으로 팔라펠 샌드위치를 먹을 수 있다. 게다가 대학생은 공연, 전시회, 심지어 영화관에서도 학생 할인을 받을 수 있다. 무료로 볼 수 있는 전시도 종종 있는데, 그냥 도시 전체가 하나의 전시회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철마다 어딘가로 여행을 떠나고 고급 호텔에서 호화로운 시간을 보내다 오는 커플들, 아니 그렇게 과장할 필요도 없이 가끔은 '요리하기 귀찮으니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하고 레스토랑에 가서 남이 해주는 밥 먹을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이 너무 부럽다. 결론은 이거다. 부럽다.
하지만 그들의 대부분은 서로를 소비의 파트너로 활용하고 있지 않을까 싶다. 돈 쓰지 않고는 서로를 즐겁게 해 줄 능력이 없는 그런 연인 관계가 아닐지, 돈이 있는 동안은 확인할 길이 없을 것이다. 초록이와 나는 비싼 선물이나 이국적인 여행지, 좋은 음식 같은 것들로 서로를 감탄시킬 수 없다. 돈 없이도 서로가 지루함에 빠지지 않도록 뭔가는 해야 하니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기본적으로 대화를 많이 나눈다. 우리의 가장 흔한 데이트는 카페에서 각자 책 읽기인데, 보통은 더치페이 하지만 가끔 묵묵히 내 커피값까지 계산하는 그가 그렇게 멋있어 보일 수 없다. 우리는 같이 글쓰기도 하고 가끔은 기타도 치고 노래도 부르고, 온갖 공상과 생각 실험을 함께한다.
얼마 전 생일을 맞은 초록이에게 가장 좋아하는 작가의 연극 표 두 장을 선물했다. 공연을 예매할 당시, 생일 당일 아니면 생일로부터 2주 후, 둘 중 고를 수 있는 상황이었는데 나는 좌석 상황이 훨씬 더 나은 2주 후 공연일을 선택했다.
초록이는 티켓을 받고 아이처럼 좋아했다. 그에게
"사실 오늘도 공연이 있던데 생일 저녁에는 다른 계획이 있을지도 모르니 2주 후 공연 예매했어. 게다가 2주 후 날짜엔 맨 앞자리 좌석이 있더라구."
라고 설명했더니 좋은 선택이었다고 초록이가 동의했다. 그런데 의외의 이유에서였다.
"나도 오늘보다는 2주 후 공연이 훨씬 낫다고 생각해. 남은 2주 동안 이거 생각하면서 행복해 할 수 있잖아."
초록이는 이 티켓이 얼마짜리인지 모르지만 그를 이렇게나 감동시킨 이 선물은 고작 9유로짜리다. 이 연극은 베를린의 도이체 극장(Deutsches Theater)에서 상연중인 오스카 와일드의 <Bunbury>라는 희극인데 일반인 입장권은 35유로, 학생은 9유로다.
가난해서 불편하고 비참한 게 아니라 가난하지만 순수할 수 있는 이 도시와 초록이의 영혼이 나는 너무나도 사랑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