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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날만 Mar 15. 2017

목적으로서의 돈

게오르그 짐멜의 『돈의 철학』을 읽고

  

 게오르그 짐멜의 『돈의 철학』은 ‘화폐’라는 상징을 분석함으로써 그 안에 농축되어 있는 근대의 모습을 그려낸다. 그는 화폐의 성격과 화폐와 개인 사이의 관계, 나아가 화폐가 개인을 초월한 단위인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까지 탐구한다. 그의 논의는 한 세기 전 독일에서 쓰인 것이라고 믿기 힘들만큼 현재의 한국사회가 돈과 관련해 직면한 상황을 타당하게 설명해준다. 특히 6장 「생활양식」에서는 인간이 어떻게 돈을 사용하며 돈이 어떻게 인간의 행동을 규정하는지가 설득력 있게 다뤄진다. 주요한 문제의식 중 하나는, 기본적으로 다른 것을 획득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되는 화폐가 어떻게 그 자체로 목적성을 갖게 되는지이다.


 짐멜에 따르면 돈은 인간의 ‘의지’에 의해 설정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지성’이 작동하는 과정에서 이용된다. 그런데 “단순한 이해관심”과 그에 따른 단순한 목적을 갖는 원시인들과 달리, 현대인은 고도로 발전된 문화 속에서 하나의 최종 목적을 설정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다항적인 목적 계열”[1]을 설정한다. 목적의 개수가 늘었을 뿐만 아니라 그 향유 역시 더욱 쉽고 빈번해졌으며, 이 빈번한 향유 가운데 역설적으로 “최종적인 만족에 이르는 우회로와 예비작업이 무한히”[2]많고 길어짐으로써 목적 달성 과정이 복잡해진 것이다.


 이러한 복잡성은 돈으로부터 기인한다. 이전에는 서로 독립되었을 영역의 목적들이 돈으로써 통일되기 때문이다. 예컨대 어느 시점에 A라는 일을 성취함으로써 돈을 번 뒤, 거기서 획득한 돈으로 B라는 일을 성취할 경우, 서로 무관한 영역의 행위인 A와 B는 갑작스럽게 연결된다. 만약 B라는 일을 성취함으로써 추가적으로 경제적인 이득이 생긴다면, 그리고 그 이득이 또 다른 영역 C, D, E(……)에서의 성취로 연결된다면 A와 B는 무수한 사건들의 중간과정이 되어버린다. 이와 같이, 현대인의 목적은 수행되고 나면 소멸하는 것이 아니라, 한때는 목적이었다 하더라도 돈이 개입됨으로 인해 사후적으로는 수단이 된다. 이러한 과정이 계속되면서 목적 달성을 향한 길은 길어지고, 돈은 “모든 것을 위한 [공통적인] 수단이 되기 때문에”[3]오히려 목적 그 자체가 된다. 이처럼 돈은 화폐가 유통되기 이전의 단순했던 목적-수단 관계를 혁명적으로 변화시킨다.


 짐멜은 돈이 목적이 되면 발생하는 결과의 예로, 직업에 대한 소명의식이 소멸하고 어떤 직업에 종사하든 돈만 많이 벌면 그만이라는 생각을 든다. 그러한 “약삭빠름”이 미덕화되면 직업을 선택하는 개인의 인격은 사라지고 많은 돈을 벌겠다는 맹목만이 남는다. 이처럼 돈은 인간 개개인의 관심이나 직업적 개성, 취향 등을 중요하지 않거나 무차별적인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직업 종사자가 스스로의 인격으로부터 소외되든 그렇지 않든, 그리고 인간으로서 최종적으로 달성하고자 했던 인격적 목적이 무엇이었든지 간에 소득을 극대화하는 것만이 목표가 된다.


 목적으로서의 돈이 한 개인의 고유한 인격을 훼손하는 일은 한국사회에서도 흔히 찾아볼 수 있다. 여기에는 한국사회의 특수성으로 인해 더욱 복잡해지는 ‘시간 차’, 구체적으로는 어떤 목적을 달성하고자 하는 인격적 의지가 발생하는 시점과, 돈을 충분히 벌게 되어서 목적 달성이 가능해지는 시점 사이의 차이가 주요변수로 작용한다. 한국인 역시 짐멜이 분석한대로 화폐를 다른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인식할 것이다. 사람들은 좋은 물건을 사거나 좋은 경험의 기회를 얻고 그로써 더 좋은 삶을 살기 위해 돈을 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처럼 돈을 벌기 이전에 설정된 목적들은, 사회구조적인 왜곡으로 인해 시간이 지나 충분한 돈이 모이고 나면 대개 달성되기 어렵다.


 그 왜곡은 한국사회에서 ‘돈을 번다’는 것이 함축하고 요구하는 험난한 과정으로 인해 발생한다. 짐멜이 “[돈을 버는] 최종 목적”이라고 칭한 것을 이루기 위하여 중산층 정도의 소득이 필요하다고 가정한 뒤, 그러한 목적을 지닌 사람이 목적 달성을 위해 돈을 벌고자 직업을 구한다고 상상해보자. 만약 능력이나 경험이 부족하다면 그는 다른 인력에 의해 쉽게 대체될 수 있는 단순노동 영역에서 단기 아르바이트생과 같은 비정규직 신분으로 취직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이 경우엔 소득이 낮아 애초에 설정했던 최종 목적을 달성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는 방법을 바꿔서, 교육이나 인턴십 등을 통해 자신의 노동가치를 높임으로써 더 많은 봉급을 주는 직업활동에 종사해야 할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준비 과정이 한국에서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20대 후반까지 이어질 정도로 길다는 점이다. 초등학생 때부터 전문직을 꿈꾸며 공부에 매진하는 아이들이 있고 고등학생은 재수, 삼수를 하면서까지 더 좋은 대학, 즉 자신이 희망하는 분야의 취업에 유리한 대학에 가고자 한다. 대학생이 되어도 더 좋은 직장을 구하기 위해 스펙을 쌓으며 휴학을 감행하거나 졸업을 유예하곤 한다. 이처럼 긴 시간을 투자해도 취직에 성공해서 원하는 만큼의 봉급을 얻기가 어렵지만, 설령 그러한 경제적인 소망이 충족되었다고 가정해도, 원래에 설정되었던 최종 목적을 달성하기란 쉽지 않다.


 왜냐하면 첫째, 지나치게 긴 시간이 흐르면서 원래에 설정했던 목적에 매력을 느끼지 못하게 되거나 더 중요한 다른 목적이 생길 수 있다. 그러나 최초의 목적이 사라졌던 것과 같은 원리로 이렇게 생긴 새로운 목적도 얼마든지 유예되거나 제거될 수 있는 것이다. 둘째, 기존에 설정했었던 목적에 내재하는 특성들로 인해, 그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현 직장을 그만 두어야 할 수도 있는데, 이러한 자발적인 퇴직이 현실적으로 어렵기 때문이다. 예컨대 세계여행을 떠나기 위해, 자신만의 가게를 차리기 위해, 좋은 학교를 세우기 위해(이러한 최종목적들은 흔히 들어볼 수 있다) 일단은 그와 비교적 독립적인 활동을 통해 돈을 벌기로 한 사람은, 그 활동을 통해 경제적으로 안정적인 궤도에 진입하고 나면 여행을 위해, 자영업을 위해, 공동선에 이바지하기 위해 그 안정성의 유혹을 뿌리치기 힘들다. 안정지향적인 사회분위기는 공을 들여 성공가도에 오른 직업영역이 있으므로 과거에 설정한 ‘사소한’ 목표를 위해 모험을 하는 것은 무익하고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압력을 넣는다. 어떤 경우이든 사람들은 자신이 애초에 설정한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다. 따라서 결과적으로는 그 목적이 아니라 돈을 위해 돈을 번 것이 된다.


 돈을 벌기 이전에 설정되었던, 그러나 결국 달성하는 데엔 실패한 그 목적에는 개인의 성격이나 개성, 취향 등이 반영되는 반면, 목적화된 돈에는 인격이 반영되지 않는다. 짐멜은 돈이 인간들을 초월하여 객관화되는 과정을 상세하게 논증한다. 사람마다 다른 이해관계로부터 중립적인 지성의 지배를 받아 사용되고 획득되는 돈은 무특성적이며 “개별적인 이해관심, 활동을 평준화”[4]한다. 따라서 돈을 벌기 위해 돈을 버는 사회에서는 개인의 인격이 살아남기 어렵다.


 문제의 원인이자 중대한 관건은 목적 달성을 ‘유예’하는 것에 있다. 한국사회에서는 어렸을 때부터 개인에게 개성적인 목적의 달성을 강제로 유예시키고 다른 외부적인 목적을 주입하는 일이 흔하다. 나아가 그러한 유예가 목적달성을 위한 노력보다 더 현명하고 성숙한 태도라고 강조하는 경향성이 있다. 가장 선명한 예시로 ‘고3’의 삶을 들 수 있다. 그들은 분명 저마다 고유한 목적을 지닌 인격체임에도 불구하고 공부하는 기계로 전락한다. 이때 그들에게 공부 외에 다른 활동이 금지되는 이유는 현재 다른 쾌락이나 목적 달성에 대한 욕구를 참고 대학 합격 이후로 그 충족을 연기하면 더 효과적으로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는 사회적 설득 때문이다. 그런데 대학에 합격하고 난 뒤 학생들의 삶에 대해 고찰해본다면 그러한 설득은 기만적인 것으로 판명된다. 대학에 들어오고 나서도 안정적인 직장을 얻을 때까지 자기목적을 유예하라는 주문을 받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컨대 정작 취업을 한 이후에는 그러한 주장이 기만이었던 것으로 판명되기 쉽다. 예컨대 돈을 많이 벌어도 노동강도가 높아서 원하던 목적을 이룰 수 있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해질 수 있다. 그렇다면 한국인은 언제 본인의 개성적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가? 기나긴 유예 끝에, 일반적으로 퇴직 후로 그 시점을 잡는다고 해도 건강이 좋지 않아서 목적 달성이 어려워지거나, 자녀에게 투자한 탓에 다시 돈이 부족해진다. 한 번의 유예는 또 다른 유예를 낳고, 그러한 사이클이 계속되면 절대 처음의 인격적 목적은 달성될 수 없다. 수단으로서 그 중요성이 역설되어왔던 돈이 사실은 모든 것의 목적이었음이 밝혀진다.


 유예가 항상 나쁜 것은 아니다. 만약 목적의 달성이 당장 불가피하다면 유예기간 동안 다른 것에 노력을 기울이는 편이 오히려 목표에 가까워지는 길이다. 또한 유예의 과정에서 돈 벌기를 지향하는 일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목적 달성의 가능성을 높이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일 것이다. 그러나 유예가 유일한 방식은 아닌데도 유일한 것처럼 포장하고, 유예의 동안 이루어지는 노력의 방식 및 내용을 직업적인 귀천의식에 따라 특정한 길만으로 유도하면서 그 외의 길은 배제하려는 사회적 압력은 기만적이다. 이는 위에서의 논증에 따라 최종목적을 달성하는 가능성을 낮출 뿐만 아니라 개인의 인격을 훼손하고 삶의 다양성을 떨어뜨린다. 개인은 부과된 것 외에 다른 선택지를 상상할 수 없거나 상상해도 수행할 수 없으므로 실은 자신의 삶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과제처럼 받아들이는 것에 불과하다. 그렇게 강제로 부과된 과제를 체계적으로 회의할 능력을 갖지 못하기도 한다. 대개 고3은 자신의 삶이 스스로 원하는 것인지도 모르게 공부를 해야 하며, 어떤 이유에서든 책상 앞을 뛰쳐나갈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사회에서는 모두가 아이이다. 어른이 되면 원하는 것을 할 수 있으므로 그때까지 기다리면서 하라는 대로만 하라는 요구에 충실하다가 결국은 모두가 끝까지 아이로 남는 사회는 성숙하지 못하다. 한국사회는 지금보다 더욱 개인의 인격적이고 개성적인 선택을 존중해야 한다. 돈의 이름으로, 돈이 다른 목적을 위한 수단이 되어줄 것이라는 기만적인 설득 하에 고유한 목적의 달성을 유예시키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1]게오르그 짐멜, 김덕영 역, 『돈의 철학』, 길, 2013, p.753

 [2]같은 책, 같은 쪽.

 [3]같은 책, p.754

 [4]같은 책, p.758.



Cover image: ⓒFernand Leger, Men in the city, 1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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