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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포포 매거진 Mar 06. 2024

#2 흐린 눈의 육아

에스텔의 프라하 육아일기

생경한 광경을 매 일상에 마주했다. 프라하에 사는 첫 6개월 동안은 모든 것이 신기했다. 거리의 사람들, 복장, 어린아이들, 골목마다 있는 상점들. 곳곳에 있는 꽃집과 식당, 다른 건물이지만 한 건물인 것처럼 붙어있는 집. 트램을 타고 창밖으로 보이는 온갖 것을 관찰하며 보냈다. 그러다 보니 그들의 일상 단면은 나에게 늘 신선한 충격을 주는 장면이 되었다. 내가 두 아이를 키우기 때문에, 체코 아이들이 신은 신발, 가방, 유아차, 엄마들의 표정, 이런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아이들은 얇은 모자를 쓰고, 흙 묻은 장화를 신고 있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게다가 모두 다 약속이나 한 듯 아이들은 백팩을 매고 있다. 빨간색, 파란색, 분홍색 선명한 색의 옷을 입고 딱 맞는 백팩을 매고 있는 빛나는 눈과 긴 속눈썹을 가진 체코 아이들. 아이들은 자기 가방에서 물을 스스로 꺼내 마신다. 어른의 도움을 받지 않고도 스스로 할 수 있는 것들이 많다. 엄마,아빠가 그리 교육한 것이다. 그러다 지하철에서 본 아이의 가방을 보고 웃음이 빵 터졌다. 음료수 물병의 뚜껑이 날아가 있는 것이다. 일부러 뚜껑을 힘주어 떼지 않으면 그렇게 있을 수 없는 음료수라 웃음이 터졌던 것같다. 그러니까 아이가 목이 마르면 그대로 가방에서 빼서 스스로 음료수를 마실 수 있도록 세팅되어 있었다. ‘먼지 다 먹을텐데’ 생각이 들다가도 ‘괜찮아! 안 죽어!‘ 그 단순하고 명쾌한 정신에 웃음이 났다. 이 순간은 기억에 오래 남아있었는데, 별건 아니지만 나에게 깨달음을 주었던 순간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내가 절대 저렇게 하게 두진 않을 테지만) 저렇게 살아도 되는 거다. 너무 깔끔 떨지 않고, 너무 유난 떨지 않아도 된다.

프라하에는 곳곳에 놀이터가 있다. 프라하성이 보이는 명당자리에도 놀이터가 있고, 프라하의 작은 마을 곳곳에 공원과 작은 놀이터가 있다. 어디에나 놀이터가 있으니, 아이들과 편히 보낼 수 있다. 우리 동네에도 작은 놀이터가 있는데, 크기는 작아도 알차다. 보통 한국의 놀이터는 우레탄 바닥으로 만들어져 있으나, 체코의 놀이터는 대부분 모래바닥이거나 흙바닥이다. 그리고 따로 모래놀이 공간이 있다. 거기에는 아이들이 놀다가 두고 간 공공재가 된 모래놀이 장난감이 있고, 장난감을 주워다 아이들은 상상력을 발휘해 놀이에 시간을 쏟는다. 모래놀이장이 레스토랑도 되었다가, 아이스크림 가게도 되었다가, 생일상이 되어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여기 저기서 따온 나뭇잎과 모래로 약을 짓는 모습을 구경하는 재미가 있다. 동네 놀이터에서 아이들을 풀어놓은 어느날, 캐나다 엄마를 우연히 만나서 이야기를 나눴다. 아장아장 걷는 아기와 우리 아이들이 모래놀이에 매진하고 있으니, 혹시 자기 아이가 우리를 귀찮게 하는 건 아닌지 하고 물어보며 말을 건넨 것이다. 그녀는 아이들과 프라하에서 2년 정도 생활하고 다시 캐나다로 돌아갈 준비를 한다고 했다. “여기서 살면서 좋았던 점이 뭐가 있나요?” 물어보니 캐나다에 비해서 아이들이 갈 수 있는 공원이 곳곳에 있고, 아이들이 자연 속에서 놀 수 있는 게 장점이라고 대답했다. 이제 다시 캐나다로 돌아가면 이 부분이 가장 아쉬울 것 같다고 말했다. “그렇죠? 나도 한국으로 돌아가면 이게 제일 아쉬울 것 같아요.“ 하고 대답했다. 이후로도 그녀와 나는 놀이터에 서서 두아이 육아를 하면서 정말 힘들다는 푸념을 늘어놓았다. 그러나 피곤해 보이는 그녀의 얼굴에서 육아에 찌든 모습이 아니라 기쁨이 보였다. 육아가 육체적으로 힘든 거야 우리가 선택한 거라 어쩔 수 없지만, 아이들과 어디든 갈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스트레스를 덜어주는 것 같다. 내가 여기서 매일 느끼는 것은 옳았다. 맞다. 여기는 아이들과 보호자가 행복한 나라다.

“내려놓는 거? 어떻게 하는 거야?” 내려놓으란 말에 매번 나는 이런 생각을 했다. 도대체 어떻게 하는 걸까? 아이를 낳고서도 일, 청소, 공부, 음식 어떤 것 하나도 내려놓지 못하고, 아등바등 살며 힘겨워하는 내게 지인들이 그만 좀 내려놓으란 말을 했었다. 주변을 둘러보면 다들 열심을 내어서 사는데, 뭘 내려놓으라는 거지? 그리고 도대체 내려놓는 건 어떻게 하는 건지도 몰랐다. 완벽을 추구하면서 스트레스받고 잠을 못 자면서 까지, 일하고 청소하고 육아하느라 참 매일 같이 예민하고, 날이 서 있었다. 그래서 주중에는 좀처럼 웃는 날들이 없었다. 길을 걸어가는 엄마들이 아이들에게 왜 이렇게 신경질적인지 이해가 갔다. 하루 종일 먹을 거, 입힐 것, 걱정하면서 멀티테스킹하느라 머릿속이 빙글빙글 돌면서도 어느 방면에서도 흠 잡히지 않고 싶은 절대적인 기준이 나에겐 있었던 것 같다. 이것은 한국에서 너무나 쉽게 모든 것을 엄마의 탓으로 돌리는 문화도 한몫했겠다고 생각한다. 학교에서 아이가 부진하면 엄마가 학원을 보내지 않고, 아이를 방치한 탓이고, 아이가 키가 작으면 엄마가 잘 챙겨 먹이지 않은 탓이고, 아이가 정리 정돈을 못 하면 엄마가 정리 정돈을 못 하기 때문이었다. 닭장처럼 붙어 있는 아파트에 살면서 삶의 편의를 누렸지만, 혹여나 발소리가 쿵쾅거릴까 노심초사했던 날들이 매일이었다. 내려놓으면 아이가 부족해지고,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상황에서 엄마는 언제나 애써야 한다. 그래서 나는 참 예민한 사람이구나 생각했었다. 눈치도 많이 보고 참 피곤하게 살았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너무 많은 것을 해주려 애 쓰느라, 아이의 내적 성숙이 쌓이는 본격적인 육아를. 하기도 전에 지쳐버렸다. 아이의 부족이 나의 부족이 아님에도 상향 평준화된 ‘보통’을 향한 길을 쫓는  걸로도 바빴다. 이런 것에 휩쓸리지 않기를 바랐지만, 내 아이가 부족한 아이가 되는 순간부터는 나도 할 수 없이 허둥지둥 쫓아가게 되었다. 그저 ‘부족함’을 벗기위해 숨가삐 나아가야 했던 아이와 나. 평범한 게 이렇게 어려운 것이었나? 세상은 왜 이렇게 우리에게 바라는게 많을까? 의문스러웠다.

놀이터에서 작은 사건이 있었다. 첫째 아이 난감한 표정에 달려가 보니 머리카락에 모래가 잔뜩 있었다. 체코 아기가 첫째의 머리에 모래를 와르르 부었다고 한다. 아무렇지 않게 머리를 탈탈 털어주고 집에 가서 씻으면 되니 괜찮다고 말했다. 아기 아빠가 자기가 못 본 사이에 사고가 났다는 식으로 가볍게 미안하다는 제스처를 취하고 싱겁게 끝났다. 예민하게 굴지 않고 아이들이 노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별일 없이 대한다. 그러니 첫째아이도 별다른 반응 없이 “집에 가서 씻으면 돼! 다음부터 그러지 마 아기야!”라고 말했다. 평소 같았으면 아이도 나도 속상해 했을 텐데, 아무래도 체코에서는 좀 더 여유가 생기는 것이다. 관대한 시선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여기서는 모두가 흐린 눈으로 육아를 하고 있다고 느꼈다. 굳이 아이들이 놀다가 벌어진 일에 부모가 너무 선명하게 대처할 필요도 없고, 적의 없이 서로를 대한다. 어른도 아이도 불완전한 존재고, 서로 이해하고 나아가면 그만이다. 아이들이 누리는 공간 안에서 보호자들도 여유가 생기니 얼굴 붉힐 일이 없었다. 이 별일 없는 경험이 참 신기했다. 그때 내려놓는다는 것이 뭔지 계속해서 자각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내가 깨달은 ‘내려놓음’은 이런 것이었다. 우리를 둘러싼 환경에 큰 의미를 두지 않고, 지나치게 아이와 나를 동일시하지 않고, 편안하게 지내는 것. 어떤 부분은 운명에 순응해 보기도 하고, 불필요한 노력을 해가며 통제할 수 없는 부분까지 통제하려 들지 않는 것이다. 세상이 정한, 또는 내가 정한 기준을 좀 낮추고 아이도 나도 즐겁고 편안하게 충만한 하루를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모든 것을 선명히 보지 않아도 충분히 잘 흘러가고 있고, 조금은 흐리게 보려 노력하는 것도 괜찮다. 통제하지 않으면 애쓰지 않고도 행복할 수 있었다. 잔뜩 긴장해 움츠러든 어깨가 펴지는 기분이었다. 앞으로 아이도 나도 더 행복할 수 있다. 

체코의 부모들은 육아를 쉽게 한다. 여기 아이들도 똑같이 떼쓰고, 울고, 어지르고, 엄마,아빠에게 매달린다. 그들에게도 육아가 결코 쉽지 않겠지만은, 가능한 쉬운 방식을 선택한다. 엄마,아빠가 애쓰며 아이들을 따라다니지 않고 풀어줄 때는 풀어주고 단호하게 혼낼 때는 혼내며 훈육한다. 아이들도 놀이터며 공원이며 자유롭게 누비며 지낸다. 곳곳에 아이들을 위한 공간이 있다는 것도 중요하지만, 체코 엄마아빠의 편안한 육아는 완벽주의를 포기함에서 온다. 아이가 하는 아이다운 행동을 통제할 수 없다는 인정이 있고, 그다음에 엄마,아빠가 편한 방식의 육아를 선택한다. 비가 오는 날에는 레인코트를 입히고 장화를 신겨서 아이가 웅덩이를 밟을 수 있게 해주고, 집에 오면 레인코트를 벗겨 세탁해서 말린다. 여름에는 개울에서 어린아이들이 팬티도 기저귀도 없이 홀랑 벗고 놀고, 대충 물기를 닦고 그대로 옷을 입고 집으로 가기도 한다. 아이와 부모간의 타협 지점이 있는 것이다. 게다가 두돌 정도 되는 아기가 뛰기 시작하면 두발자전거를 태워서 균형 잡는 연습을 시킨다. 그래서 3돌 정도 되어 보이는 아이들도 혼자 두발자전거를 탄다. 부모는 아이에게 스스로 배울 기회를 주고, 아이는 부모의 최소한의 지시를 따른다. 한국의 유아 자전거는 보호자가 잡을 수 있는 핸들이 있어서 유아차 대용이라면, 여기서는 진짜 두발자전거를 아이가 탄다. 한국에서는 놀랄 일이긴 하다. 사실 내가 봐도 조마조마한 순간들이 있으니까. 그런데 여기서는 다들 그렇게 한다. 엄마,아빠만 조금만 마음을 편하게 먹고, 흐린 눈으로 아이를 바라보면 가능한 일이었다. 흐린 눈을 장착하면 다른 아이와 내 아이를 비교할 이유도 없고, 하나도 거슬릴 게 없다. 여태 왜 이렇게 힘들게 육아하면서 살았지 싶었다. 굳이 완벽할 필요가 있어? 깨끗한 집, 잘 관리된 아이들. 아이들 의사와 상관없이 위험한 모든 것을 원천 차단. 아이들을 안전히 지키고 싶어서 강박적으로 해내던 모든 것이 우리를 행복하게 하진 않았다. 슬프지만 사실이다. 그러나 완벽을 추구하지 않으면 육아에 기쁜 순간이 남는다. 어설프고 완벽하지 않아서 더 즐겁고 행복한 순간이 말이다. 아이는 자라면서 배워간다. 그런데 나는 자꾸만 그것을 잊었다. 

이제는 익숙한 광경을 마주한다. 놀이터에서 아이들은 헝클어진 머리에 흙 묻은 바지와 이미 오래전부터 더러웠던 것 같은 장화를 신고, 흙 놀이를 하고 손을 탁탁 털고, 그네를 타고 모래 언덕에서 엉덩이를 붙이고 미끄럼틀을 탄다. 아이들의 얼굴은 누구보다 해맑지만, 옷은 죄다 낡고 해졌다. 최소 2대째 물려받은 것 같은 옷이다. 어차피 아이들은 밖에서 오랜 시간 동안 놀기 때문에 더러워져도 괜찮은 옷을 입는다. 그렇게 누가 봐도 시골 삽살개 처럼 놀고 있는 체코 아이들. 놀이터에 있는 모든 아이가 그렇게 논다. 부모들은 벤치에 앉아 이야기하거나, 전화 통화를 하고 있다. 그저 아이는 아이의 삶을 살고, 보호자는 보호자의 시간을 보낸다. 그 풍경이 묘하게 위안이 된다. 아무도 서로 지레 판단하거나 살피지 않고, 저 집 아이는 누군지 궁금해하지 않고, 그저 지켜본다. 큰 갈등이 없는 한 그대로 둔다. 편안했다. 그리고 아이들은 주어진 상황 속에서 배워나간다. 실컷 흙장난하고, 자유롭게 뛰어다닌다. 이제 이‘방목의 합의’가 이뤄진 놀이터가 즐겁다.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육아에서의 완벽을 추구하지 않고, 아이들이 충만한 하루를 보낼 수 있도록 지켜본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아이들은 엉덩이를 흔들면서 뛰어갔다. 꺄르르 신이 나서 몸을 이리 흔들고 저리 흔드는데, 나까지 웃음이 났다. 신나게 놀고 해가 뉘엿뉘엿 저물 즈음에 집으로 걸어가는 그 길의 기분을 나도 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원 없이 놀았다는 생각에 개운함이 들고, 집안에 들어서면 엄마가 밥 짓는 냄새가 나고, 집에 들어가 텔레비전을 보고 또 놀 생각이지만, 밖에서 놀고 싶은 마음 모조리 풀어내어 보람찬 그 기분. 통로 아파트 살던 시절 학교 친구들과 동생들, 오빠 친구들과 뒤엉켜 놀다가 하나둘씩 아이들이 사라지고, 저녁 먹으러 오라는 엄마의 외침에 흙투성이 손을 탁탁 털고, 집으로 돌아가던 그때가 생각났다. 아이가 원 없이 놀 자유. 그것을 엄마 아빠가 모두 채워주진 못할 것이다. 나머지는 동네 친구들과 동네의 놀이터가 해주는 게 아닐까. 작은 놀이터와 약속하지 않아도 놀이터에 있는 아이들. 이 정도만 있어도 충분한데, 한국에선 쉽지 않다. 날씨가 좋은 날엔 미세먼지가 심하고, 또 가야 할 학원이 있고, 학원이 마치면 놀이터에는 친구가 없다. 프라하에 살면서도, 프라하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부러웠다. 프라하에는 자신이 누렸던 어린 시절의 기쁨을 자녀에게도 물려줄 수 있는 삶이 있었다. 내가 아는 기쁨을 아이에게도 알려 주는 것. 부모로서 자식에게 해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 아닐까? 여전히 어린 아이을 돌보는 것이 쉽지 않다. 그러나 다신 없을 이 시기에 아이와 함께 보내는 즐거운 시간을 소중히 품어가려 한다. 이게 다 프라하에 왔기 때문에, 내가 체코에 있기 때문에 생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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