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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날만 Feb 17. 2017

인스타그램은 소음일까

한병철, 김태환 역, 『에로스의 종말』, 문학과 지성사, 2015를 읽고


 인스타그램의 뉴스피드에는 짧은 시간동안에도 수 십 개의 소식이 올라온다. 3초에 하나씩 휙휙 넘겨도 충분히 오랫동안 재미를 볼 수 있다. 사진을 구경하다보면 이런저런 외침이 들려오는 것 같다. “좋아해주세요!” “나 근사한 곳 다녀왔는데!” “어때? 예쁘지?” 고요를 되찾기 위해서는 하트를 날려야 한다. “그래, 근사하네!” “좋아!” “(나쁜 것은 조금도 없고) 좋기만 해!” 그래도 인스타그램 세상에 침묵은 도래하지 않는다. 보지 못한 사진이 아직 무궁무진한 가운데 그들의 언성도 높기 때문이다.

 ‘좋아요’는 페이스북과 마찬가지로 인스타그램의 핵심 기능이다. 인스타그램 세상에는 사랑이 넘친다. 문제는 그렇게 좋아한다고 고백하기까지 얼마나 걸리느냐 하면…… 5초도 걸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기엔 어떤 결단이나 고뇌도 없다. 사진이 눈에 들어오는 순간 자동반사적으로 사랑에 빠져버린다. 나를 비롯한 인스타그램의 유저들은 어쩌면 얼마든지 고개를 끄덕일 준비가 되어 있는 채로 접속하는 것이다. 한병철은 이런 좋아함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며, 에로스가 소멸해버린 일시적 감흥에 불과하다고 말할 것이다. 이 글은 『에로스의 종말』 의 관점에 입각해 인스타그램을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인스타그램에는 긍정성이 과잉되어 있다. 사람들은 게시글을 올리면서 긍정적인 반응만을 기대한다. 시스템 자체도 부정적인 반응을 허용하지 않는다. ‘싫어요’ 버튼은 ‘당연히’ 없기 때문이다. 어떤 유저들은 ‘충분히’ 긍정되지 않을까봐 불안해한다. 좋아요의 수가 예상한 만큼 이르면 그제야 안심하면서, 인기 많은 사진을 올린 자기 자신을 긍정한다. 이때의 자기긍정 여부를 판단하는 것은 친구들을 비롯한 타인이지만 이 타인들은 부정성을 지닌 타자가 아니다. 자신들과 똑같이 하트를 찾아 인스타그램 세상을 배회하는 동일자들이다.

 인스타그램 세상에서 유저들은 자신의 삶에 대해 말하지만 그것은 시련에 대항하는 투쟁이나 도전, 새로운 자아에로의 여정이 아니라, 자기승인을 요청하는 것에 불과하다. 기존에 가지고 있던 생각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인정받는 것이 목적이다. 부정성에 부딪쳐서 자기의 벽을 무너뜨리며 역동적으로 살기 위해 접속하는 것이 아니라, 성벽을 더욱 견고히 쌓고 절대 무너뜨리지 않기 위해 인스타그램을 하는 것이다.

 해시태그를 통해 유입되는 사람들은 낯선 타인이긴 하지만 아토포스적 타자는 아니다. 그들 역시 좋아요만을 외치거나 상업적인 댓글을 달 뿐이다. 아토포스적 타자가 부재하는 이곳에서는 진정으로 새로운 것이 없다. 촬영된 장소만 다를 뿐 실질적으로는 똑같은 사진들이 끊임없이 올라온다. 맛있는 음식과 황홀한 여행지에 대한 정보가 매일 상이하게 제공되지만, 그 가운데 ‘전인미답의 지대’, 그리하여 진실로 신선한 통찰을 선물해주는 공간은 없다.

 인스타그램에 올라오는 맛집과 관광지는 얼마든지 도달할 수 있는 헤테로토피아일 뿐이다. 헤테로토피아를 소개해주는 사람들은 매우 친절하다. 자신이 간 곳은 어디인지, 길은 빨리 찾을 수 있는지, 누구와 갔는지, 가격은 얼마인지, 그래서 자신의 만족도는 어느 정도인지 등을 찬찬히 설명해준다. 그렇게 모든 것은 알려져 있다. 미리 알 수 없는 것은 없다. 설령 설명이 부족하다고 해도 따로 검색해보기만 하면 얼마든지 ‘알아둘 수 있는Kenntnis’ 것들뿐이다. 새로운 지식이나 이론을 산출하는 ‘인식Erkenntnis'은 없다. 그리하여 그 정보를 활용하여 발생하는 것 역시, 유일무이한 경험이 아니라 단순하고 반복 가능한 체험이다.

 시각적 관능만이 범람하는 이곳에서 보이는 것 너머를 응시하는 정신은 사라진다. 진정한 정신은 에로스적인 것의 곁에 머무르며 일상보다 고귀한 시간을 산다. 하지만 인스타그램 세상에서 사람들은 한 사진에 오래 머무르지 못한다. 아무리 강렬한 사진, 심지어 포르노그래피-요즘에는 ‘foodporn'이라는 가공할 단어까지 생겨났다 -처럼 주목을 끄는 사진이라 할지라도 가슴에 닻을 내리지는 못한다. 뉴스피드의 저 아래에도, 혹은 미래에 올라올 사진들에도 그런 강렬함을 대체할 다른 강렬함, 실은 ‘같은’ 강렬함, 그리하여 진정으로는 강렬하지 않은 가짜 강렬함이 넘쳐나기 때문이다. 특히 인스타그램의 ‘스토리’는 머무름의 부재가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기능이다. 기록조차 남지 않는 채로 소멸되기 위해 수많은 정보가 탄생하고, 정해진 수순을 따라 소멸한다.

 마지막으로 인스타그램은 가산과 축적을 지향하는 양적인 원리로 작동한다. 한낱 패스트푸드 사진에 좋아요를 누르나, 예술가가 10년 걸려 완성한 작품 사진에 좋아요를 누르나 동일한 하트 한 개로 획일화된다. 심지어, 전자의 좋아요 수가 더 많다면 인스타그램 세상에서는 그것이 더 가치 있다. 사진들 사이의 질적인 차이는 소멸되고, 원래는 비교될 수 없을 일상의 순간들이 좋아요의 수, 혹은 그 유저의 팔로워 수를 기준으로 비교 가능해진다. 그러면서 사람들은 가산과 축적에 더욱 더 집착한다. 팔로워 수를 늘리기 위해 ‘맞팔’하자는 제안과 함께 상대를 팔로우한 뒤 상대가 자신을 팔로잉하면 언팔해버리는 사람들마저 등장했다. 팔로워 수를 높여주는 프로그램까지 있다고 한다.

 이와 같이, 『에로스의 종말』에 입각하여 인스타그램을 분석해보면 그 안의 세상은 동일자들의 지옥이다. 아무런 갈등도 없지만 그렇기에 진정한 사랑도 없는, 가짜 새로움만이 범람하는 소비의 전당이다. 핵심 기능인 좋아요는 고민도 영혼도 없는 자동반사적 행위에 가깝다. 진정성을 찾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많은 유저들은 누군가 자신을 긍정해준다는 즉각적인 쾌락에 취해 좋아요가 도착했다는 알람을 반가워한다. 한병철의 또 다른 저작 『아름다움의 구원』 역시 인스타그램에 비판적일 문장들을 쏟아낸다. “정보의 홍수도, 눈에게 신속한 소화를 강요하는, 커팅된 화면들의 급속한 연쇄도 한곳에 머무르는 기억을 허용하지 않는다(한병철, 이재영 옮김, 『아름다움의 구원』, 문학과 지성사, 2016, p.106)”고 말하는데, 이 묘사는 인스타그램의 뉴스피드를 연상시킨다. 인스타그램은 회상으로서의 미(美)를 파괴하며, 유저들은 고양된 시간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무차별적인 현재에 갇히게 된다.

 그렇다면 인스타그램 세상은 절대 에로스에 가까워질 수 없을까? 인스타그램이 긍정성의 소음이 아니라 고요한 서사적 멜로디가 될 가능성은 없는 것일까?

 나는 인스타그램에도 에로스로의 희망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바로 사람들의 반응을 과도하게 의식하지 않는 ‘기록성’이다. 다른 유저들에게 반짝 관심을 받기 위해서 자극적인 사진을 올리기도 하지만, 언젠가 회상하고 싶은 삶의 순간들을 기록하고 또 기억을 아름다운 형태로 저장해두기 위해 글을 게시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 근거로, 많은 사람들이 ‘비공개 계정’을 이용하면서 자신이 허락한 소수의 친구들에게만 일상을 공유한다. 이들이 좋아요만을 갈구했다면, 글을 전체공개로 돌리고 모르는 이들까지도 유입되도록 해시태그를 달았을 것이다. 이들은 인스타그램 세상에서 자신의 사진들이 인기가 있든, 없든 소중한 순간들이 일기처럼 차곡차곡 쌓이기를 바랄 뿐이다. 또 그 소중한 소식들을 멀리 있는 소중한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어 하는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사진들을 넘겨보면서 추억에 젖을 것을 기대하는 것이다.

 물론, 비공개 계정에도 보는 사람 그리고 올리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부정을 거치게 하는 타격은 없다. 또 비록 그 수가 중요해지지 않는다고 해도- 좋아요에 비해 현저히 그 빈도가 적은 댓글을 제외하면 -표시되는 유일한 반응은 좋아요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쳐지나가기엔 아쉬운 아름다운 것들을 기록하고 후에 회상하고 싶어 하는 마음 자체는 에로스적인 것에 대한 본래적 태도와 유사하지 않을까? 필멸의 시간을 사는 가운데 보존과 간직을 꾀하며 모종의 영원성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특히. 이는 사실 공개계정을 이용하는 유저들에게도 마찬가지이다.

 한 걸음 나아가서, 인간이 꼭 부정성을 마주해야만 의미 있는 삶을 살 수 있는가를 물으며 한병철의 주장을 근본적으로 회의해볼 수 있다. 부정성을 맞닥뜨렸을 때에 진정한 존재의 가능성이 열린다는 견해는 타당하지만, 과연 그런 것으로부터만 의미가 오느냐는 의문이다. 의미의 출처에 대한 논쟁을 떠나서, 어느 정도의 긍정성 없이 인간이 삶을 버텨낼 수 있을까 싶다. 물론 한병철이 지적한 것은 긍정성의 ‘과잉’이다. 그는 긍정성 자체를 비판한다기보다 부정성은 완전히 쫓겨나고 긍정성만이 장악하는 사태를 비판한다. 그렇다고 해도 인스타그램 세상이 적절한 정도로만 긍정적인 세상인지, 아니면 긍정성이 과잉된 세상인지는 각 유저의 판단에 따라 다를 것이다.



Cover image: Vassily Kandinsky, Composition VII, 1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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