캥거루의 뛰다가 생각했어
20대에 들어간 나의 첫 회사는 매우 바람직하게도 여성 친화적인 기업을 표방하는 곳이었다. 우선 직원의 대다수가 여성이었고, 그중 특정 직군에는 압도적으로 여성이 많았다. 관리자 중에서도 여성이 제법 존재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아이를 키우며 관리자가 된 사람은 단 한 사람뿐이었다. 그분과 함께 일하며 한때는 나도 여느 직장인처럼 ‘언젠가 저분처럼 임원이 될 수 있을까.’ 꿈을 꾸며 임원이 되기 위한 커리어 로드맵을 그려보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존경하던 그분은 함께 회식을 하던 자리에서 황급히 자리를 뜨셨다. 하혈이었다. 그리고 어려풋하게나마 알게 되었다. 아이를 키우는 여성으로서 임원이 되는 것만큼 그 생활을 이어가는 것 역시 녹록지 않다는 것을 말이다. 우리 회사는 참으로 여성 친화적인 기업이었기 때문이다.
우리 회사는 여성 친화적인 기업답게 깔끔하고 번듯한 수유실이 층마다 마련되어 있었다. 덕분에 모유 양이 많았던 나는 출산휴가 복직 후 수유실에서 유축을 한 모유를 얼리거나 냉장 보관해 아이에게 먹이겠다는 결심을 할 수 있었다. 문제는 유축 타이밍이었다. 복직 전에는 수시로 수유를 해왔지만 당연하게도 복직 후에는 그럴 수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아이를 낳은 여성 직원이라 회사일을 소홀히 한다는 인상을 주는 것이 죽기보다 싫었다.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니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회사에서의 유축 횟수를 단 4번으로 줄였다. 9 to 6 근무 체제였기에 이른 출근을 해 오전 8시에 한 번, 12시 점심시간에 한 번, 커피 따위 마시지 않고 일만 하며 시간을 아끼다 오후 3시쯤 한 번, 오후 6시 이후에 한 번. 매일 부랴부랴 일을 하고 어떻게든 30분 이내에 수유를 마치기 위해 날래게 몸을 움직였다.
출근 첫날 바로 유선염에 걸렸다. 나와야 할 모유가 제때 나오지 않으니 고스란히 염증이 된 것이다. 가슴을 수십 개의 바늘로 찌르면 딱 이렇겠구나 싶은 고통을 맛봤다. 점심시간에 황급히 달려간 병원에서 진료 후 통증을 달래주는 치료를 받는 동안 우연히 내 바로 앞에 진료를 받은 환자가 유방암 진단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나처럼 모유 수유를 하는 엄마였다. 모유 수유를 하다 보니 부푼 유선에 가려 가슴에 생긴 멍울을 미처 발견하지 못한 것이다. 남일 같지 않았다. 유선염 약을 먹고, 유축한 모유를 버리며 참 많이 울적했다. 아이를 낳고 단 하루 출근을 했을 뿐인데 마치 한 달은 지난 것 같은 지친 기분이었다.
내가 유축을 한다는 사실을 알고 평소 아내를 그렇게 사랑한다는 사랑둥이 팀장 A는 아무 용건도 없이 나를 수시로 찾아댔다. 화장실만 잠깐 가도 유축을 하러 간 줄 알고 내 이름을 그렇게나 외쳐댄 것이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담배를 피우러 가 몇 십분씩 돌아오지 않는 직원들은 찾지도 않으면서 점심시간에 도시락 먹으며 유축하고, 남들 커피 마시는 시간 아껴 오후에 딱 한 번 유축을 하는 나를 그 사람은 그렇게도 못마땅해했다. 역시 사랑둥이는 뭐가 달라도 달랐다. 늘 주어진 일 이상을 했고, 그러느라 야근을 밥 먹듯 했으며 고과도 좋았다. 그러나 아이를 낳았고, 유축을 한다는 사실은 내가 쌓아온 그 무엇보다도 나를 대표하는 간판이 되었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 회사는 여성 친화적인 기업을 표방하고 있었다. 각종 기사에서도 그렇게 소개되고 있었고, 그에 걸맞은 회사 내규도 마련되어 있었다. 부서에는 능력 있고 일 잘 하는 여성 직원들이 많았는데, 당시 출산을 했던 여성 직원 다수가 출산 후 육아휴직을 신청하자 줄줄이 권고사직을 당했다. 나는 우리 부서에서 최초로 육아휴직에 들어간 사람이었다. 내가 대단해서가 아니라 그 타이밍에 임원이 교체되었고, 마침 조직을 개편하던 시기였기 때문에 타이밍이 좋았던 덕분이었다.
그 좋은 타이밍에 임원은 내게 말했다. 내가 왜 너에게 육아휴직을 허가해야 하는지 너의 가치를 입증해 보라고. 국가에서 법으로 보장하는 육아휴직이란 것이 직원 스스로 본인의 가치를 입증해야만 사용 가능한 것인지 그 시시비비를 가리기도 전에 내 입은 열심히도 움직였고, 그가 나의 가치를 인정한 것인지 그저 조직 개편 중 사소한 일은 귀찮았던 것인지 알 수 없는 상태로 나는 육아휴직에 들어갔다.
어느 날 걸려 온 전화 한 통에 육아휴직 12개월을 미처 다 채우지도 못하고 복직을 했다. 내 직무에 T/O가 있다는 소식에 빠르게 복직을 해야만 했다. 소수로 운영되는 직무였고, 나중에 T/O가 없어지면 복직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복직 후 나는 스스로가 부여한 묘한 사명감에 휩싸여 있었다. 그 큰 회사에 출산휴가를 내는 방법을 정리한 매뉴얼 하나 없어 내 손으로 출산휴가 매뉴얼을 만들어 주변 동료들에게 배포를 할 때부터였을까. 언제부터인지 모를 어느 순간부터 우리 회사 사람들에게, 아니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여성이 아이를 낳아도 일을 잘할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하고 싶은 마음이 크게 자리하고 있었다.
복직 후 나 다음으로 출산을 하게 될 다른 여성 직원들이 보다 수월하게 육아휴직을 쓸 수 있도록 좋은 레퍼런스가 되기 위해 최선을 다해 일했다. 그냥 일만 하면 되었을 것을 괜한 입증 욕심에 나도 모르게 일에 몸을 갈아 넣었다. 다음 해에 진급이 예정되었다. 혹시나 육아휴직 때문에 승진에 불이익이 있을까 봐 가산점을 받을 수 있는 HSK을 준비했다. 매주 한 번씩 점심밥을 굶어가며 중국어를 배우는 내게 부서장 중 하나가 다가와 말했다. 자신이 알고 있는 중국어는 piaoliang(예쁘다) 말고는 없노라고. 회사 특성상 중국 출장이 많았다. 한 마디로 그 부서장은 중국 출장 때마다 여성이 나오는 술집에 꽤나 많이 다녔다는 뜻이다. 참으로 배려가 넘치는 발언이 아닐 수 없었다.
인턴들이 들어오면 회사 적응을 돕기 위해 배려 차원에서 회식 시간이 꼭 마련되었다. 왜 회식의 2차는 꼭 노래방이어야 했을까. 대학교를 갓 졸업한 인턴들 앞에서 팀장 B는 제 흥에 못 이겨 웃통을 벗었다. 목에 항상 쁘띠 스카프를 두르던 그는 홀딱 벗은 웃통에 쁘띠 스카프만 매고도 참으로 당당했다. 팀원 모두가 부랴부랴 옷을 입혔다. 나는 빨리 옷을 입으라 외쳤고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목도한 인턴들은 노래방을 빠져나가고 나서야 눈물을 흘렸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그가 그토록 자랑하던 럭셔리 카 브랜드만 보면 지금도 그 모습이 눈앞에 생생하게 재생된다.
직장인의 꽃은 임원이기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 역시 잘 버티고 버텨 임원이 되어보겠다 꿈을 꾸었다. 그런데 그룹 계열사 첫 여성 사장에 취임한 분의 이야기를 전해 듣고 마치 내가 감히 넘보지 말아야 할 것을 넘본 듯한 기분이 되고 말았다. 남편이 물었다고 한다. 가정이냐 회사냐. 그분은 회사를 택했고, 이혼을 했고, 그렇게 사장이 되었다. 나는 그분의 가정 상황을 전혀 알지 못하며, 그분의 선택을 감히 판단할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하지만 마음이 착잡해지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그러고 보니 회사 남성 관리자의 다수는 아내도 있고 자녀도 있었는데 여성 관리자의 90% 이상은 이혼을 했거나, 결혼을 했어도 자녀가 없었다. 바늘 구멍을 통과하는 것과도 같다는 임원이 되는 길. 그러나 그 많은 아이가 있는 여성들이 관리자가 되는 것을 스스로 포기한 것인지 포기를 당한 것인지 나는 확언할 수 없다. 지금도 생생하게 그려지는 그곳은 그렇게 여성에게 배려가 넘치는 진정 여성 친화적인 회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